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은 조용하고 상냥하네요]
2016 01 17
예고에 없던 소나기였다. 빗물은 슈트를 무겁게 잡아누르고, 살짝 망가진 것 같은 자전거 체인에서는 달캉거리는 불쾌한 소리가 났다. 헬멧과 고글 덕분에 시야는 온전하지만 페달을 밟는 움직임이 둔탁하게 밀려난다. 사실 무거운 것은 비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고였잖아. 자네 잘못이 아니야.'
현상수배범 체포 중이었다. 범인은 순조롭게 체포했지만 범인이 버리고 갔던 차량에 폭약이 설치된 것을 너무 느리게 알았던 탓에 피해자가 나왔다. 사상자는 없지만 부상자는 대여섯명으로 그 중에는 피부이식을 받아야 할 정도로 상세가 심한 사람도 있었다.
알수 있었는데. 그에게서는 화약냄새가 희미하게 났었는데. 아. 내가 무슨-이런 멍청한 실수를 하는 주제에 히어로를 자처하다니. 멍청한, 바보 같은. 어리석은-온갖 부정적인 말들을 지껄이다가-문득 얼굴에 흐르던 빗줄기의 양이 줄어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안녕."
당황스러움에 자전거를 멈춰세웠다. 생각에 잠긴 탓에 알아차리는 게 늦었지만-어느 사이였는지, 우산을 들고 뒷바퀴의 축에 올라탄 후드 차림의 남자가 싱긋 웃어보였다.
"안녕?"
"안녕하신가..."
영 이상한 인사라고 생각하며 무면허라이더는 고개를 숙였다. 킥킥, 남자에게서 웃는 소리가 났다.
"상부상조야. 우산을 쓴 나는 걷지 않아 좋고, 너는 비에 덜 젖어 좋고."
글쎄, 그는 마음만 먹으면 집에 가는 정도야 순식간에 해낼 수 있고, 무면허라이더는 이미 빗물에 젖다 못해 물에 담궜다가 뺀 절인배추 상태인데 이 마당에 상부상조라는 단어가 어울리는지는 모를 일이다. 킥킥, 지상최강의 남자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사실 이 시에서 1인승 자전거를 둘이 타는 것은 명백한 불법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은 무면허라이더 자신도 잘 알고있는 바였다.
'그렇지만, 뭐. 이런 날 순찰을 도는 경찰은 없겠지.'
스스로가 사용하는 순찰이라는 단어를 평소에는 입에 잘 담지도 않던 경찰에게 은근슬쩍 위임하고는 페달을 밟았다. 이미 어긴 전적이 있었기에 조금 더 해이한 반응이란 것도 부정하기는 어려웠다. 무게는 오히려 무거워졌으니 페달이 무거워져야 하는 게 정상일텐데, 어째서일까, 그가 나타나기 전보다 수월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이타마는 우산을 쥔 손을 가볍게 바꿨다.
"무면허 너-요새 우리 동네 순찰 잘 안돌지 않냐?"
아무렇지도 않게, 여상한 태도로 물어오는 말에 무면허라이더의 페달이 잠시 멈칫했다. 어떻게 알았지. 속으로야 조금 동요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대답할 수 있었다. 억지로 뒤로 돌지 않으면 표정이 보일 일이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착각이네. 매일 돌고 있어."
"9시쯤 오는 거 아냐?"
"11시로 바꿨다네."
사이타마가 피식, 무면허라이더의 뒷목에 숨을 뱉어냈다. 의도적인 행동은 아니었지만 조금 간지러워서 신경이 쓰인다. 따뜻한 숨결.
"너, 나 피하는 건 아니지?"
"......설마."
