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특온 '걸어서 특촬속으로'에서 판매된 특촬 첫 개인지입니다.
추가 판매 계획이 없어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멋진 삽화는 서현님 / 표지는 우산님이 맡아주었습니다.
그럼, 재밌게 읽어주세요.
Drive Begins Night
~1996~
1
시야 속의 모든 사물이 흔들린다. 잠시 지진인가, 하고 생각했다가 사물의 진폭이 상하나 좌우의 일정한 흔들림이 아닌 비정형적인 일그러짐으로 흔들린다는 것에서 지진이라는 가능성을 제거했다.
온통 형태가 혼탁한 것들 중에 익숙한 보드카의 라벨이 붙여있는 빈 병이 두 어 개, 그래 이 저답지 않게 두서없이 흐르는 사고의 흐름까지 합쳐 헤아려 보면 이 육체는 현재 숙취 상태인 모양이다.
상비약 중에 숙취에 대한 약이 있던가, 없다면 물이라도 마시는 게 좋겠지 싶어 몸을 일으켜 세우다가 이내 균형을 잃고 책상에 부딪치며 꼬꾸라졌다.
“스미코- 스미코!”
제 것이 아닌 듯 둔한 통증 속에서 여자의 이름을 부른다. 영 쓸모라고는 없는 여자지만 물 한잔 정도 가져오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싶어 이름을 부르고 기다렸지만 여자의 대답은 한참이나 돌아오지 않는다. 정말 쓸모없기는,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가.
대답 없는 공백 속에서 시간이 흐르며 둔탁한 사고가 천천히 답을 도출해낸다. 아, 스미코, 그녀는 떠났던가.
입 안에 조금 쓴 맛이 도는 것도 같다. 허탈함에 가까운 것 같지만 정확한 감정의 상태는 규정해내지 못한다. 머리마저 제대로 가누기 힘든 정체 모를 묵직함으로 목을 꺾어 머리를 뒤로 기울인다.
처음 결혼을 할 때, 희미하게나마 기대했던 적도 있다. 어쩌면, 어쩌면 그녀라면 정말 낮은 확률이지만 저의 일부라도 이해해 줄 것이라고. 이해자가 되어줄 수도 있다고, 그런 희망적인 관측을 할 만한 증거도 조금은 있었다.
물론 결혼생활을 시작하며 한참이나 전에 버려진 기대였지만 그저그런 탐탁함을 제외한다고 해도 제 것으로 규정한 것을 놓아버리고, 잃어버리게 되는 경험은 정말로 기껍지 않다.
[뭐, 나와 자네를 포함해 우리 Scientist 들은 근본적으로 Desire에 솔직한 편이지, 하지만 나는 그런 감정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떠오르는 말은 누가 건넸던 것이었는지. 알콜에 잠식당한 뇌는 도무지 생각의 흐름을 정상적으로 이어가게 두지 않는다.
과학자, 욕망, 감정, 나쁨, 좋음.
떠도는 단어들은 드문드문 떠올랐다가 뭉치기도 흩어지기도 하며 머릿속을 헤집어 끈끈하게 고이다가 불쾌한 덩어리로 변해 녹아 내렸다. 그리고 치미는 분노, 까닭이 분명하지는 않은 그 감정으로 주먹을 쥐어 아래를 향해 강하게 내리 찍는다.
날카로운 유리의 파열음에 묻혀 무언가가 선연히 끊어지는 것을 깨닫는 즘에 누군가 제 이름을 부른 것도 같았다.
어딘가에서 커피의 향이 난다. 실험실 안에서 실수는 잘 범하지 않는다고 해도 혹여 시료가 오염될 수 있기에 연구실 안에서 마시지는 않지만 나는 커피를 기호하는 편이다.
카페인에 관한 단점이 몇 가지나 된다고 하더라도 두뇌를 정상에 가까운 컨디션으로 유지시켜 준다는 점에서 과학에게 커피란 존재는 그저 기꺼울 수밖에 없다.
