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집의 여자는 보라색은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굳이 보라색 꽃을 산다.
상황에 어울린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다. 그저, 좋아하는 색으로 선물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멀어지다]
2014 3 23
객관적으로 본다해도 참 아름다운 날이었다.
적
당히 서늘하고 기분좋은 바람이 부는 가운데 하늘은 또 유난히도 맑았다. 새순이 이르게 돋은 나뭇잎에서 풍기는 청량하고 상쾌한
공기를 맡으며 자박자박 오솔길을 밟아나간다. 눈감고도 갈 수 있을만치 오래 지나온 길이었으나 그에게 이 곳은 언제나 발딛어 본 일
없는 이국의 풍경만치 낯설다.
길 위에 선 그는 한 눈에 보아도 잘생긴 청년이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고집스럽게 다물어진 입매는 다부진 성정을 짐작하게 하였고 흔들리는 머리카락의 색은 일반의 검은머리보다 훨씬 검어 푸른 빛이
느껴질만치 검었다. 그럼에도 마냥 강하고 위압적으로만 느껴지지 않게 하는 것은 아-그의 눈이었다. 이토록 좋은 봄날에 이토록
아름다운 길을 걸어감에도 그 눈동자는 참 서글픈 가을의 색을 하고 있으니.
그 애절함과 애잔함은 짙지 않으나 그의 눈과 그의 영혼에 분명 새겨져 있어, 보는 이를 하여금 까닭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탄식을 내뱉개하는 쓸쓸함을 뱉어내고는 했다.
질좋은 검은 코트 자락을 날리며 걸음을 디딜 떄마다 안개꽃과 라일락, 그 외 이름모를 청보라색 꽃들이 섞인 진보라빛의 꽃다발이 잘게 흔들리며 향기를 뿌린다.
그 향기가 지나치게 짙었던 것일까? 그는 빛에 번지는 잎사귀의 잔영 속에서 옅게 현기증을 느낀다. 꽃의 향기 때문만은 아니었다-어느 사이엔가, 그는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그는 찾아온 사람이 있는 장소 앞에서 잠시간 눈을 멈추고는 빙그시, 옅게 웃고는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아빠. 오늘은 날씨가 좋네요."
그
는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정장바지라 불편할텐데도 쪼그리고 앉아서 모양좋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싼다. 그 말을 하고도 한참을
그는 말을 고른다. 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그의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것이 어떤 말보다도 짙어서 잠시간 말이
나오는 길이 막혀버린 탓이다.
문득 바람이 불어 잎새가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한참의 후에야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는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예전에-착한 일을 많이 하면 당신이 다시 돌아올거라 생각했어요."
처음부터 그런 말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그
저 무언가 다른 말을 해야한다고 생각하다가 틈새로 터져나온 그 것은 그럼에도 진실이어서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생각지 않았던
말을 꺼내며 아주 어린 날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와 그의 당신이 길게라고 칭할 수 있던 만큼 헤어졌던 어떤 어린 날, 하지만 그 후
그들은 다시 만났더랬다. 그래서, 그는 혹시나하고 희망을 품었던 것이다.
이 번의 이별에도 다시 당신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어리석음을 알기에 그 친한 벗들과도 말로 나누지 못했으나 지금에 오기까지 그를 지탱해오던 그 믿음의 말은 제 목소리가 되어 공기에 퍼지고 난 후에는 더 바보같이 들렸다.
"벌써 10년인데, 죽을 때까지 착한 일을 해도-그 기적이 일어날 만큼은 하지 못할 것 같아요."
미안해요. 마지막단어는 차마 내뱉지도 못하고-그의 몸이 허물어진다. 아픔은 느끼지 못했으나 허물어진 몸에 느껴지는 바닥은몹시 딱딱하고 서늘해서-, 마치 그 사람을 보내던 그 날 닿았던 피부같아서-그는, 세모는 견디기가 어려웠다.
권 리 모
그의 이름을 새기어 땅 위에 세운 회색 돌은 세월의 흐름에 무뎌지고 있는데 이상히도 그를 생각하는 마음만은 무뎌지지 않고 매일매일 이렇게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일까.
조금 무뎌지면 좋으련만,
조금 빛바래면 좋으련만,
조금-잊혀지면 좋으련만.
"딱 한 번 더 기회가 있으면 좋겠어요."
세
모는 회색의 돌에 기대어 몸을 세우며 그 새겨진 이름의 양각을 매만졌다. 돌의 형태는 무뎌졌으나 도톨도톨하게 새겨진 그 이름만은
참으로 선명하다. 혹시-제 심장을 꺼내면 이렇듯 새겨져 있을까? 보지 못했으니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런 것이 분명하다고-감히
말해보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이 감정을 설명할 도리가 없으니.
"사랑했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준
비해왔던 꽃다발은 바닥에 버려져 망가진 모양새로 다시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없을 정도로 모양새가 엇나가고 말았다. 철에
맞지 않는 라일락 한 줄기는 어느 사이엔가 세모의 구두굽 아래에서 짓이겨 보라색 진액으로 변하여 돌 위에 잦아들어간다. 그
안타까운 모습을 발견한 세모는 고개를 마구 휘저으며 이 날, 이 순간을 부정해본다.
잘 손질하여 빗었던 머리칼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버렸다. 그 아래의 얼굴은 청년이라기엔 아직 이른 어린아이의 얼굴과 표정을 하고서는 일그러진 목소리로 자꾸만 말을 건네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