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훤빈] LAST MORNING
[LAST MORNING]
2013 12 18
어떤 악당의 로그아웃을 기념하며.
끝이구나
나는 책상의 첫번째 서랍을 열었다. 깊숙한 안쪽까지 손을 넣어 차가운 감촉으로 손에 쥔 것은 하나의 작은 유리병, 구태스러운 설명없이 PROTO TYPE-이란 이름만 달린 그것을 들어 뚜껑을 열고는 망설임없이 입에 털어넣었다.
그 것은 텁텁하고 구역질이 치밀만치 쓰린 맛이 났고 이내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통증을 주며 눈 앞을 검게 만들었다. 아, 이대로 죽어버리면 좋겠다고- 그렇게 기원하며 암전에 잠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단지 시간이 지났다는 감각만을 느끼며 눈을 떴다.
느릿하고 흐릿한 안개와 같은 잔영, 흣뿌연 시야와 몸을 주체할 수 없는 어지러운 감각은 일전에 경험한 일이 없던 것이라 조금 두려웠다. 지금이 꿈에서 깬 것인지 꿈에 사로잡힌지 알도리는 없으나 문득 눈 앞에 한명의 어둑한 형체가 잡히기에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다.
어둡고 뿌연 색상의 덩어리는 이윽고 낯설고도 익숙한 누이의 얼굴로 변했다. 그녀는 한번도 살갑게 대해준 일이 없으나 그 없음 따위로 그녀가 누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영 힘이들어가지 않는 팔을 들어올려 그녀에게 내밀었고, 그녀는 제가 닮았던 본디의 것과 같이 나를 붙잡지않고 텅빈 눈으로 뜻모를 시선을 던지고는 돌아선다. 날카로운 하이힐의 굽소리에 스쳐 무언가 목소리고 들린 것같다. 등신내지는 병신이려나 명확하지는 않지만 어리석다 책망하는 말투인 것에는 확연하다.
이윽고 그 형체는 일렁거리며 꾸물한 불쾌한 움직임을 보이더니 젊은 남자의 모습으로 변한다. 스트라이프의 정장에 검은 썬글라스를 쓴 남자-그것은 정말이지 익숙한 모양이지만 동시에 내 의지가 반영되지않은 익숙한 형체가 익숙한 몸짓으로 움직이는 것은 머리끝부터 내리꽂히는 충격에 가까운 공포였다. 주춤하고 뒤로 피해 물러서지만 등 뒤는 막힌 벽이었다. 막힌 벽, 스스로 생각하고 나서도 그 무게에 짓눌리는 단어다.
손이 잘게, 떨린다. 입 밖으로 내뱉으려던 말은 아무 가치도 없이 웅얼거림이 되어 번진다. 하필 아버지가 말하던 높은 자로써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나 얼굴표정을 관리하는 법 따위가 떠올랐으나 이곳에는 그도, 그 높은 자와 필연적으로 맺어져야할 낮은 자라는 것 따위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형편없이 일그러진 얼굴을 고치지 않는다.
눈앞의 형체는 팔을 억지로 붙잡아 돌려세운다. 조금은 느린 움직임이나 힘이 들어가 있어 억세다. 나를 붙잡지 않은 그의 다른 손이 제 얼굴에서 썬글라스를 치우고는 포켓에 넣는다. 당연한 수순마냥 얼굴이 들어올려진다. 꼭 닮았으나 표정만은 극명히 다른 두개의 얼굴이 서로의 눈에 서로를 담는다.
[형편없어]
내 목소리가 말한다. 내버리듯 나를 내려놓은 그는 커다란 제스쳐로 고개를 저었다. 거울에서 익히 보았던 능숙하고 아름다운 호선을 그리는 팔의 모양새는 능숙한 연기자의 것이다. 서늘한 눈으로 내 모습을 '내려다보며' 비웃는 듯 걸린 냉소는 그의 얼굴에서 떨어져나가지 않는다.
[볼품없어, 아름답지 않아. 정말 형편없네, 훤빈, 그래, you 말이야.]
그 시선에서 도망치고 싶다. 그 눈, 그 차가운 눈은 피를 나눈 누이와 제 아비를 닮은 오만함과 냉소를 닮았으나 동시에 싸구려 광대같은 천박한 기색을 하고 있다. 그 닮음과 다름이 저를 공포로 몰아 넣는다.
[죽어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사실 죽을 용기도 없지? 그 따위 가루? 그런 것으로 다이-한다니 그럴리가 없잖아. 아무리 멍청한 YOU, 아니 I라고 해도 그 정도는 알텐데]
그 말들에서 도망치고 싶다. 귀를 막고 고개를 숙인다해도-도망칠 수 없다. 막힌 벽에 가로막혀 꼼짝없이 공포에 질려 단지 초식동물마냥 떨고 있을 뿐이다.
I. 돌이켜 그 단어는 저 남자에게 더 어울리는 단어다. 지금의 저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해사히 웃으며 던지는 남자의 목소리는 연극의 대사마냥 명확하게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날카로움이 되어 내려 꽂힌다.
[너 따위,죽어봐야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어쩐지 눈이 시렸다.
그런 것,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이제 무엇을, 뭘 할 수 있나.
정말로 뒤늦게 잠식해오는 후회에 몸이 떨린다.
문득 떠올랐던 것은 누이의 책상에서 보았던 한장의 사진, 낯선 얼굴을 하고 있는 누이와 두 명의 남자-그들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나.
그 때 나는 어떤 생각을 했었나.
또래의 아이들보다 월등히 좋은 환경은 내가 가지고 싶어하는 약간의 욕구만으로도 쉽게 쥐어졌으나 사실 진정 바라던 것은-눈앞의 일렁이는 형체없는 것과 같이 하나도, 잡히지 않는다.
이런 것, 이런 삶, 이런 결말 같은 것-이따위의 너절한 것들은 모두 일어나 버렸으나 한번도 스스로 바라던 것은 아니다. 어딘가 돌이키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되물음이 돌아간다. 어디로? 어디로 돌아가지?
어차피 제게 돌아갈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지 않은가.
눈을 들었다. 혼돈이 가라앉았다. 거칠었던 숨은 가라앉고 오히려 이상할정도로 차가워지는 머리속. 어차피 제게는 매정한 세상이었다. 처음부터-그리도 매정한.
[이제야 볼만한 얼굴이 되었네]
눈앞의 남자가 썬글라스를 다시 낀다. 피식, 숨소리가 새어나올 법한 얼굴을 지은 그는 손을 내민다
[Go?]
고개를 끄덕인다.
거울에 제 손을 겹치는 모양새로 지극히 같은 모양을 한 손가락이 겹쳐진다. 신기하게도 그것은 따뜻한 온기가 느껴져서 어쩐지 우스워졌다.
짧은 고통이 몸을 휘감았다가 사라진다.
질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뜬다.
약간의 두통이 편린이 되었으나 뜻밖으로 다른 이상은 없었다. 손을 움직이자 빈 유리병이 카펫을 구르며 미미한 소리를 낸다. 고개를
들어 등을 곧게 세운다. 마주치는 창밖은 푸르스름한 여명으로 물들어있는 아침, 마지막-스테이지가 기다리고 있는 푸르고 공허한
시각.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곧게 펴 몸을 일으켜 세운다. 익숙한 움직임으로 정장의 구김을 펴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긴다.
공포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클라이막스를 훌쩍 넘기고 추락해가는 감정선을 붙잡아 고정하는 연기자로서의 마지막이 존재할 뿐이다.
퍽이나 좋은,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