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피스/헤르코비] 양자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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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
남자는 침통한 표정으로 상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상대의 새까만 눈동자와 눈을 마주치고 제발, 부탁해, 라고 눈빛에 진심을 담아 전해본다. 상대는 납득했다는 듯 환하고 맑은 웃음을 짓고는 그 입술을 떼었다.
“응? 5칸 나왔는데요.”
한숨이 쉬어질만큼 가벼운 대꾸. 이건 배신이다. 처참한 심정으로 나무말을 집어 미리 눈으로 확인한 칸으로 옮긴다. 말의 주인을 표시하기 위해서인지 얼굴 부분에는 썬글라스가 그려져 있는 투박한 나무말이다.
정확하게 5칸을 앞으로 움직이자 무인도라고 적혀진 칸에 도착했다. 이번 게임부터 따져서 벌써 여섯 번째 무인도. 게다가 바로 전 턴에는 상대방에게 무지막지한 액수의 벌금을 지불했던 터였다. 앞으로 세 턴간 휴식. 종이로 만들어진 게임판을 둘러싸고 있던 이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불운도 이쯤이면 대단하다며 감탄하는 이도 있었고 이제 겨우 2000 베리만 남겨진 남자의 재정상태에 불쌍하다는 표정을 짓는 이도 있었다.
결국 남자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게임판을 붙잡아 위로 확 올려 젖혔다.
“나 안해!”
아이도 하지 않을 정도로 유치한 행동, 이 와중에 더욱 참담한 사실은 그의 행동이 미처 실행되지 못하고 막혀버렸다는 것이다.
막 게임판을 뒤집으려던 그의 턱선 아래로 날을 세운 손등이 아슬아슬하게 닿아있었다. 와글와글 시끄럽게 떠들던 좌중이 순식간에 침묵했다. 반경을 채우는 위압감과 살기. 대상이 된 남자는 짧은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방금의 움직임으로 팔랑거리며 올라간 분홍빛 머리카락이 차분하게 내려앉는다. 남자를 제압한 것은 일행들 중에서 가장 키가 작은 소년이다. 몸은 소년 특유의 약한 느낌이 아직 배어있지만 손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선은 제법 단련된 듯 유려하고 단단한 느낌을 주었다. 커다란 안경을 화려한 헤어밴드 위로 올려 쓰고 있었는데 화사한 색의 머리칼과 헤어밴드에도 그렇게 화려하다는 인상을 남기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귀여운 느낌의 얼굴이었지만 까만 눈동자만은 차갑고 싸늘한 빛으로 상대를 응시한다.
“헤르메포씨.”
소년이 순간을 깨뜨리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끄럽게 웃던 남자들은 방금 느낀 감정을 부정하느라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공포와 경외-해군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소년에게 압도당했다는 사실은 그리 인정하고 싶은 종류의 감정이 아니다.
“게임은, 게임이에요.”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거둔다. 헤르메포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에 성공했고 엎어지려던 게임은 다시 진행되었다. 유치한 남자의 행동을 타박하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하게 이어지는 분위기, 하지만 그들의 표정에는 미묘한 위화감이 남아있었다.
인정하지는 못한다해도 인식은 이루어졌다. 눈 앞의 소년이 자신들 보다 높은 직급을 가졌으며, 또한 그 것에 어울리는 실력마저도 갖추고 있다는 것을-일행은 모두 알았다.
이윽고 마지막 남은 사람까지 항복을 선언했을 때, 소년의 앞에는 수북한 가짜 베리가 잔뜩 쌓여있었다.
“치-사-해.”
소년의 것보다 배는 될 듯 단단하게 단련된 두꺼운 팔이 휘적휘적 옆으로 움직였다. 마치 어린아이가 떼를 쓰는 것을 연상시키는 행동, 게다가 그는 정말로 소년에게 떼를 쓰고 있었다.
“친구니 뭐니 하면서 그렇게 발라버리기냐.”
“예전부터 주사위게임은 강했거든요.”
정말이었다. 헤르메포를 비롯한 상대들은 소년에게 적수가 되지 못하고 그야말로 참담하게 유린당했다. 더블, 더블, 더블, 무서운 속도로 게임판의 요소요소를 잠식해가는 나무말에는 안경이 그려져 있었다.
“냉정하게 생각해야죠. 이번 달에는 꼭 모래주머니를 사고 싶었거든요.”
