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선의 밤]
2016 01 31
히소카는 시트 위에 나른하게 풀어진 몸을 느끼며 시트 위에 누워 있었다. 완전히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의 물기가 베개를 적시고 있는 것을 알았지만 뭔가 움직이기엔 귀찮았다. 나이가 먹을 수록 귀찮음만 늘어나는 것 같다, 이건 체력과는 별개의 문제다. 가능하다면 이대로 잠들면 좋을지도-라고 생각할 때 즘에 룸서비스입니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대답하기도 귀찮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니 한 번 더 재촉해오는 노크소리가 들렸다. 히소카는 입술을 들어 웃었다. 조금 시끄럽기는 하지만 기다리기만 하면 자신이 하지 않아도 해결될 문제였다.
"아-진짜."
짜증을 깊게 섞은 남자의 미성과 욕실 문이 벌컥하고 열리는 소리, 신경질 적으로 쿵쾅 거리는 발소리-, 객실의 문이 열리고 대화하는 말소리. 그 모든 소리들을 흘려 보내며 반쯤 감은 눈으로 손가락을 까닥거리고 있자니 곧 소리들이 잠잠해졌다. 조금 예상하지 못하는 타이밍에 몸의 위치가 흔들릴 정도로 침대가 출렁거렸다. 등 뒤의 인기척은 기척도 크지 않으면서 조금 거칠어진 숨을 숨기지 않았다. 어린아이같은 행동.
"일어나 있으면 좀 대신 받지 그래?"
"귀찮아...♣"
히소카는 몸을 틀어 뒤로 향했다.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 보는 백발청안의 남자는 짙은 한숨을 크게 뱉어내고는 고운 눈매를 일그러트리며 욕소리를 잘게 뱉었다. 제것마냥 덜마른 정도가 아니라 물기가 그대로 뚝뚝 떨어지는 백발아래로 살짝 불그스름한 하얀 얼굴, 유리처럼 새파란 눈은 심지어 완벽하게 정리되지 않은 형태임에도 인간이 아닌 양 생경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단어를 내뱉는 입술의 움직임마저도 이미 계산된 듯 예쁘장해서 욕의 내용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외향이었다.
'으음, 잘자라긴 했지♥'
히소카는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으로 귀찮음을 조금 이겨내 볼 생각이 들어 뻐근한 목을 붙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는 사이 감정이 조금 더 고조된 것인지 숨쉬는 건 안귀찮냐! 하고 소리친 남자가 침대를 걷어찼다.
'폭력적이지만-우리 키르아군은♥'
풀네임을 붙이면 그 아름다운 미형보다도 유명한 타이틀을 몇 개나 더 보유한 어린 남자, 키르아 조르딕은 쯔, 하고 혀를 차고는 목에 걸친 수건을 대강 추스려 머리카락을 털며 욕실로 돌아갔다. 히소카는 잠시 가운에 감싸인 뒷모습의 곡선을 감상하다가 키르아가 친절하게도 건네두고 간 룸서비스 품목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법 값이 비싼 호텔인 탓에 공예품마냥 잘 세공된 손바닥만한 유리 그릇이 다섯 개. 유리 그릇안에는 주먹 반 만한 스쿱으로 동그랗게 떠 담은 색색의 아이스크림이 장난감처럼 작은 스푼과 함께 얌전히 놓여 있었다. 모두 해서 네 종류- 메론, 딸기, 초코, 바닐라. 그리고 초코가 하나 더. 소꿉장난 같은 장난감 같은 외형.
키르아는 전화로 주문을 하고난 뒤에도 그렇게 먹다보면 뱃살이 생길거라느니 잔소리를 했지만 아직은 히소카의 몸이 더 좋다는 사실 정도는 둘 모두 알았다. 서로의 몸에서 외향적인 부분은 거의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장이라던지 내향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키르아라면 내장도 예쁘지 않을까. 평균치보다 예쁠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확인하려 외향에 상처를 내는 건 꺼림칙한 일이다.