집에 커피메이커가 있던가, 아, 결혼선물로 들어온 것이 있었다. 스미코가 평소답지 않게 상기된 얼굴로 어딘가에서 받아왔다고 검은색 커피메이커를 식탁 위에 내어 보이던 것을 떠올린다.
[당신이 좋아하는 커피원두를 주문했어, 당신의 신경과민도 이걸로 조금 나아지면 좋겠는데.]
떠올려보니 이렇게 대단치 않은 말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이 이상하기만 하다. 스미코가 그 말을 하며 커피와 어떤 간식을 먹으면 좋겠냐고 묻던 표정과 그 뒤의 햇살까지 선명하게 기억나는데 그 말에 내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되짚어 보자니 예민하지 않은 과학자가 세상에 무슨 쓸모가 있냐며 짜증을 냈던 것도 같은데 그래도 그 말을 하는 나는 그녀를 향해 웃었고 그녀도 나를 향해 웃었더랬다. 되짚어보면 나름 행복한 날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 그런 날도 있었다. 하지만 커피메이커를 이후로 쓴 일은 없었고 그녀가 주문한 원두는 결국 커피가 되지 못했기에 지금까지도 그 맛은 어떤 맛인지 알지 못한다.
“-일어났나.”
부옇게 흐린 시야, 아직도 멍한 정신 속에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는 커피를 말해오던 스미코의 것이 아니다.
인간의 언어를 쓰지 못하는 어린 개체들은 논외로, 그녀가 아닌 타인의 목소리를 모니터나 텔레비전이 아닌 공기를 통해 마주친 것이 너무 오랜만인지라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 자체에 생경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뻣뻣하게 긴장했던 근육은 습관적인 익숙함과 드문 안도감으로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그렇구나, 나는 이 목소리를 알고 있다.
“밤이야, 조금 더 수면을 취하게.”
이불이 목 아래까지 올려 덮어졌다. 이불 위로 몸을 다독거리는 손길은 속도는 느리지만 무게는 아주 가볍지는 않았다.
자야지-하고 속삭이는 것 같은 그 자박한 손길에 어떤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듯이 부상하던 의식이 다시 천천한 속도로 아래로 잠겨 들어간다.
커피의 향, 타인의 목소리와 손길.
삶에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음에도 마주친 지금은 제가 이런 것을 바란 것도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달콤하고 따뜻한 감정들을 납득하는 것이 낯설다.
그래, 낯설고, 하지만 익숙하고. 그런 것들-
까맣지만 적대적이지 않은 의식 속에 검게 잠겼다가 다시 떠올랐을 때, 나는 익숙한 내 방의 침대 베개 위에서 눈을 떴다.
전자시계의 형광색 숫자는 자정을 지나친 새벽을 가리키고 있었다. 방금 커피와 목소리는 꿈이었나, 꿈이었을까. 이런 망상에 사로잡힐 정도로 이지가 망가지고 있었나. 그 정도로 망가져 버렸나, 나는.
허탈함에 웃다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킨다.
몸 상태는 최근에 비해서 최악 정도로 나쁘지는 않지만 목이 푸석하고 바싹 말라붙어서 숨을 쉴 때마다 고통스럽다. 아아, 아까도 목이 마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하며 벽을 짚다가 난데없이 느껴지는 깊은 통증에 손을 붙들어 잡고 보니 손에 하얀 붕대가 단단하게 감겨져 있다.
파열음은 유리의 것이었으니 그 때 다쳤나, 당시의 파열음은 되새겨도 강한 것이라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과음의 수준을 넘어선 음주와 숙취였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인간 특유의 무의식적인 귀환 본능으로 어떻게든 침실까지 도착하는 것 까진 가정할 수 있다고 해도 이렇게 깔끔하게 상처를 처치할 수 있을 정도의 의식은 없었을 턴데.
설마, 하지만, 아니.
가정은 저답지 않은 설렘을 동반하여 계단을 걸어가는 걸음을 빠르게 만들었다.
