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소재있음, 일부 잔인한 소재 있으니 주의
그리고 그 후 사흘 동안, Y시에는 계속 함박눈이 내렸다. 조용하게 내려와 쌓인 눈의 조각들은 전례에 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 동안 높이도 쌓였지만 이미 출입이 금지된 도시에는 눈을 치울 사람도 없어서 봄의 중순 무렵까지도 눈이 남았었다고 한다. 그마저도 확실하지는 않은 이야기였다.
[검고 붉은 선]
2016 01 31
입에서 약한 단내가 올라온다. 아마도 지친 것일까, 그런가보다.
이런 몸이 된 이후로 지칠 수도 있다는 것을 가정한 일은 없었는데 아직 제게 인간적인 부분이 남았다고 생각하니 남자는 조금 우스운 기분이 들었다. 웃기면 웃자, 울고 싶으면 울자. 그렇게 결심했던 삶이었기에 남자는 입꼬리를 들어 웃었지만 곧 사그라질 웃음이었다. 그는 다시 걷기로 했다. 머리 위로, 어깨 위로, 몸 위로 계속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바람도 없이 눈이 내려 가라앉는 조용한 도시, 이틀 동안 줄곧 내린 눈은 어느새 이 도시 위로 한 뼘도 넘게 쌓이고 있었다만은 남자가 딛는 걸음 밑은 옅은 눈의 자취 아래로 단단하고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남자는 그 질감에 바닥을 내려본다. 희게 덮히었지만 검고 붉은 자국이 선연하기만 하다. 두꺼운 길-그래, 그 것은 길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검고 붉은 길, 그것은 오직 남자 혼자서 만든 잔흔이기도 했다. 눈으로도 덮히지 않는.
"조용하군"
남자는 문득 뒤를 돌았다. 앞선 길보다 선명하고 진한 길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다시 무겁게 발을 딛었다.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손끝에 끈으로 엮여 이어진, 기괴한 형상의 괴수사체 네개가 그의 걸음 뒤로 이끌려 부드득뿌득 기묘한 소음을 만들면서 바닥에 끌려간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남자의 등 뒤로 사체에서 나온 피와 체액, 잔해들이 짓이겨지며 연해지던 흔적 위를 쓸어 짙게 덮었다. 그 길, 비린내가 저절로 나오는 더럽고 유쾌하지 못한 길-그 길을 만들며 걷고 있는 남자, 남자의 이름은 가로우였다. 한 때 인간괴인으로 유명을 높였고, 어떤 전투 이후에 죽었다고 알려졌던 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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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는 않았다. 가로우는 은퇴해 있었다. 도망도 은퇴라고 불러야 한다면 대충 그랬다.
지겨워졌다. 왜 살아있어야 하는 지는 몰랐지만 죽어야할 이유도 없어서 그저 살았다. 목적하던 것이 망가진 마당에야 집착할 것도 없었다. 더러운 거리에 자리를 잡고 근처에 접근하는 남자들을 패고, 가끔 돈을 챙기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고 약을 하며 그렇게 쓰레기 처럼 살았다. 여자도 있었고 쓰레기도 있었지만 그 따위 것을 빼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게 엉망처럼 구르면서도 강하다는 무력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애초에 잃기도 어려운 수준이었다.
부동산에 가지 않아도 집이 생기고 가구점에 가지 않아도 침대가 생기고, 대강 굴러먹다보니 텔레비전도 있었다. 약에 취해있거나 사람에 취해있지 않을 때는 어릴 때처럼 이불을 뒤집어 쓴 상태로 TV를 봤다. 가끔 보고 싶던 남자가 보도되기도 했다. 그런 날에는 괴로워 졌다.
[이 사건은 C급 무면허라이더씨의 활약으로 민간인의 피해는 전무하며-]
왜 보고 싶을까. 잘 알지 못하면서도 이상하게 눈에 거슬려서 나중에는 신문도 모았다. 스크랩 따위를 한 것은 아니라 그 이름이 거론되면 쌓아두던 수준이었지만 흐릿한 사진이라도 뭉개져서 버려지는 건 어쩐지 싫어서 그대로 쌓아 두었다.
짐작이 가는 바는 조금이라면 있었다. 가로우가 이 도시로 들어오기 직전이었다. 제 몸도 건사하지 못하는 주제에 어른인 척 잔소리를 하며 이것저것 달큰한 말을 걸어왔던 것이다. 재미 없는 말투로-그럼에도 달다 기억될만큼, 가로우의 인생에 있어 가장 원하던 말들을 악의 하나 없는 얼굴을 하고선. 손짓 하나에 으깨져 버릴만큼, 개미 만큼이나 무해하고 연약한 주제에.