히소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장 먼저 선명한 딸기맛의 아이스크림을 잡았다. 차고 투명한 그릇에 담긴 붉고 뭉그러진 딸기가 흰 베이스에 물들어 만들어낸 예쁜 것, 히소카는 화려한 것과 예쁜 색들을 좋아했기에 진심으로 즐거워졌다. 산뜻한 딸기의 맛과 과일향이 눅진한 단내가 나던 입 안에 들어가서 뭉클하게 풀어진다. 매번 먹으면서 조금 더 진한 색과 단맛이 나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취향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워낙 적은 양에 두 입으로 끝나 버렸다. 다음으로 집은 바닐라는 확실히 고급의 것으로 향이 몹시 진했지만 단맛이 조금 약했고, 메론에서는 미묘하게 오이향이 나서 조금 취향이 아니었다.
그래도 단 걸 섭취하니 아까의 진득한 게으름이 조금 달아나는 것도 같고? 그 즘에 욕실로 향했던 키르아가 아까보다는 확실히 정돈된 모습으로 다시 나왔다. 하얀 가운을 아까보다 단정하게 맨 육체는 완연히 성숙하여 잘 만들어진 성인의 것이지만, 그 금방 사이에 기분이 풀렸는지 소년같은 웃음을 지으며 제 몫의 아이스크림을 잡는 얼굴에서는 풋풋하고 어린 기운이 남아 있었다.
"아, 역시 맛있네. 스무개정도 주문할까."
한 입에 초코 아이스크림을 입안에 털어 넣은 그는 고민도 하지 않는지 전화로 스무개를 더 주문했다. 뱃살, 는다면서? 네 쪽이 문제 아닌가. 히소카는 구태여 남자가 했던 말을 지적하지는 않고 마지막으로 남겨진 초코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었다. 맛있다. 적당히 쓰고 쌉쌀한 맛이 돌았고 뒷맛은 느끼하지 않고 산뜻한 것이. 적당히 좋은 맛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남겨둔 것이기도 했다. 스푼을 놓기가 어쩐지 아쉬워 잠시 우물거리다가 망설임 끝에 놓아두었다.
"아, 네 것도 같이 주문할 걸 그랬어?"
"아니 충분해♠"
키르아의 말에 웃으며 대답한다. 이미 배는 불러 있었고 주문 전에도 초코가 맛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호텔을 처음 찾은 것도 아니고 아이스크림을 주문한 적도 몇 번인가 있었다, 맛은 변하지 않지만 혹시 변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히소카는 매번 그 모든 아이스크림을 주문하곤 했다. 혹시 맛이 바뀌어서 자신에게 제일 잘 맞는 맛이 초코가 아닌 선택지에 존재할 지 모르니까, 그 혹시라는 단어 때문에라도 전부를 주문해 먹는다.
키르아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확인된 거라면 초코를 주문하는 게 더 낫잖아? 같은 말을 할지도 모르지만 제가 열심히 아름답지 않은 인간들을 상대해가며 번 소중한 돈이니 어떻게 쓰는 것인지에 대해선 온전한 히소카의 권한이었다. 미친 짓이라고 해도 상관 없으리라. 키르아 또한 타인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 내의 일만을 하는 것은 아니며-오히려 저보다 어떤 면으로는 심하다-어쩌면 경중이 있을 뿐 제가 겪어본 모든 인간은 모두 자신도 납득하지 못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 갑자기 너무 멀리 갔다. 단지 아이스크림의 문제일 뿐인데.
"방금 주문에 15분 정도 걸렸으니까. 한 번 할까?"
솔직히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히소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애인을 두는 건 육체적으로 조금 피곤하다. 아니-체력적인 쇠락은 없긴 하니까 그냥 관계라는 게 다 피곤한 건지도 모르겠다. 입술을 겹치며 훤히 드러난 피부를 맞대며 익숙한 체온에 알고 있는 경로로 가까워진다. 금방 썻어 말려 보송한 피부의 감촉은 닿아있다는 기분을 여실하게 느끼게 했지만 그럼에도 끈적거릴 정도로 뜨겁거나 드라마틱하지는 않았다.
