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저녁의 연보라빛 하늘아래로 가로등은 이르게 켜져 있었다, 너의 볼이 연하게 물들어 있었던 것이 단지 그 불빛이나 추위 때문만은
아니란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뒤로 갈수록 흐릿해져서는 웃음소리로 변하던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으며 어떤 생각을 했던가-단지
기억나는 것은 그 날 이후 우리는 '다시'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검은 캐리어 가득히 옷을 챙겨 넣었다. 방 한켠에 놓여진 빨간색 아동용 캐리어에 시선이 멎었다가 흩어진다. 저렇게 작은 캐리어를 쓴 적도 있었나,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버지에게는 따로 방문을 알리지 않았기에 집 안은 지나칠 정도로 조용했다. 딱히 애정이 줄어드거나 다툰 일도 없었지만-내가
아버지의 키를 넘어선 이후로 우리는 조금, 대하기가 어려워 졌다. 이따금의 메세지와 이따금의 짤막한 통화, 보통의 가족이란 것도
지금의 우리와 다르지 않기에 너무 무리하지 않으려고 한다.
짐
을 모두 챙겨서 나오려는 길에 현관 밖에서 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티격태격, 닮았지만 억양과 성격이 다른 그 목소리들을
피할 까닭도 없건만 어쩐지 숨소리를 줄였다. 아무 움직임 없이 가만히-그렇게 몇 분이 지나 마침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된
후에야,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차고로 향했다. 어째서 도망치듯인지, 왜 이자리가 피하고 싶은 것인지 잘 이해는 가지 않는다.
1
년전 검정으로 썬팅한 이후로, 제트는 말수가 줄었다. 어차피 내가 대도시를 떠나 대학에 간 이후로는 변신이니 수호니 하는 타령도
거의 없어진지 오래, 발랄함이나 경쾌함 따위를 잃어버리고 대도시에 남겨진 제트는 그저, 세모가 어른이 된 건 기쁜데 슬픈 일이라고
알 수 없는 소리를 가끔 하곤 했고-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제트가 한 걸음씩 낯설어졌다.
어른,
그래, 나는 어른이 되었다. 의족과 의수를 제외한다면 아마도 평범한-이란 수식어가 어울리는 재미없는 어른이.
역 앞에 도착해서 제트에게 인사를 건넨다. 제트는 토라진 것인지 잘 받아주지 않지만-그래도 결국엔 입을 열었다.
[건강해야 한다고 그러더라고...]
"응, 너도."
캐리어를 끌고 역의 계단 앞에 앉았다. 문득 담배가 생각났지만 가져오지 않았단 걸 깨닫고 등을 계단에 기댄 상태로 잠시 눈을 감았다.
오
늘을 잠식한 무언가 막연하고 석연치 않은 기분은 아마도 밤에 꾸었던 꿈 때문일까, 연보라색 하늘 아래에서 하얀 목도리로 얼굴을
감싼-어린 소년의 얼굴이, 그 목소리가 선연히도 떠올라, 지금 손을 내밀면 밤의 공기로 식은 볼의 촉감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 귀를 기울이면 지금 당장이래도 그 목소리가-
"자기야-!! 많이 기다렸어?"
몸
이 휘청이며 진한 장미향기가 났다. 등을 껴안은 것은 같은 대학의 재학생으로 1년전부터 동거를 시작한 연인이었다. 부드럽게 컬을
넣은 갈색머리카락이 볼을 간질거렸다. 나는 순간 그녀에게 뜻모를 죄책감을 느끼고는 그것을 웃음으로 털어내고 그녀의 볼에 키스한다.
"아냐, 별로."
그
녀는 내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저녁에 같이 가고 싶은 레스토랑이 생겼다며 분홍빛 입술로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새소리같이
울리는 맑은 목소리에 머릿 속에 남았던 일념의 잔 감정까지도 털어내자, 그 후에야 그녀에게 진정으로 웃을 수 있었다.
캐리어를 수납함에 잠궈넣고 나란히 좌석에 앉았다. 그녀가 팔짱을 끼고는 자그마한 머리를 어깨에 기댄다. 진한 장미향에 문득 숨이 막혀온다.
"참, 나 열쇠 줘야지?"
"다시 잃어버리면 안된다?"
"미안, 미안."
학기 중에 지내는 오피스텔의 여분 열쇠를 그녀의 손에 쥐어준다. 열쇠, 어째서 하필이면 또 열쇠일까. 계속되는 우연과, 지독한 권태로움에 시트에 몸을 깊숙히 기댄다.
-
"언젠가는 네 마음을 여는 열쇠를 찾고 싶어."
네
말을 듣고 난 비로소 네가 두려워 졌다. 네가 내게 가까워지고, 또 가까워져서 마침내 네 바람대로 내 열쇠를 찾아내 내 문을
열어버리는 일은 내 바람은 아니었다. 그 문에서 쏟아져나오는 새까맣고 커다란 괴물들을 마주한다면 너는 마침내 나를 두려워하고
싫어하게 될테니. 그래서 겁쟁이인 나는 네게 이별을 고했다.
지금 내 품안에 있는 그녀는 절대 내 열쇠 따위를 찾으려고 하지도 않을 거고, 찾지도 못할 거란 걸 안다. 이제 내 마음은 영원히 잠겨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