[셈한] 이토록 고요한 시간에
손을 씻었다. 비누거품이 세면대에 뚝뚝 떨어질 정도로 잔뜩 묻혀 손을 비벼가며 몇 번이나. 이제 사라졌을까 하여 손을 들어 향을 맡았지만 손에서는 여전하게도 소독약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 것이 너의 냄새일까 하다 고개를 저었다. 너의 냄새와 향은 이렇지 않았다. 분명, 분명.
"하아."
타일에 등을 기댄다. 이 냄새가 너의 향이 아님은 분명한데 손의 물기가 완연하게 사라지는 깊은 시간 뒤에도, 끝끝내 네 냄새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이토록 고요한 시간에]
2014 08 31
매주 수요일, 학교가 끝나고 나면 홀로 일찌감치 교정을 빠져나와 16번 버스를 탄다. 이전에는 기분에 따라 월요일과
금요일, 혹은 주말에도 버스를 타는 일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빈도가 많이 줄어서 자주라기 보다는 이따금이라는 횟수로 변해 있었다. 이
방문은 의무라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무거울 지 모르나 책임이라는 단어와는 더더욱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 어쩌면
이제는 그저 습관이란 이름 정도만 붙일 수 있는 옅어진 행위.
요 사이에 어떤 생각을 전개해나가도 우울한 기색으로 변하고는 한다. 이것이 썩 좋은 습관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헤드셋을 끼고 음악의 볼륨을 높여본다.
학교에서 12정거장, 처음에는 제트를 타고 다녔지만 곧 둘만이 지내는 어색한 침묵을 견디지 못하여 며칠만에 그만 둔 뒤로는 혼자 이 버스를 타고 오가는 탓에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익숙하기 그지 없었다.
'또봇이 무슨 의미가 있어!'
문득 내가 제트에게 소리치던 말을, 그 날의 풍경을 떠올렸다가 애써 창 밖으로 다시 시선을 돌린다.
흐려졌던 시야가 유리에 멎으며 문득 마주한 유리 속 소년이 엉망으로 잔뜩 찌푸려진 얼굴을 하고 있던 탓에 웃음을 터트렸다. 난데 없는 웃음으로 주변 몇 몇 사람의 시선이 내게 향하는 것을 알았으나 곧 그들과 시선을 마주하자 황급하게 고개를 돌리며 나를 피한다, 혼자 웃는 것은 혼잣말 만큼이나 괴이한 행동일지도 모르나, 내가 마주한 유리 속의 얼굴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를 그들도 볼 수 있다면 분명히, 그들도 웃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버스에서 내려 택시 승강장을 지난다. 음악소리의 볼륨은 여전히 높아서 한 발을 디딜 때마다 귓가에 소리가 웅웅 거리고 있었건만, 하얀 건물을 마주하는 순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여, 나는 이 건물을 싫어한다.
대도병원, 네글자가 선명하게 박혀있는 하얀 건물 안으로 무거운 걸음을 움직인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한 때 내가 쓰던
병실의 문앞에 선다. 희미하게 말라붙은 꽃의 향기가 스며나오는 듯하나 그 보다 독한 소독약의 냄새에 속이 울렁거린다. 하지만
그래도 네게 이런 엉망인 얼굴을 보일 수야 없으니 애써 웃으며 문을 열었다.
사실, 어차피 너는 나를 보지도 못하겠지만.
너는 투명한 비닐로 감싸인 사각의 공간안에 온몸에 기계와 선을
꽂고 간신히 얼굴 일부만을 밖으로 내어보인채로 잠들어 있었다. 이 것을 잠이라 한다면 아주 아주 긴 잠이다. 삐, 삐, 삐.
일정한 소리가 나는 기계소리에 가려져 너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하나는 지금 잠을 자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 잠조차 잠들지
못할 정도로 머나먼 곳으로 이미, 떨어져 사라져 버린 건 아닐까. 숨쉬고, 먹고, 배변하는 모든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은 하나가
아니라 기계다. 그런데도 너를 살아있다 말할 수 있는 걸까.
투명한 비닐막 주변에는 수북한 꽃다발들이 쌓여 있었다. 한 때는 아름다웠을 지 모르나 꽃다발은 말라 비틀어진 꽃다발은 그 흉측스러움에 소름이 끼칠 것 같다.
