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2018. 3. 14. 23:58

 그러니까, 보편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오늘은 특별한 이야기를 할 생각이 없다. 보편적인, 평범한 경우에 말이다.


 보통은, 유독 특별한 날-말하자면 편의점과 마트 등지가 들썩거리면서 유치한 복장의 직원들을 일시적으로 추가 고용하고, 빨강, 분홍 리본을 주렁주렁 달고 하트를 붙여 놓는 날에, 유독 사이가 좋고 친밀한 사이인 남자아이가 문 밖에 리본이 달린 케이크 상자를 들고 서 있으면, 그러면, 그 모습을 인터폰 화면에서 마주치게 되면 보통 어떤 생각을 하는가. 하는 이야기 말이다.



[나쁘지는 않은]

-for 슭곰님


2018 3 14






 한경은 턱을 괴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야트막한 높이의 고급 테이블 위에는 해피 화이트데이! 라는 글자가 은박으로 들어간 민트색 상자가 놓여 있었다. 참 악취미적인 디자인이기도 하지. 라고 생각하며 검지손가락으로 상자를 밀었다. 아 담배피고 싶다. 기지개를 켜다가 다시 소파에 몸을 굽히고 앉아 몇 번을 내쉰 건지도 잊은 길고 긴 한숨을 내쉬다가 다시, 결국 상자다.



 '아니 차라리 상자에 집중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조용해지니 물소리가 들렸다. 샤워기 소리, 저는 혼자 지내고 있고 지금 소파에 찌그러져 있는 셈이니 동시에 두 장소에 있을 수 없는 이상에야 제가 씻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욕실을 사용하고 있는 손님은 물론 따로 있었다. 이즘에서 짚어둘 것이 있다. 한경에 명예에 관련된 이야기다. 화이트데이와 욕실이라는 단어를 결부해 자연스럽게 연상할 수 있는, 마치 첫 장면제시와 같은 보편적인 상황...그러니까, 그렇고 그래서 그런 이야기 같은, 이 즘에 패스워드를 걸어 내용을 보호해야하는 상황은 아니다.



 '차라리 그러면 좋겠게.'



 같은 가정이 지나간 것도 같지만 때로 보편적인 망상은 일상적인 평화 속에서 쉽게 망가지기에, 그래서 망상이라 부르는 것이다. 가정이라고 해봐야 만약을 상정한 것이지,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제 일상에 아무래도 그 가능성은 없는 모양이지. 한경은 제가 세었다면 마흔다섯번째였을 한숨을 뱉었다.


 그러니까 차근차근하게 시간을 돌려, 10분 정도 전의 일이다.



 -



 탐정이라고 거창한 직업을 가진 한경은 아쉽게도 한국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렇다. 결국은 주업무가 불륜과 고양이찾기와 SNS추적이라는 소리다. 그런 한경에게 발렌타인데이니 화이트데이니 하는 것은 대목이라는 단어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고 결국 한경은 오늘 아침부터 저녁까지, 꼬박 열 몇시간을 이 세상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는 작업에 할애했으며 자본주의 국가에 걸맞게 막대한 소득을 올리며 직업을 바꿔야 할까를 진지하게 고민하던 참이었다.


 물론 주식으로 돈을 벌고는 있다만, 탐정이라는 단어는 어딘가 로망이 있는 것도 사실이어서 관두고 싶지는 않은데, 이렇게 깎여나가다간 금방 늙어버릴 지도 모른다. 주름살도 자글자글하게 생기고, 얼굴도 지치고, 그래도 나름대로 세수하고 쳐다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얼굴이라고 생각하지만 직업 때문에 늙어버리면 아깝지 않은가. 아, 물론 늙으면 늙는다고 해도 분명 잘생긴 미남일 것은 의심하지 않고 있다.