2
그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투명한 안경과 잘 빗어 고정한 머리카락, 얇은 셔츠에 감싸인 마르지만 단단한 몸. 깨끗하게 다려진 셔츠의 깃과 소매의 단이 여전히 깔끔하기 그지없다. 서류를 쥐고 있는 긴 손가락의 손톱 끝마저 둥글게 손질되어있어 단정하기만 하다.
다른 한 손에는 머그를 들고 있지만 시선은 서류에 고정한 상태로 집중한 모습은 고상하고, 심지어 어딘가의 위엄이 느껴지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제 체형에는 맞지 않는 작은 식탁과 작은 의자에 앉은 그의 모습은 정적이지만 깨고 싶지 않은 평화로운 부류의 것이었으나, 아쉬움을 딛고 그의 이름을 부른다.
“크림.”
그는 반 박자 느리게 고개를 기울였다가 안경의 렌즈 너머에서 눈을 부드럽게 휘어 보였다. 익숙한 미소였다. 1년 전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Good night, 아니…, 잘 지냈나. 반노.”
그가 커피가 담겨 있던 머그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느린 걸음으로 다가와 어깨를 자연스럽게 끌어안아오는 그의 몸에서는 기억에 있는 샤워코롱의 향이 났다.
아마도 지금 내게서는 술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겠지, 샤워도 며칠 동안 하지 않았는데-라는 부정적인 신호들 속에서도 단단히 묶어오는 팔을 풀어내지 못하는 것은, 너무 오랜만에 만난 그에게 놀라서 일까, 아니면 그리웠던 것일까.
“내가, 너무 늦어 미안하네.”
크림의 목소리는 감정으로 잠겨 있었다. 우리는 나이를 먹었다. 고작 이런 재회 정도의 일에도 감정이 예민해지고 마는 것은 그 탓이리라.
변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로, 가까이에서 마주한 크림의 피부가 시간의 흐름에 상한 것과 눈가가 내려간 것을, 주름이 희미하게 잡히고 머리숱이 줄어든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은 아직도 젊은이처럼 곧고 맑게 빛나고 있다.
그 즘이면 흔한 시선이라 말하는 자도 있겠으나 그 열정에 지성까지 갖춘 이는 극히 드문 것이 지금 이 현실이었다.
이 눈을 보고 싶었다. 대등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지성을 갖추고 있음에도 관점이 달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세계가 절로 확장되는 이 영민함과 반짝임을 다시 보고 싶었다.
그래, 보고 싶었다.
“울 것 까지는 없지 않나.”
그의 말에서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할리의 만류 때문에 도착이 늦었지만 오지 않았다면 크게 후회할 뻔 했군, 아니 도대체 이 몰골에 이 폐기 직전의 집 상태라니, 제정신인가. 반노.”
뭔가 변명을 해보려고 하다가 말을 삼켰다.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할 정도까지의 정신적 상태는 아니었지만 내 눈에도 집안의 풍경은 좀, 다방면으로 부족함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심각한 것은 몰골이라는 단어를 부정하기 어려운 내 꼴이다. 그나마 숙면을 취했지만 가시지 않은 숙취와 음주의 흔적과 얼룩덜룩한 낡은 실험복, 언제 꺼내 입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셔츠와 바지는 구깃구깃한 상태로 아까의 포옹으로 크림의 의복을 오염시키지는 않았을지 염려마저 되는 수준이다.
크림은 먼지가 수북이 쌓인 서랍장과 화병위로 말라 비틀어져 붙어있는, 아마도 한 때는 꽃 이었던 잔해 따위를 불안하게 흔들리는 시선으로 쫓다가 미간을 와락 구겼다. 잔소리를 하려는 건가 싶어 슬그머니 물러났더니 이어지는 건 말소리를 대신한 길고 아득한 한숨이었다.
“후우, 정상이 아냐….”
그 작은 목소리가 잔소리보다도 심하게 아프다.