더 러, 꽃다발안에 있는 메세지 카드들이 더더욱 그랬다. 사회의 모범, 진정한 사랑을 실천한- 생전에 하나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보내준 이 소중하고 소중한 메세지들은 처음에는 이 병실을 가득 채웠었고, 곧 잊혀지게 되었다. 그들이 선택한 단어만큼이나 하나가 숭고한 존재였다면, 어째서 그들은 더이상 하나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는가, 그런 건- 비겁한 게 아닌가.
한달하고도 며칠 전,
우
리는 하교를 하고 있었다. 하복으로 바뀐 교복을 차려 입고,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횡단보도에 서있던 길에, 어떤 아주머니가
작은 여자아이와 무단횡단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저 사람들, 저래도 괜찮은거야? 라고 생각하며 두리와 내가 이야기를 하던
사이에 오직 하나만이 여자아이를 향해 멀리서 돌진하던 트럭을 발견했다. 그리고 내가 시야를 돌리기도 전에-귓가에 먹먹히 울리며
크고 강하게 번지는 스크래치 소리와 여자아이의 비명소리가 크게, 아득히 크게 들리고-그리고, 눈에 비치는 풍경은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참람.
생각이 멎은 사이에 너는 불유쾌한 액체를 도로 위에 한가득 흘리고, 그리고 아주 한참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매 스컴의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한다. 더더욱 불유쾌했던 것은 하나가 구했던 여자아이와 그 엄마가 어떠한 말 한마디 없이 자취를 감췄다는 사실이었다. CCTV며 인터넷에서 그들의 정체를 밝히려는 자들이 있었으나 사실 그것들도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네가 하복을 입고 학교에 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다시는, 네가 하복을 입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그 사실이 내게는 더 중요하다.
먹먹함에 잠겨 하나와의 시간을 추억하는 사이에 창 밖이 주홍으로 물들고 있었다. 불을 켜지 않아 어둑해지는 1인실 안에서, 투명한 벽으로 가로막혀, 온통 천과 기계 속에 몸을 파묻은 그를 바라본다.
너는 정말 하나일까, 웃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고, 이름을 불러주지도 않는데, 그저 언제까지나 잠들어-다시 일어나도 다리도, 팔도 움직이기 힘들 거라는 이 망가진 존재가 과연 너일까.
나 는 눈을 감았다가 뜨고, 어떠한 결론을 내려 그와 나를 가로막던 사각의 공간의 지퍼를 올렸다. 지익-하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붕대로 둘둘 말려 손의 끄트머리만이 남겨진 그 손 끝을 잡았다. 희미한, 온기마저도 느껴지지 않는 하얀 손끝에 나는 내 생각에 확신을 더할 수 있었다.
이 건 네가 아니다.
네가 남기고 간 미련이며, 내게 남긴 추억의 추악한 일면일 뿐이다. 그러니.
"안녕."
나는 너스콜의 코드를 뽑아 던졌다. 그의 수척한 뺨위로 자리한 호흡기를 떼어낼 필요도 없이 그저 인공심폐기계의 버튼을 잠시 끄는 것 만으로 방은 고요에 잠겼다.
눈물조차도 말라 나오지 않았다.
이미 너와 헤어져 있던 참이라, 나는 이 순간이 이별같지도 않았다.
그저 이 시간은 고요했고 조금 길었으며 그저 참아내는 것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말라붙은 꽃에서 풍기는 빛바랜 향과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소독약 냄새 속에서 나는 그저 한참을 서서 10분을 버텨내었다.
시계가 정확히 10분을 지난 뒤에는 너스콜의 선을 연결하고 기계의 버튼을 다시 올렸다. 곧, 이명 같은 길고, 사나운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비로소, 나는 미련을 버렸다. 이토록 쉬운 일이었다.
이젠 안녕,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그 전에 이젠, 정말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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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로_멘션온_캐릭터를_두번째로_멘션온_캐릭터가_죽인다
태그로 받았습니다. 세모를 멘션으로 주신 호빵(@ny3513)님과 하나를 멘션으로 주신 이상한 고양이(@oddcat9411)님에게 이 글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