음. 어쩌다가 우리가 잤더라. 우리가 계속 자고 있더라. 그런 의문 따위가 문득 머릿 속을 스쳤지만 곧 열기 속으로 사라졌다. 즐거운 일을 하자. 습관적으로 내렸던 결정들의 연장선상에서 잠시로 끝날 줄 알았던 시간은 히소카의 예상보다도 길게 이어졌다. 나쁘지는 않다-아니 훌륭하게 좋긴 해. 즐거워. 재밌어.
하얗게 점멸하는 쾌락 속에서 평소와는 달리 의문이 다시 고개를 드민다. 사실 과거의 제가 진정으로, 최선으로 바라던 소년은 눈 앞의 이가 아니라 다른 소년이었지만 그를 온전하게 가지기는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그 깨닫던 날에 당시는 소년이던 남자가 눈 앞에 있었다. 최선은 아닌 차선, 하지만 그 또한 매력적이고 즐거운 존재인 것만은 맞으니까,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남자는 훌륭한 대체물이자 객관적으로도-대인 관계적인 면이나 성적으로도-나쁘지 않았다. 충동적이었지만 계산이 없는 관계는 아니었다. 키르아는 흥미롭고, 매력적이며 드물게 만나면서도 타인에게 한눈팔지도 않는 제법 좋은 연인이 되었다. 그런 시간을 보내다보니 나중에는 최선이니 차선이니 그런 선택의 경로 마저도 상관 없는 것이 되어갔다.
"흐음-♥"
목덜미를 깨물며 흔적을 아로새기는 키르아와 눈이 마주친다. 알 수 없을 만큼 아득하고 깊은 색- 처음에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니 처음에서 얼마지나지 않은 뒤에도 아주 가끔씩, 지금은 의식할 수 있을 정도로 가끔, 키르아는 검게 쇠락하여 가라앉은 막연한 눈으로 히소카를 바라보곤 했다. 감정에 대해서는 정확히 분류하지는 못해도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쓸쓸해 보이는 눈이었다. 뭐 그건 키르아의 이야기로 히소카가 어떻게 해결해줄 문제는 아니다.
그저 다음 날 아침에 거울을 보며 가혹할 정도로 혹사당해 목줄마냥 검붉게 남은 목의 잔흔을 볼 때면 가끔 느끼기는 한다. 키르아는 어쩌면 히소카가 영영 되어주지 못하는 존재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하고-하지만 애초에 너에게도 내가 최선이 아니란 것을 전재하고 시작하지 않았나. 지금의 관계는 괜찮다. 완벽하게 만족스럽지 않아서 오히려 지속되는 불완전하고 연속되는 관계, 조금의 불안과 초조함으로 지나가는 밤들-어차피 완벽하지 못할 거라면 엉망으로 흐드러져 버리는 것이 아름답지 않을까.
곧 남자가 주문한 초코아이스크림이 도착했다. 히소카는 키르아가 아이스크림 그릇들을 정리하는 사이에 딸기 아이스크림이 담겨 있던 유리그릇에 작은 금이 간 것을 발견했다.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얇게 그어진 작은 금. 히소카는 눈동자로 그 미세한 균열을 쫓다가 키르아의 팔에 그 자취가 가려진 뒤에야 눈을 돌렸다. 아직 입 안에서 엷게 초코맛이 난다. 그것이 키르아가 새로 주문한 턱없이 많은 양의 초코아이스크림에서 풍기는 향인지, 아니면 제가 먹었던 뒷맛이 아직 남아있는 것인지는 온전하게 구분해낼 수 없었다.
여상하게 지나가는 미묘하게 달콤한 어느 날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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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o1353님 키르아x히소카로 '네가 더 미쳤겠지' 키워드로 조각글. 마음에 안드는 부분 쳐내다보니 키워드랑 좀 달라진 것도 같지만 뭐...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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