그는 식탁 곁에서 낯선 캐리어를 들어 식탁 위에 올렸다. 작지 않은 크기의 캐리어 안을 채우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논문과 서류 들이다. 얼핏 보면 크림 본인의 것은 아닌 이름들인데 어딘가 익숙하다 싶더니 AI와 줄기세포학에 관한 연구자들의 것이다. 오랜만이네-싶어 시선을 두고 있자 크림이 서류를 헤집어 몇 종류를 골라내더니 내 손 위에 그 종이들을 잔뜩 들어 안겼다.
“자네는 여기 앉아서 이거나 읽고 있게. Order-아니 부탁이니까.”
“만나자마자 명령하는 건가.”
“부탁이라고 정정했지만 심정적으로는 명령하고 싶은 기분이니까 그만 Shut up. 명색이 Scientist라는 자가 이 정도로 비위생적인 환경에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도 듣고 싶지 않아.”
단호하게 말하며 안경을 올리는 크림의 표정은 침통스러울 지경이었다. 변명을 하고 싶은 생각은 있지만 지금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말 내가 닥치면 좋겠나, 크림.”
“Exactly.”
“그럼 오랜만의 부탁을 받아들여 친구로서 한 마디만 말하는 것을 허락해주겠나.”
“Granted, 한 마디라면.”
막상 꺼내려니 조금 미묘해져서, 말을 꺼낸 건 그 허가 뒤에도 몇 분이 지나 크림이 제가 꺼내둔 논문들 몇 개를 캐리어의 것과 교체할 때 즘이었다.
“보고 싶었어. 크림.”
크림이 고개를 돌렸다. 딱딱하게 굳어져 엄격하게만 보이던 얼굴이 조금 찡그려진다. 그의 오른쪽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간다 싶더니 간신히 내려가며 웃음과 비슷한 뭔가의 일그러짐으로 변했다. 무언가 내게 말하려는 듯 우물거리던 입가는 결국 어떤 대답도 들려주지 않았다.
크림은 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웃고 있나 싶었지만 가렸던 손을 치웠을 때엔 어쩐지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말없이 자신의 재킷을 챙긴 크림은 현관으로 향했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걸음의 폭이 평소보다 훨씬 넓다.
혹시 나를 두고 돌아가려는 건가, 하고 잠깐 초조해졌으나 캐리어는 남겨져 있고 논문까지 쥐어준 걸로 봐서는 단순히 외출을 하려는 것 같다. 이 새벽에 어디로 가냐고 물어야 할까? 하지만 크림은 다 자라다 못해 성숙한 성인 남성인데 거취를 걱정하는 것도 조금 우스운 일이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녀와.”
스미코가 떠날 때 이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 예전부터 조금 신경이 쓰였다. 크림은 잠시 뒤돌아 우묵한 눈으로 나를 보다가 돌아오겠다는 뜻인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현관의 문을 통해 나갔다.
그나저나 크림은 어떻게 문을 열고 들어왔을까? 아무리 다재다능한 자라지만 문을 따는 재주는 없을 테고 멀리기는 해도 육안으로 봐서 손상된 부분은 보이지 않으니 부순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현관이 열려 있던 모양인데 그렇게 가정하면 정말 비참해져서 더 이상 생각하기를 멈추기로 했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청소라도 하는 게 좋을 지도 모른다. 크림의 말대로 폐기직전까지인지는 과장이라고 말해도 주변은 온통 만신창이다.
일회용식품의 용기가 방치되어 누적된 주방 한 켠에는 초파리와 유충이 들끓어 말라붙었고 마른 공기에도 퀴퀴한 냄새가 번진다. 주방만이 아니라 집안 전반적으로 먼지는 물론, 바닥에는 벌레의 사체와 먼지가 뭉쳐져 구석구석 쌓여 있고 사물은 자리를 잃었다. 공기에선 곰팡이 냄새가 났으며 천장 구석에는 거미줄이 내려앉고 벽지가 들떠 있다. 이제야 느끼기에도 지극히 심각한 수준.
이런 상태를 일말의 포장도 없이 크림에게 보였다는 것에 뒤늦게 수치심을 느끼며 행주를 가지러 가다가 이 심각한 집에서 유독 저 혼자 깨끗함을 주장하고 있는 식탁에 시선을 돌렸다.