 차를 주차하고, 오피스텔에 돌아와 막 코트를 벗어 걸고,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일찍 잘까, 고민하던 즘에 현관벨이 울렸다. 10시를 넘긴 시간이니 손님이 오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만 손님이 아닌 쪽도 이상해서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개인적으로 찾아올 친구라는 사람들은 손님이란 사람들보다 몇 배나 위험했고, 대부분은 남아 있지 않았다.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인터폰을 켜자, 흐리고 회푸른 화면이 사람을 비췄다. 외국 야구구단의 점퍼에, 사이드백을 메고, 모자를 눌러쓴 소년의 얼굴, 그리고 케이크 상자. 고개가 돌아가며, 모자 아래의 얼굴을 확인하듯 비췄다. 약간 짜증이 난 듯 뚱한 표정이 흐린 화면 속에서도 확실하게 보였다.


 한경은 고개를 기울였다.



 "이유...? 네가 왜..."



 거기 있어. 오늘, 왜 하필, 케이크상자를 들고. 의문을 가지고 소년의 얼굴을 쫓다가 다시 멈칫거릴 즘에, 쾅, 하고 금속제 현관문이 요란하게도 소리를 울렸다. 걷어찼다. 남의 사무실 문을 한밤중에. 정말 굉장하고 온화한 매너가 아닐 수 없어서 한경은 머뭇거림도 멈추고 얼떨결에 현관문을 열었다.



 "그..."


 "아. 늦은 밤에 미안."



 소년, 이유, 유나는 한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잘랐다. 전혀 미안한 태도가 아니다. 이건 한경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보통은 미안해하는 사람이 오피스텔의 문을 걷어차며 등장하진 않는다. 유나는 케이크상자를 내밀었다. 은박의 화이트데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도드라진, 화면 속에서도 당황스러웠고 실제로 보니 세배 쯤 당황스러운 상자를.



 "그...이걸."


 "아. 이것 좀 버려줘."



 한경은 상자를 안고 당황에 빠졌다. 전개를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요즘 방영하는 특촬물 같다.



 "응?"


 "그리고 욕실 좀 쓸게."



 자기 욕실인줄 알겠네. 욕이라도 하려다가 일단은 상황파악이 먼저다 싶어, 그리 아름답지 않은 성질머리를 꾹 눌러 삼키고는, 어른의 인내심과 각고의 노력 끝에, 한경은 어떻게든 상냥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그 좀 따라갈 수 있게 설명해주면 안될까."



 한경의 말에 유나가 흐리게 웃었다. 어딘가 뒤틀린 웃음이었다. 그가 모범생이라는 사실은 그의 말에서도, 후일 유나 몰래 진행한 뒷조사에서도 확실하게, 아마 유나 본인보다도 많은 것을 알고있는 한경이었지만 텍스트 안의 소년과 눈 앞의 소년이 주는 괴리감은 이따금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어긋날 때가 있어서, 한경은 그게 낯설고, 그게 조금, 어쩌면 조금보다는 많이 흥미로웠다.

 

 그리 유쾌한 이야기는 아닌데. 로 시작한 이야기는 짤막했다. 소년은 아침에 편지를 받았다. 방과후에 AA카페로 나와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리고 소년이 나간 카페에 예쁘장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초콜릿 케이크에 예쁜 하얀색 초콜릿이 올라가 있었고, 소녀는 사랑을 고백했다...까지는 오늘 일어날 법한 보편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거기서 이야기는 일변되었다.



 "그게...걔가 누군지 모르겠어서."


 "?"


 "근데 너 이름이 뭐냐고 물었더니 케이크를 던지더라고. 내 얼굴에."


 "...허."



 그렇게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나고, 소년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물티슈로 응급처치만을 끝내고, 일단은 민폐겠다 싶어 찌그러진 케이크를 대충 추스려 제일 가까운 지인인 한경의 오피스텔로 대피했다는 이야기다...솔직히 이 즘 부터 한경은 이해를 포기했다. 그래서, 욕실은 써도 되는 거지? 하는 물음에 수건을 꺼내 주고, 소년이 욕실에 들어간 뒤로는 줄곧 케이크상자를 눈 앞에 두고 지금에 이르렀다...


 ...솔직히 그래, 아닐 줄은 알았다.


