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무면] 이면(裏面) - 上
[이면(裏面) - 上]
2016 01 12
후부키조를 나온 이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화제의 그 '대머리 망토'님에게 구원당한 이후로 꾸준하게 활동하고는 있지만.
"소득 없네."
몇 달 째 빈곤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일반인이나 폭력배 정도는 어떻게든 오케이지만, 그런 녀석들 물리쳐 봐야 생활비는 나오지 않고 잡을만한 현상수배범은 죄다 조직들의 차지, 열심히 순찰하고 열심히 괴수를 물리치고는 있다지만 애초에 B급 정도로 평가받는 능력이니 괴인을 한 방에 물리칠 정도로 강하지 못해서 그 보수마저 분배되는 형편이라, 결국은 아득바득 보수를 긁어 모아도 한달치의 월급 정도. 히어로 협회에 들러 혹시 돈벌이가 될 만한 일들이 있는지 추가로 살피고 있는게, 최근의 일상이다.
왜 히어로를 계속하고 있는 걸까?
명확한 답은 아직 내리지 못했다. 딱히 정의롭거나, 보람을 찾는 이유도 없고-. 그래도 그 날, 후부키조를 나오며 무언가 깨달은 것도 같지만-애초에, 정의라는 거 굉장히 모호하지 않나.
골목으로 들어가 담배를 꺼내 문다. 이런 것이라도 하지 않으면 마냥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는 것이 없다. 목구멍이 안개로 틀어막힌 것 같았다. 공기는 언제나 춥고 눅눅하고 지독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 일상, 그런 나날.
인기척을 느낀 건 라이터로 불을 붙인 직후였다. 두터운 굽의 신발이 바닥을 딛는 소리, 적의는 느껴지지 않아 시선을 가만히 돌리자 괴이한 코스튬의 남자가 눈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초록색 헬멧과 황갈색의 갑옷, 코스튬, 코스튬이라니. 요즘 세상에 그런 촌스러운 복장 하는 사람은 정말 드물지 않은가-하다가 그 촌스러운 외향에서 상대를 겨우 되짚어냈다.
유명인 등장이네. C급의 그 남자다.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 사진으로도 본 적이 있다. 엄청나게 약하고 엄청나게 촌스러운 주제에 정의니 규칙이니 입바른 소리만 하는 오지랍쟁이가 있다고. 그는 고글낀 시선을 나에게 맞추더니 손가락을 들어 내 머리 위를 가리켰다. 금연표시.
이 남자, 규칙 어기는 걸 싫어한다고 했지. 가능한 선한 웃음을 짓고는 담배를 가렸다. 버릴 수는 없다. 애초에 약한 상대이기도 하고 돗대였다. 한 주에 한갑만 피기로 한 이상 이 담배를 끄면 이번 주의 담배는 더이상 없다.
"아, 무면허라이더씨였죠. 이런 데서 뵙네요."
인사로 넘어가 주면 좋으련만-그렇게 해주지는 않는 모양인지 그가 성큼성큼 내게로 다가온다.
"B급-신인씨."
낮은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온다. 귀찮아질 징조에 골치가 아파온다. 내 쪽이 연하일텐데 훈계할까? 잔소리를 할까? 약하다고 소문났으니 폭력을 쓰지는 않을텐데, 그렇게 생각하는데 문득 그가 손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맞는다. 맞겠지? 무력으로도 차이가 있으니 때린다고 아플 나는 아니지만, 그렇다해도 정의나 규칙을 지향한다는 양반을 내가 먼저 때리는 것도 조금 내키지는 않는다. 일단은 히어로 활동기간에서는 그 쪽이 선배이기도 하고.
"-?"
잠시 유추했던 고통은 없었다.
입가에 물고 있던 담배가 치워진 것을 한 박자 느리게 느끼며 조금 눈꺼풀을 들어올렸을 때-그는 담배연기를 들이 마쉬고 있었다. 담배를 쥐고 깊이 물어 연기를 뱉는 느릿한 동작, 그늘 속이었는데도 고글의 액정이 연기로 부옇게 흐려지다가 느슨하게 풀어지는 것이 확연하다. 투광된 렌즈 속에서 얼핏 보이는 시선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훨씬 날카로운 것이라 마주하는 것 만으로 숨이 멎었다. 어라, 누가-이 남자가 상냥하다고 내게 가르쳐주었더라.
그런데 그가 담배를, 어째서? 늘 피던 브랜드의 담배였지만 그의 장갑낀 속의 담배는 지나치리리만치 현실감이 없다.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보여지는 소품 같다. 두번인가 숨을 깊이 마셨다가 다시 뱉어내는 과정을 지켜본다. 붉고 검은 색의 작은 불꽃은 그의 숨속에서 몹시 빠르게 타오르고 다시 식었다.
"신인군, 여기 금연건물이라네. 근처에 초등학교도 있고."
"아. 네."
어느 사이엔가 반정도 타들어간 담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조금 방심, 확실히 방심하고 말았다. 담배를 떨어트린 그의 표정은 시민들의 사진 속에서 보여지던 외향처럼 조용하게 미소를 띄고 있어서. 그래서 마음을 놓으며 바닥에 떨어진 담배를 보며 숨을 가다듬었다. 최근의 출동이 힘들었다던가-사소한 주변의 잡기라던지, 등급 낮은 히어로들의 고충이라던가 뭐 그런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다-
쾅-
아, 주먹이 꽂혔다. 몸이나 얼굴에 맞은 것은 아니고 단지 얼굴 옆에 위협적으로 꽂힌 주먹이지만, 나는-이전에 그에 대한 기사를 읽으며, 추호도 그가 나에게 주먹을 든다던가 하는 행위를 단 한번도 가정해본 적이 없었다. 낯설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도,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사납게 날 선 눈빛도-공기가. 서늘해서. 이 공간이 몹시 낯설게 느껴졌다.
"자네는 히어로인데-규칙을 지켜야 하지 않겠나."
변명이라면 생각할 만 했다. 방금만 해도 불을 붙였을 뿐이지 실제로 태운 것은 그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얼굴이 가깝다. 그의 그림자가 내 얼굴을 덮을 정도로, 솔직히 키도 훨씬 작은데 어디서 이런 위압감이 느껴지지는 거지-하다가, 문득 내가 그의 분위기에 조금 눌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아니네, 초면에 내가 실례를 했군."
내가 훨씬 강할텐데, 그렇게 계속 생각하자니 문득 화가 치밀었다.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던져서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담배를 가리키며, 그에게 비죽 웃었다.
"꽁초, 이대로 버리는 겁니까?"
당연히 그가 치우거나 당황할 줄로 알았다. 그러나 그는 얼굴을 살짝 기울이고는 연하게-웃었다.
"자네가 만든 쓰레기니, 자네가 치워야지. 히어로이기 이전에 어른이잖나."
졌다. 말에서도 행동에서도 졌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든 것은 의아함이었다. 저 남자가 그 유명한 정의의 히어로라고? 정말? 뭔가 이상하지 않나-. 이에서 아드득 거리는 소리가 난다. 틀리다. 소문 속의 그와 내가 목격한 그는 명백하게, 차이가 있었다.
"다시 보죠."
"다음에는-범법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보겠네. 신인군"
정의라는 단어로 지칭되는 남자가 궁금해졌다. 저 남자의 입에서 졌다는 말이 나오는 걸 듣고 싶어졌다. 자전거 소리가 들리다가 멀어져 간다. 재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올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