윤기가 반들반들하게 나는 식탁만이 저 혼자 자정기능을 탑재하고 있었을 리는 없으니 크림이 닦았을 것이다.
아까 그가 읽던, 보조 자료가 없어 명확하게는 이해할 수 없는 수치의 데이터 기록을 몇 장 생각 없이 넘겨보다가 크림이 내려놓은 머그컵에 눈이 갔다. 커피는 반 정도 남아 있었고 손으로 잡아보자 식어 있기는 해도 아직 온기가 느껴졌다. 재킷까지 챙겨서 나간 크림의 태도로 보아서는 아무래도 1~2분 안에 돌아오려는 것은 아니니 이 커피는 곧 버려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좋은 향인데 버리면 아깝다고 생각하며 한 모금 마셔본다.
술로 학대받던 육체가 갑자기 부어진 액체에 놀랐던지 잠시 위장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지만 곧 잠잠해졌다.
논문을, 읽기로 하자.
그게 크림의 부탁이었다. 청소를 표기하기로 결심하고는 크림이 앉았던 의자에 반대에 앉아 그가 꺼내 건네준 자료들을 검토한다. 논문은 나온 지 심지어 두 달이 지난 것이 있었음에도 온통 읽지 못한 것들 뿐 이었다. 제길, 얼마나 방만하게 살고 있었던가. 하는 후회도 잠시 밀려드는 지식에 빠져 들어간다.
크림이 인근의 24시간 대형마트에서 청소용품과 식료품을 몇 박스나 바리바리 사들고 돌아왔을 때는, 내가 논문을 다섯 개정도 읽고 메모를 발췌하고 있었을 무렵이었다.
3
크림과 같이 잠시 연구하던 그 대학에서는 배달을 주로 시켰다. 중화요리점이 제일 가까웠기에 제일 많이 이용되었고 가끔 초밥이나 일식을 시키긴 했지만 그 가게는 추억으로 보정해주기에도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크림은 석사 과정을 끝낼 무렵에 꼭 시간이 생기면 제 손으로 요리를 배울 것이라며, 이 음식들에게 요리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인류의 존엄성에 위배되는 일임을 강한 어조로 설파한 적이 있다.
-치이익-
버터가 가열되는 고소한 잔음, 이 집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던 유리 볼에 거품기를 사용해서 계란을 풀어내는 크림의 손놀림에서는 익숙함이 엿보였다.
일단은 집주인이 나였고, 가스레인지 앞에 있는 그가 손님이라는 사실은 잊은 것은 아닌데 이 주방에 나보다 그가 더 어울린다는 것을 부정하기엔 조금 부족함이 있다. 가만히 있기도 조금 양심이 아픈 부분이라 크림의 등에 물었다.
“도와줄까?”
“Not need help.”
단칼에 거절한 크림이 제 셔츠의 소매단추를 풀어 소맷부리를 접어 걷었다. 야채가 물에 씻기는 소리와 도마의 칼소리, 가스의 가열음과 팬 위의 버터가 녹아 만들어지는 고소한 냄새.
도움을 거절당했으니 논문이라도 마저 읽으려고 싶다가도 손에 다시 잡히지는 않아 크림의 뒷모습을 계속 쫓는다. 이 주방에서 다시금 요리를 하는 타인의 존재라는 것은,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어딘가 멀어서 조금 이상한 감각이다.
“자네는 연어와 브로콜리를 싫어했지.”
“기억하고 있었나.”
“과학자가 편식이라니 아무래도 드물지, 그 두 가지는 영양소도 풍부한 편이고……”
“오랜만의 재회에서 편식에 대한 잔소리야? 사양하고 싶은데.”
“Non, 오늘은 먹여야겠네.”
“어이.”