약에 절은 뇌는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밤의 거리에서 보고 싶던 그를 닮은 안경쓴 남자를 만났다. 돈을 주고 밤을 사서 시간을 보냈다. 바로 그 날 밤의 저녁뉴스에서 Y시에 재해레벨이 선언되었다.
"헤에, 무섭네."
"뭐, 이 세상에는 터무니 없이 강한 놈이 있으니까. 어차피 관계 없어. 그보다 TV볼 정도로 체력 회복되었다면 한 번 더하지."
"...짐승."
그렇게 또 남자를 안았다. 남자를 안은 것은 이 남자가 처음이었지만 그럭저럭 나쁘지 않고 거부감도 들지 않아서 문득 의문을 가지기도 했던 것 같다. 어쩌면 단순하게 보고 싶은 게 아니라-어쩌면 그를 안고 싶은 걸까. 아닌 것도 같은데 잘 모르겠어서 맨정신으로 생각해야 겠다고 느껴서 약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재해레벨이 해제되었음을 공표하는 아침뉴스에서 익숙한 이름이 다시 들려왔다.
[총 다섯명의 히어로가 Y시 재해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협회는 2차 인명피해를 막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희생된 히어로는 C급 1위 무면허라이더, C급 16-]
가로우는 정말 불쾌한 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정보도는 나오지 않았다. 병신 같군, 그렇게 생각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대강쌓아두었던 돈을 성교로 지쳐 잠든 남자 곁에 꺼내 두고는 Y시로 향했다. 조금 진심이 되어볼까 생각한 것 만으로 둔탁하던 정신이 약에서 쉽게 깨어나며 근육의 떨림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그다지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거리는 온통 Y시에 대한 정보를 쏟아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재해레벨이 낮았다고 한다. 인간과 비슷한 덩치의 괴수가 오처리된 방사능에 노출된 지저인이라는 것이 파악된 것은 이미 희생자가 발생하고, 공격권에 휘말린 남자가 피폭된 뒤였다. 재해레벨이 오보된 탓에 제대로 된 히어로의 도착은 뒤늦었으며 심지어 방사능 때문에 제대로 접근도 힘들었다. 그 멍청한 무면허라이더는 1차로 도착해 있었고 자폭하겠다 협박하던 괴인을 말리던 중이었다. 그리고 원거리 공격으로 괴인의 자폭기능이 발동되어 그대로 방사능과 함께 펑!
더 길고 자세하게 이야기 할 수도 있고 짧으면 한 줄로도 요약되고 한 문장으로 줄일수도 있고-더 짧게 말하면, 죽었다. 그 뿐.
협회는 방사능에 과도하게 노출된 Y시의 복구를 미뤘다. 히어로들의 시체도 아직 수습하지 못했냐며 질타하는 언론들에게 협회는 다만 방법을 계속 논의중이라고만 했다. 아마이마스크가 우수에 젖은 눈으로 말했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병신 같군."
그렇게 서두르지 않았지만, 가로우는 세시간 만에 Y시에 도착했다. 오후 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한 도시는 뉴스에서 보도된 모양과는 달랐다. 망가진 흔적이나 전투의 흔적은 있지만 폐허라기 보다는 그저 기능을 잠시 멈춘 도시 같았다. 조용하고, 끝없이 조용한. 생경한 느낌으로 걷다가 망가진 자전거 파편을 주웠다. 한 순간 멈칫하긴 했지만 이런 도시에 자전거는 수 없이 많으니까 이렇게 반응하는 것도 우습다 생각했다. 15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가죽장갑을 끼고 있는 팔을 줍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가로우가 한 때 무면허라이더라고 불렸던 존재를 대강의 형체나마 끼워맞춘 것은, 밤이 될 무렵이었다. 눈이 계속 내렸고 가로우는 코피를 한 번 흘렸다. 하지만 그 후 방사능 마저 저를 해치지 못한다는 것을 근거 없이 깨달았다. 핵에서조차 자유로울만치 강해져 있었구나. 쓰게 웃고는 제가 만들어 소파에 앉혀놓은 형체 옆에서 잠들었다. 일어났을 때는 저와 그 형체도, 주변 위로도 온통 눈이 쌓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눈을 치워주고는 이제 뭘 할까를 생각하다가-
재밌는 일을 생각해냈다.
