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한] 소꿉놀이
[소꿉놀이]
2014 3 21
소꿉놀이 : 살림살이 흉내를 내며 즐기는 놀이. 어린이별로 각자 역할을 맡는다. 예를 들어, 아버지나 어머니를 맡아서 서로 부부인 척 하는 것이다.
"하나야! 하나야!"
어디선가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싶어 고개를 돌리자, 복도의 창문에 몸을 매달려 상체를 거의 교실 안으로 집어넣고 제 이름을 부르고 있는 오공의 얼굴이 보였다.
"무슨 일?"
"응, 너희 반 오후수업 로공A했다고 들어서 왔어."
가 까이 다가가자 모자를 뒤로 넘겨쓰며 씨익 웃어보인다. 저 모자, 학주며 C반 단임이 계속 지적하던대도 벗지 않는 걸 보면 이 녀석도 어지간히 고집이 세구나 싶다, 아니 뭐 이러니저러니해도 학년 수석을 했다고 했으니 다른 애들처럼 몰아붙이기는 복잡한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싶지만.
"로공A 수업 맞아."
오 공이 한층 더 밝아진 얼굴로 손을 파닥거렸다. 즐겁다는 뜻인가 저거, 어렸을 때는 조금 더 진지한 녀석이었던 듯 싶은데 오히려 크고난 후엔 부쩍 두리 같아졌달까 행동이 묘하게 가벼워 졌다고 생각하며 하나는 쓴웃믐을 삼켰다. 모자를 뒤로 넘겨쓴 모습도, 얼굴의 이목구비도 거의 비슷한 느낌이건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면 키차이가 제법 난다. 두리도 세모도 제법 커진 것 같지만 역시 오공이 제일 큰가, 어느 사이엔가 저보다 먼저 어른에 가까워진 느낌에 한걸음 물러서기도 잠시, 오공의 선한 눈매를 보고는 경계를 풀고 다시 다가간다.
'겉만 자라면 뭐해, 속은 완전히 어린애구만.'
하나가 실례되는 생각을 하는 걸 아는 지 모르는 지, 오공은 제 다른 손에 들고 있던 하얀 도면을 내밀어보였다.
"그럼 개인과제 프로젝트 1/4 모형제작이지? 간만에 같이 안할래?"
"뭐, 그러자."
"나이스!!"
화창한 목소리로 소리치는 사이에 반 아이들 몇몇의 시선이 옮겨져 조금 부끄러웠다. 밝은 게 나쁜 건 아니지만 조곰 시끄러운데다가 엄연히 다른 반인데 오공은 쓸데없달까 차라리 멋있을 정도로 당당하다.
"그럼 같이 돌아가자!"
오공을 배웅하고 돌아서는데 몇 몇의 시선이 머물다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수근 거리는 소리 중에는 오공의 이름이 제법 많이 거론되고 있었다.
아
쉬운 일이고 본인은 모난 돌이 정맞는 법이라며 웃어넘기고는 있는 것 같지만 학교 내에서 오공은 평판이 그리 좋지않다. 요번 학기
초였나, 지금처럼 오공과 이야기 하고 돌아오던 중에 반장 아이가 조용히 불러 오공에 대해서 언질을 주던 일을 떠올린다.
"그녀석, 이기주의자에 차가운 녀석이라고 소문이 자자해. 천재인 건 분명하지만 협동심이나 친화력도 없고, 사람을 머리 밑으로 내려다보는 어이없는 녀석이라고. 네 앞에선 조금 다른 것 같지만 조심해두는 게 좋아."
그 강아지 같은 녀석 얘기가 전혀 아닌 것 같은데요. 하나는 자신이 알고 있는 오공과는 지나칠 정도로 다른 이야기에 뭐라 대꾸하는 것도 잊을 정도로 놀랐더랬다. 흔한 이름이었다면 동명이인이야기인가 싶을 정도다.
뭘
했길래? 오공과 진지하게 이야기해볼까 싶었지만 지나칠정도로 거친 소재라 말을 완전히 순화시켜 나중에야 짤막하게 말을 꺼냈더니
오공은 꼭 저열하게 질투하고 근거없이 비방하는 애들이 있다며 그런 말을 믿는 건 아니지? 라며 되물어왔다. 당연히 믿지 않는다.
라고 대꾸하자 오공은 정말 찬란하게, 어린아이처럼 웃어서 이야기를 꺼낸 하나가 도리어 죄책감을 느낄 정도였다.
-
오공의 간만에-라는 말이 맞았던 것 같다.
언 제 마지막으로 온 건지도 기억나지 않는 오공의 방은 남자애의 방이라기엔 지나칠 정도로 삭막했고, 차가운 느낌이었다. 구석의 침대만 아니라면 공부방이라기 보단 사무실 같다. 흔한 포스터 한장 없는 모노톤의 벽지, 블랙으로 깔끔하게 도색된 금속제의 책장과 책상, 세개의 모니터와 보이지 않게 수납된 본체, 책장을 가득채운 두꺼운 전문서적과 외국어 서적들-아, 저거 읽고 싶었던 건데.
음료수캔을 두개 들고온 오공이 하나를 던져주기에 받아서 열었다. 갈증이 났던지 탄산음료의 맛이 유난히 달고 시원하다.