사실은 매일 순찰 마다 그의 집을 올려다 보곤 했다. 사이타마의 집은, 따뜻하고 즐거움에 차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날로 늘어났고 이따금 늦게 순찰을 해도 불이 켜져 있어서-아, 또 즐겁게 지내고 있구나, 하는 그런 따뜻한 마음이 들고는 했다. 하지만-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면. 그래, 사실대로라면 피하는 쪽이 맞았다. 반짝거리는 사람들이 그의 곁에 늘어만 간다. 강한 사람도, 예쁜 사람도, 빛나는 사람도, 사이타마는 태양같은 사람이니까, 강하니까, 아마 자석처럼 그에게 이끌리는 사람이 계속, 계속 늘어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그런 풍경에 어쩐지, 자신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사이타마가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쓰지는 않겠지만 솔직히 말해 자신은, 신경을 쓰고 있다. 약하니까, 예쁘지 못하니까, 강하지 못하니까-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쉽게 험한 말을 내뱉고는 하니까. 혹시나 이런 자신에게 휘말려-사이타마 같이 온전한 사람에게 혹여 더러움이라도 묻을 까봐서. 그래서.
하지만 이런 말들은 그에게 하지 못할 것들이었다.
빗줄기가 거세어졌다. 우산으로 가리고는 있지만 이따금 시야를 스치며 물방울이 흩어졌다. 말소리가 잦아들었다. 어꺠를 쥐고 있는 사이타마의 손가락이 조금 더 강하게 붙잡아오는 것을 느끼며 페달을 밟았다. 거리가 줄어드는 것이 어쩐지 조금 아쉬워졌지만 그래도 아직 십분 정도의 시간은 허락되리라.
빗줄기 사이로-멀리 열차의 신호음이 번져나갔다. 자전거 위에서 듣는 소리는 평지에서 듣는 신호음과는 다르다.
"자네, 알고있나?"
"뭘."
딩-딩-딩-번져 잠기는 신호소리 속에서, 무면허라이더는 조금 웃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 말일세. 사실은 시민들이 부르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네. 특히 이런 비오는 날에는."
"헤에?"
"속도가 다르니까, 차원이 다르다고 해야하나-그 왜, 라디오에서 음역대가 다른 소리들이 다른 주파수에 침범하지 않는 것처럼."
사이타마가 우산을 기울이며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무면허라이더가 뒤를 살짝 돌아보고 확인한 그 얼굴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을 명백하게 표시하고 있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난 들리는데?"
"하하, 자네는 특이체질이잖나."
"그래서 그게 왜?"
"우리 말도 자전거 밖에 있는 사람들에는 들리지 않지."
"?"
"우리만 자전거라는 공간에 둘이, 있는 것 같지 않나."
대화가 멈췄다. 아, 남자 둘이서 하기에는 조금 낯간지러운 말이었던 것도 같다. 무면허라이더는 볼을 긁적였다. 다른 생각을 하던 사이에 돌에 스칠 뻔해서 가까스로 균형을 다시 잡았다. 명색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히어로인데 이런 곳에서 볼썽사납게 넘어져서야 시민들도, 등 뒤의 사이타마에게도 영 면목이 없는 노릇이다.
사이타마는 제 앞의 헬멧을 바라보았다. 청록색의, 촌스러운 헬멧, 촌스러운 슈트. 하지만 그 위로 새겨진 수북한 잔흔들은 결코 촌스럽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끔 멍청할 정도로 직설적이라니까. 게다가 남의 말 잘 듣지도 않고, 고집도 세고-하지만. 가끔 이상할 정도로 좋은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런 그가-사이타마는 싫지 않았다.
"그런 공간이 있다면."
"?"
"네 말대로 자전거라는 공간에 우리 둘이 갇힌 것 같다면-그 공간은 조용하고 상냥한, 좋은 공간이겠구나 싶어."
무면허라이더는 웃었다. 하핫. 부끄러운 것 같은, 조금 어색한 웃음 소리를 내고는 페달을 밟았다. 경쾌한 회전, 골목으로 휘어지는 곡선에서, 타이어는 물웅덩이를 스치며 물방울을 튀겼다. 잎사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마저 햇살에 반짝이고, 비가 잦아들고 있었다. 그 적어짐마저 아쉬운 오후였다.
"아아, 좋은 공간이고 말고."
사실은 어쩌면 자전거 위가 아니더라도-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이따금 세상은 이렇게, 상냥한 색으로 변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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