 일단은 성별도 다르고, 나이도 있고, 그래도 일단 그 화면을 보면, 누구나 잠깐은 가정하게 되지 않나 말이다. 아무리 비판적으로 기념일을 비난하고 그래도 응? 우리는 세뇌당하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고 말이지. 보편적으로 영화나, 드라마나, 아니 거기까지 안가도 트위터나 페이스북만 봐도 오늘이 어떤 날인데.


 혹시나 할 수 있잖아. 사람이. 응?


 한경은 그런 생각들을 찌그러진 케이크 마냥 구겨버렸다.



 '그래 내가 쓰레기지...'



 잠깐, 기대한 것도 사실이다. 그도 그럴게 소년은 부쩍 한경을 찾았고, 이따금은 식사도 했으니까, 제법 귀엽게 굴기도 하고 놀러오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하필 오늘이 오늘이었으니까.



 "갈아입을 옷 좀 빌려줘-"



 라는 목소리에 한경은 더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트레이닝 복을 찾았다. 아마도 이 날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 같다. 기억에 키워드를 붙일 수 있다면 당연히 어이없음과, 한심함이라는 해시태그를 걸어둘 것이다. 옷을 가져다준 뒤 몇 분 되지 않아 유나는 자신의 바지에 티셔츠만을 갈아 입고, 젖은 머리칼에 수건을 감고 걸어나왔다. 크림이 잘 지워지지 않았다며 투덜거리는 유나에게서는 확실히, 초콜릿케이크의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신세 졌네. 미안."


 "뭐...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의외로 선선하게 건네는 사과에 어른으로 마냥 화를 낼 수 만도 없어서 대충 대꾸하고 있자니 물이 떨어지는 유나의 머리카락이 걸렸다. 딱히 카페트를 새로 청소했기 때문은 아니다. 어린애가 감기에 걸려서 콜록거리는 꼬라지는 보통의 사람들도 보고 싶어하진 않겠지.



 "앉아봐."



 유나는 잠자코 소파에 앉았다. 비싼 가죽 소파에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드라이기를 꺼내뒀는데도 왜 쓰지 않았냐고 묻자 잘 안쓴다는 대꾸가 돌아왔다. 제대로 털기라도 하지. 나이도 제법 먹었는데 칠칠맞다는 생각을 하며 수건으로 머리칼을 대신 털어낸다. 갈색머리카락은 물에 젖어 어두운 고동색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목을 흘러내리던 물을 들어 닦으며 이게 무슨 종노릇인가 싶어, 한경은 마흔일곱번째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학교 가면 그 여자애 사과해 둬라."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래 뭐...알아서 하겠지."



 수건을 탈탈 털어낸다. 조금 거친 손길에 분명 감정이 들어가 있는 것은 분명한데도 툴툴거리거나 짜증을 낼 법한 유나는 어째서인지 제 손을 바라보며 잠자코 얌전히 앉아 있었다. 내려보이는 조그만 머리통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한경은 문득 손을 멈추고 수건 위에서 손바닥으로 머리통을 감쌌다. 작다. 저보다, 확실하게.



 "경이형."



 지가 필요할때만 형이지. 그 말에도 한경은 대꾸하지 않았다.

 유나가 키득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아침부터 고생했는데 이게 무슨 피곤에 절어서 마감하는 하루일까, 일진이 사나운 것에도 정도가 있지. 이 녀석이 얽혀서 좋은 일도 없다고 머릿 속으로 중얼거리는 참에-



 "형. 바디클렌저, 오렌지향이었구나, 같은 냄새가 나."



 웃음 섞인 말을 뱉으며 유나가 자기 손을 들어 보였다. 한 박자 느리게 내려다보자 수건을 지나, 머리카락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얼굴이 보기 드물게 활짝 웃고 있었다. 뭘 대단한 발견이라고 대단치도 않은 말을 하는 것 치고는 꽤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렇지. 당연히 같은 것으로 씻었으니 같은 향이 나는 것도 당연한데. 그런데.



 "이거 냄새 좋다."



 이상하게, 한경은 아무 말도 꺼내거나 다른 말도 대답하지 못하고 유나가 의아한 듯 제 이름을 다시 물어오기 전까지 굳어 있었다. 분명 지친 하루인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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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재(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