어차피 그렇게 할 거라면 왜 물어 본 건데, 당신. 크림이 주홍빛 연어의 토막을 얇게 슬라이스 하는 것을 바라보다가 턱을 괴었다. 사실 연어는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먹다보니 향이 나쁘지 않다는 게 결론인데 구태여 지금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재회한 상대에게 구태여 내가 달라진 부분을 부각시키는 것이 관계의 향진에 그리 긍정적인 쓸모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크림은 부분적으로 청소를 해가며 금방 몇 가지의 팬과 냄비를 사용하더니 뭔가 오븐까지 치우고 예열하는 모양새였다. 요란한 소리들과 냄새를 내며 고프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배에서 꾸르륵할 소리가 났을 무렵, 다시금 논문을 하나 시작해야 할까 할 때 즘 그는 웃으며 식탁을 채우기 시작했다.
요란한 것 치고는 요리는 거의 스프와 물렁한 재료들이 대부분이다. 잠시 생각하다가 내 상태를 떠올리고는 수긍했다. 지금 몸 상태면 최고급 와규스테이크 따위를 가져온다고 하더라도 먹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익숙하기만 한 일본식 그릇 위에 수북이 자리 잡은 서양식 요리의 모습은 이질적인 것이었지만 그 이질감을 느끼기 전에 허기가 올라왔다. 크림은 캐리어 깊숙이에서 와인 한 병을 꺼냈다. 와인을 그렇게 즐기지 않는 나도 알고 있는 브랜드, 그리 비싼 것은 아니지만 라벨은 익숙하기만 하다.
“그거 혹시.”
크림이 웃었다. 미국에서 떠나던 즘에 크림의 아파트에서 마셨던 브랜드였다. 좋아하는 브랜드라고 하며 몇 가지의 이야기를 늘어놓던 것을 희미하게 떠올린다.
“기억하고 있었나, 이런.”
“좀 더 좋은 걸 사오지 그랬어. 후원이며 특허 비용도 쏠쏠하다고 들었다만.”
“No, enough. 반노 자네가 기억하고 있지 않았나. 그렇다면 충분해.”
소름이 돋았다.
크림은 어쩌면 저렇게 느끼하기 짝이 없는 말을 저렇게 느끼한 얼굴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뱉을 수 있는 건가. 그것도 미국인의 특색인가. 뭔가 대꾸를 하려다가 더 이상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의 말을 듣는다면 정말로 내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잠자코 와인잔을 받았다.
고디마글래스라고 하던가, 귀한 수집용 유리공예품이고 소장용 가치가 있다고 들었는데, 이것을 선물했던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할리였다. 오지랖도 넓고 돈도 많은 그 영감은 네 녀석은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어차피 하는 결혼이라면 행복하게 살라는 카드와 함께 이것을 배달시켰지만 스미코는 너무 예뻐서 깨질 것 같다며 한 번도 쓰지 않았다.
귀하다는 말은 사실이었는지, 와인이 담긴 그 잔은 본래보다도 아름답게 보였다. 문득 스미코가 한 번도 이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봤다면 웃었을 것이다. 멍청하기는 해도 예쁜 것을 어지간히 좋아하는 여자였다.
잔의 기둥을 붙잡아 흔드는 사이에 크림이 셔츠의 소매를 정돈하며 식탁에 앉았다. 시작이라는 말이나 건배도 없이 조용하고 자연스럽게 식사가 시작되었다. 대화는 없다. 약속한 것은 아니지만 식기에 포크와 나이프가 스치는 소리가 단조롭다.
입에 넣은 오믈렛이 눅진하게 퍼지는 식감은 외관으로 가정했던 것보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맛이 났고 스프도 간이 약하다. 왜 하필 꽤 훌륭한 풍미의 스프에 브로콜리를 갈아 넣고 심지어 장식까지 해야 했는지. 오믈렛에는 꼭 자동차 모양으로 케첩을 뿌려야 했는지는 의문이 들지만 대충 의문을 참을 정도의 상황이었다.
“참, 브랜든을 기억하나.”