"남자들만 사는 집이라 쟁반이 없네."
"뭐 어떄."
오공이 제 설계도를 꺼내 들었다. 평소 성격이라면 잡담이라도 할 줄 알았건만 과제를 충실히 하려는 모습에 의욕이 생겨서 하나도 학교에서 제작했던 설계도를 다시 체크한다.
"검증은 끝났어?"
"대충은, 만들면서 수정해야겠지만."
"오늘은 춥지는 않으니까 밖에서 절단하고, 샌딩, 곡면작업까지만 할까? 본격적인 조립 까진 좀 걸리니 주말에 하고."
"재료는?"
"일단 왠간한 건 있어. 넉넉하니까 네 것까지 될거야."
오
공은 쾌활하게 사용가능한 금속의 이름을 줄줄 외웠다. 하나는 그걸 흘려들으며 오공의 도면을 살핀다. 고등학교 2학년 수준이 아닌 것
같다. 같은 과제인데도 사용되는 외장의 파트며 난이도가 이 정도로 다르다니-그 수준에 감탄하기도 잠시 자랑하듯 준비물을 읊어대는
오공의 얼굴을 보고는 그 차이에 웃음이 나올 것 같아서 겨우 참아낸다.
"왜 내 얼굴 보고 웃어? 잘생겨서?"
하나의 웃음이 결국 밖으로 비져나온 것을 또 오공이 능글맞게 받아챈다.
"킥...뭔 소리야..."
"잘 봐, 나 진짜 잘생기지 않았냐-"
이젠 키들거리며 윙크까지 해보인다. 이런 녀석이 이기는 무슨, 천재라고는 해도 또래보다 조금 더 똑똑할 뿐이고 이렇게 평범하고 웃기고 그냥 즐거운 녀석인데. 어째서 학교의 다른 아이들은 오공을 기피하다못해 저에게까지 조심하라며 간섭 같은 걸 하는 걸까. 다들 이 녀석을 너무 모른다싶다.
시덥지 않은 이야기도 끝내고는 밖으로 나왔다. 폐차장 한켠의 작업장에서 실물크기로 출력한 설계도를 스테인레스판에 옮겨 그리고 레이져로 절삭해나간다.
그
렇게 한참을 작업하고 있으니 오공이 설계도를 가리키며 하체 균형감이 부족하니 하부엔 합금을 써보는 건 어떻겠냐고 하나에게
물어왔다.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생각해보지는 않았던 참이라 고민에 잠기는데 한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하나형 왔어?"
온달이다. 중학교 교복을 차려입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언제 컸는지 하나 만큼이나 커진 온달은 곱상하고 얌전하게 생겨서는 표정도 온순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공학으로 갔다던데 꽤 인기있을 것 같은 외양이라고 조심히 생각해본다.
"응 과제하고 있어, 온달이 키 많이 컸네."
"헤헤, 그렇지 뭐-과제라."
온달의 말이 멎으며, 그의 시선이 오공과 하나를 둘러본다. 어쩐지 건조한 느낌이 드는, 아이라기엔 미묘한 시선-이따금 하나는 온달의 속을 알 수 없다고 느낄 때가 있다.
"소꿉놀이같네."
오공 읖조리는 소리를 듣고는 하나는 웃음을 삼켰다. 하긴 아직 초기과제기도 하고 크기도 작으니 문과생인 온달에겐 어린아이 장난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럼 하나가 아내겠네. 마누라~"
"으잌, 오공아 그만해 야, 징그러."
불꽃이 튀는 걸 막는 마스크를 옆으로 내려놓고는 하나에게 능글맞게 달라붙는 오공의 얼굴을 흥미롭게, 그리고 장난을 받아주는 하나까지 '관찰'하던 온달은 미묘한 시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딱 소꿉놀이잖아. 보이는 것도-배역을 연기하는 것도 모두.'
하 나에게 닿지 않는 등 뒤편에서 시작한 오공의 시선이 온달에게 움직였다. 온달이 마주치는 순간에 바로 피해버릴 정도로 무기질적인 차갑고 서늘한 눈-예전엔 저를 살뜰히 챙겼던 형이지만 그 애정의 사라짐에 온달은 서운함을 느끼지 않았다. 느껴지는 것이라면 두려움과-의아함. 비슷한 유전자인데 어쩌다 저런 괴물이 되었나.
온달은 하나를 측은하게 생각했다.
그에게만 한정되어 제공되는 오공의 과장된 밝음과 그 이면에 존재한-괴물같은, 애정이라기도 뭐한 난폭한 감정을 그는 아직 알지 못한다. 모르니까 그와 저렇듯 같이 있을 수 있는 것일 터였다.
온달은 그 소꿉놀이의 장소를 떠나며 앞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소꿉놀이는 언제쯤 끝날까. 아마도 형이 저 놀이에 질리는 순간이려나, 그 후의 하나형은 어떻게 되는거지.'
온달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되건 나와는 상관없어.'
그러나 아무리 긴 놀이라고 해도, 끝나는 순간은 언제나 오고야 만다는 것은 분명- 모두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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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트위터에서 간략하게 풀었던 이야기를 짧은 글로 정리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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