괴수를 죽였다. 괴인도 죽였다. 이동도 쉬웠고 탐색은 더 쉬웠다. 가로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처음에는 암살자 따위를 보내던 협회도 가로우의 의도를 파악하자 쉽게 협조했다. 이틀 동안 자지 않고 먹지 않고 계속 살해한 개체는 60개체. 가로우는 그것을 지거나 끌고 Y시로 향했다. 가로우의 눈에는 깨진 고글이 씌어져 있었다. 도중에 마주친 대머리의 남자는 한참을 가로우를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무언가 말하려는 것도 같았지만 중요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몇 방울의 피만 자국을 남겼고, 이내 덮혀졌지만 가로우의 반복된 이동과 그로 인한 뜨겁고 불유쾌한 방식의 흔적은 쉽사리 눈 밖으로 불거져 나왔다. 드론으로 관측되고 있는 것도 알았지만 협회는 침묵했고 다만 까닭을 모르는 일반인들만이 Y시의 괴사를 입에 담았다. 괴담, 괴사, 남의 이야기라는 것은 얼마나 옅고 가치 없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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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우는 다시 터져나온 코피를 대강 닦았다. 체력은 손실되고 있었다. 방사능 따위가 저를 해치지 못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건강에 이롭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제법 쌓였다...이제 슬슬 지루해지니까 그만하기로 할까. 가로우는 아래를 내려 보았다. 왠만한 건물 높이로 쌓인 검붉은 구조물, 자세히 본다면 기괴할 모습이지만 눈이 그 기괴함을 어렴풋하게 감싸주고 있었다. 그 구조물 위에 낡은 소파가 있었고, 반정도 망가진 자전거가 있었고, 조각조각을 어설프게 이어놓은 사람의 형체가 있었다.
가로우는 형체의 얼굴-로 유추되는 것-을 잡아 들어 올렸다. 헬멧에 감싸인 그 것은 차갑고 건조한 느낌이 났지만 그래도 일부분은 피부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제 머리칼에 대강 붙어있던 고글을 역시나 대강 걸쳐 주었다. 그럭저럭-괜찮은 얼굴이 된 것 같다.
"선물이다. 마음에 드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역시 지루한 일이었나-가로우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조심스럽게 머리를 돌려 놓았다, 드론이 근방을 서성이다가 가로우 근처에 봉투 하나를 던지고 다시 멀어졌다. 괜찮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하며 가로우는 봉투를 열어서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소파 위에 올렸다.
"뭐 병신 같은 짓이긴 하지. 나 답지 않기도 하고."
가로우는 고개를 들었다. 망가진 도시 위로 해가 지고 있었다. 눈이 멎었나. 천천히 주황으로 물들어가는 조용하고 고요한 하얀 풍경과, 제가 딛고선 그로테스크한 건조물과, 길게 이어져 있는 검붉은 길을 내려다본다.
"내가 너보다 젊었으니까, 아마 이렇게 등신같이 네가 죽지 않아도 내가 더 오래 살았을 거야. 뭐 넌 워낙 약하니까 말이야."
가로우는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잠긴 제 목소리가 어딘지 낯설게 느껴져서 몇 번인가 목을 가다듬다가 가래와 목에 괴었던 검붉은 것들을 뱉어내니 대강 원래의 목소리와 비슷해 졌다.
"그 자리에서도 보이지. 좋은 풍경이야."
문득 제가 신발을 신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춥지는 않았다, 가로우는 잠시 생각했다. 가능하다면, 가능하다면. 무면허라이더-이 소파위의 형체의 근본이었던 남자의 종말과 제 죽음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어딘가에 그런 수단이 있지는 않을까. 정말로 후회하지 않을 자신도 있고, 어쩌면 그러면 막연하지만 행복해질 것 같다는 기분 마저 드는데, 아-행복이라니, 정말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마저도 떠올렸지만.
결국 가능할 일이 아니라서, 그래서.
가로우는 답답한 마음에 비명같은 소리를 질렀지만 입 밖으로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피가 말라붙어 매마른 눈가에서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 왜 눈물을 바라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가로우는 그렇게 계속, 소리내지 않고 무언가를 토해내듯 외쳤다.
그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다. 기억나지 않아서, 더 절실히 보고 싶다. 목소리도 듣고 싶다. 재수없는 말투라도 참아볼테니, 아, 가능하다면-어쩌면, 잘 모르겠지만 함께 살고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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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면허라이더]
Y시 대재해로 1월 **일 사망, 당시 오랜 기간을 C급 1위를 유지했으나 사망 후 협회에서 명예A급으로 등급 상향, 생전의 모범이 되었던 행동과 선행이 원인으로 추측되나, 상향의 까닭은 온전히 밝혀진 바 없다. 그 해의 봄, 같은 재해로 사망한 히어로들과 단체장례식에서 뒤늦게 장례되었고 A시에 안치되어 수많은 시민이 그를 추모한다.
다른 히어로들은 사체의 부속마저 완전하지 못하거나 사체 없이 장례를 진행하였으나 가장 가까이에서 희생된 것으로 알려진 그 만이 거의 사지에 가까운 상태로 수습되었다는 것과, 그의 사체 발견 당시의 상황이 몹시 기괴했다는 소문으로 온갖 음모론의 대상이 된다. 음모론 중에는 인간괴인 가로우가 연관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치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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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면허라이더 사망소재로, 조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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