정적을 깬 것은 크림이었다. 나는 그가 말한 이름을 이미 잊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포크를 멈추고 미국에 있던 연구자들에 대한 근황을 한 명씩 꺼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결혼, 아이, 학계에서의 성취, 솔직히 말해 내게 흥미로운 이야기는 아니었고 심지어 말하는 크림마저도 그리 흥미로운 소재는 아닌 것 같지만 크림이 그 이야기를 내게 하고 싶어 한다면 막는 것도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크림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조금 괴로운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스미코의 일은-안 되었어.”
이 말을 하고 싶었구나, 당신은.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입술을 짓씹는 크림의 표정은 고통스러워 보였다. 간만에 맞이한 훌륭한 식탁 앞에서 그다지 지적당하고 싶지는 않은 부분이지만 이미 지적당한 마당에 의미는 없을 것 같다.
“아이들은….”
“뭐, 두고 갔어도 내가 이 모양이어서야 쓸모는 없잖아.”
심사가 조금 뒤틀리긴 해서, 아이들에게 내가 쓸모가 있는지, 내게 아이들이 쓸모가 있는지- 여기서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크림이 어떤 표정을 해올 지가 궁금해졌지만 말하지는 않았다.
“내가 이름을 지어준 그 아이는 이제 한 살인가.”
“뭐, 그렇지.”
갓 태어나서 내게 안겨진 첫 아이는 나름대로 신선하고 독특한 경험을 주었지만 대부분의 과학실험이 그러하듯 두 번째 아이의 탄생은 그렇게 신선하지는 않았다.
스미코의 친정에서도 이름을 보내오고 외가의 사랑을 받았던 장녀 키리코와는 달리, 아들이 태어나면 대부를 맡고 싶다고 하던 크림이 보낸 이름이 붙여진 고우. 좀처럼 자기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하는 스미코였지만 그 이름을 붙이는 과정에서는 답지 않게 목소리를 높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스미코는 크림 슈타인벨트를 싫어했다.
싫어했다는 단어를 넘을지도 모른다. 파열이 나기 직전, 침실의 침대 곁에 쪼그리고 앉은 스미코는 크림의 이름을 잔뜩 쉰 목소리로 저주하듯 부르고는 했다.
[크림 때문이에요, 그 남자 때문에 당신이 망가지고 있어요.]
[모르겠어요? 그 남자가 당신이 망가지는 걸 방치하고 있다고요! 이대로는 파열이에요, 주변의 사람도, 연구도, 우리 가족도 망가지고 있는 걸 정말 모르는 건가요?]
결과적으로 말하면 멍청한 발언이 되었다. 그녀와의 파열이 먼저였으며 크림은 이 파열의 파편 위로도 이토록 상냥하고 부드럽게 제 곁에 돌아오지 않았나.
하지만, 뭐 관점을 바꾸어 본다면, 나를 유독 싫어하던 할리 핸드릭슨 영감의 손아귀에서 크림을 되돌려 이 일본이라는 나라로 오게 한 것은 스미코와의 파열이 만든 파장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 그런 관점에서는 나쁘지 않다. 그래, 퍽 나쁘지만은 않다.
크림은 미간을 몇 번인가 매만지다가 안경을 벗어 닦았다. 길지만 마디가 도드라지는 손가락이 균일한 움직임으로 한참을 움직인다. 다시 안경을 쓴 그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조금 빠른 어조로 말을 틀었다. 크림은 연기에 영 소질이 없다.
“아직 명확화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기획중인 존재가 있네. 코어드라이버라고 부르는 것인데, 시제품의 기동을 생각해 두고 있어. 활용은 여러 방향으로 생각해 보고 있지만 일단 군견 형태도 나쁘지 않을 것 같지만 인간 형태로 굳어진다면, 그래, 어쩌면 내게도 아들 같은 형태가 될 지도 모르겠군.”
“아들이라.”
포크로 토마토를 으깼다. 아들, 가족, 분명 내게도 있던 것들이긴 하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는 않는 단어들이다. 당연히 크림에게도 익숙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막상 그 말을 하는 크림의 표정은 평온한 상태여서 조금 낯설다.
기분이 다시 뒤틀릴 정도로.
“그 실험체에 이름을 붙이는 건, 반노, You. 네가 맡아주었으면 해.”
입 안의 음식이 훅하고 비려져서는 목구멍으로 삼키는 것에 역겨움이 들 지경이었다. 크림은 조금 들뜬 것같이도 보여서 와인으로 목을 씻어내 보지만 이미 상한 입맛은 쉽게 본래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 망가트리기는 쉬워도 돌리기는 어렵다. 세상 모든 게 그렇다.
“실패할지도 모르는 일개 실험체에 가족을 칭하거나 이름을 붙이는 건 너 답지 않군. 과학자로의 이성을 강조하던 건 너였을 텐데.”
결국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 뒤틀리고 말았다. 크림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고개를 약간 틀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깊어진 눈매는 확실히 조금 전보다 침잠되었지만 그 침잠마저 나쁘지는 않다.
“그런가, 그럴지도, 그럼 이름보다는 Number로 할까.”
“숫자?”
“000이라든지 말이야.”
“세 자리 수라니, 그 정도의 실패를 상정해 둔건가.”
크림이 입을 부루퉁하게 부풀리고는 포크로 접시를 몇 번인가 튕겼다.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행동이지만 화가 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 지나칠 정도로 잘 차려 입은 옷에 토마토소스가 튀지는 않을까가 오히려 걱정될 지경이었다. 이래서 미국인들이란.
“아직 제작도 하지 않은 개체에 대해 실패를 가정할 리가 있나, 자네야 말로 Pessimistic해. 기왕이면 세 자리 수의 성공을 미리 예고해주면 얼마나 좋겠나.”
“크림, 내 꼴을 봐, 희망이란 단어가 그리 나오겠나.”
“물론 자네 모습이 그리 희망적이진 않고, 이 식사가 끝나자마자 욕실에 처박을 생각이네만 Scientist는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되네. 이건 사실 할리의 말이긴 하지만 동시에 내 말이기도 하네, 반노.”
크림의 눈매가 따뜻함을 담아 휘어졌다. 충고와는 달리 변화나 희망을 꿈꾸라는 요지의 말이 아닌 다만 내게로 향해지는 진한 걱정과 염려에 조금 숨이 막혀온다.
어색함을 지우려 썰어 넣은 오믈렛을 계속 씹는다. 씹으면 씹을수록 흐물흐물해지는 계란에선 더 이상 계란의 것이라기엔 미묘한 맛이 났다. 그나마도 목구멍으로 흘려가 보낸 뒤에야 느리게 답을 이었다.
“희망. 뭐, 메일로 보내긴 했잖아.”
내 희망은, 이 상황에서도 놓지 못한 그것들은.
“재미있는 이론이었지, 증식하고 진화하는 안드로이드, 그 개체에 내 이론을 더하고 싶다. 나쁜 발상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그 히로이 신조가 협력해 주었다면 조금 더 쓸 만한 기반이 되었을 테지만 이제는 내가 자네의 힘이 되어 주겠네.”
“그래, 내가 포기하지 못한 희망이니까.”
식탁에 내려둔-내가 섣부른 행동으로 망가트려 붕대에 감겨 있는 손 위로 크림의 손이 겹쳐졌다. 마디가 굵어진 만큼이나 단단한 크림의 손은 예전보다도 훨씬 믿음직스럽다.
“그 희망의 이름은 생각해 두었나.”
크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희망은 아직 희망일 뿐이지만, 이 연구의 끝이 어디일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지만 크림이 그것을 희망이라 칭한 이상에야 분명 희망일 것이다.
우리는 젊고 똑똑하고 지성과 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둘이 함께 있으며 앞으로도 함께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아.
“그 희망의 이름은, 로이뮤드라고 부르기로 했어.”
나는 웃었다. 크림도 따라 웃는다. 나는 내 능력이 세상을 경탄하고 발전하게 만들 것임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2017/1/21 특수촬영물 온리전
걸어서 특촬속으로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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