게임의 대가로 얻은 진짜 베리를 확인하며 소년은 화사하게 웃었다. 남자의 매달림에도 돈을 돌려줄 생각은 없는 듯, 꼬깃꼬깃한 지폐와 동전들을 정리해 주머니에 넣고 뿌듯한 표정으로 돌아선다.
“대신, 다음 섬에 도착하면 한 끼는 제가 살게요.”
그 말에 남자가 비로소 웃는 얼굴을 지었다. 의외로 단순한 성격이다.
“무르기 없기다.”
소년과 남자를 태운 배는 무풍의 해류를 가르며 움직이고 있다.
폭풍과 같은 시대에 비해 비교적 평범한 어느 날.
수많은 죽음을 동반한- 시대를 바꾼 그 사태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술렁거리는 공기는 미래의 혼돈을 예고하고 있었지만 그 공기를 전부 읽기엔 두 사람이 아직 너무 어렸다.
그리고 이 쪽엔 두 사람을 지켜보는 또 다른 두 개의 그림자.
“보셨습니까?”
“음.”
“그건 분명히-”
대화를 주고받는 두 인영. 모자를 쓴 그림자의 말에 짤막한 대꾸만을 하던 남자의 얼굴주름에서 뿌듯함과 불안함이 깊이 베어 나온다.
“아직 풋내기야.”
“해군은 인재가 필요합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헤르메포에게 헤드록을 당하고 있는 소년에게 향한다.
밝고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은 젊다 못해 어리기까지 하다. 비록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지만 아직은 명백한 풋내기, 하지만-해군은 당장 인재가 필요했다.
“……섬에 도착해서 그에게 직접 물어보지.”
모자를 쓴 그림자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배는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다.
그 섬의 이름은 운-리레스. 별명은 휴식과 리조트의 섬. 하지만 풋내기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휴식이 아닌, 둘의 운명을 가를만한 선택이었다.
兩 者 擇 一
양 자 택 일
-헤르메포 X 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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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쟁이.”
헤르메포는 책상에 얼굴을 올리고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소년은 제복의 스카프를 고쳐매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정말, 어린애라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중장님이 호출하실 줄은 몰랐고.”
책상 위에는 운-리레스에 대한 안내책자와 전단지들이 흩어져 있었다. 헤르메포가 수집한 것들이다. 소년은 몰랐지만 헤르메포는 이미 일주일 전에 이 배가 그 섬으로 향한다는 정보를 들었다. 위대한 항로 안에서도 알게 모르게 입소문을 타고 있는 멋진 휴양섬. 게다가 그는 이미 옛날부터 그 섬을 알고 있었다.
목적지를 알게 되고, 그 섬에서 이틀간 휴가를 보낸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그는 정보를 잔뜩 수집했다. 맛집이며 멋진 온천장, 기념품을 파는 곳과 인연을 엮어준다는 사당-. 헤르메포는 해군에 들어온 이후로 좀처럼 맛보지 못했던 즐거운 하루를 느끼고 싶었다.
“같이 가지 못해서 미안해요.”
눈앞의 이 소년과 함께, 둘이서 말이다.
“됐어.”
소년의 시무룩한 표정에 헤르메포의 표정이 풀어진다. 그런 착잡한 표정으로 우울해 하는 것은 그가 바라는 방향이 아니다. 짧은 한숨으로 짜증을 정리하고는 섬의 관광안내도를 꺼내 하나의 위치를 짚는다.
“중장님과 면담 끝나면 이 식당으로 와.”
약간의 길설명을 덧붙인다. 선글라스로 가려진 헤르메포의 표정은 이미 풀어져 있었다.
“네. 꼭 갈께요.”
소년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이거, 뭐 어쩌라고? 고개를 갸웃하자 소년의 손이 방심한 헤르메포의 손을 잡더니 새끼 손가락을 겹쳤다. 그리고는 엄지손가락으로 도장까지 찍는다. 어린애 같은 행동에 헤르메포의 얼굴색이 붉게 물들었다. 야아. 뭐하는 거야.
“저녁, 제가 잔뜩 살테니까.”
헤르메포는 뭔가 말하려는 듯 두꺼운 입술을 열다가 우물거렸다. 결국 입밖으로 나온 말은 꼭이야, 하는 작은 대꾸 뿐이었다. 소년이 옷차림을 정돈하고 방밖으로 나간 후에도, 그는 소년이 떠난 자리를 향해 시선을 떼지 못했다.
“꼭이야, 코비.”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꼭 필요한 장소만을 골라 저녁부터의 관광루트를 다시 짠 헤르메포는 먼저 섬으로 향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섬이다.
헤르메포는 딱 한 번, 운-리레스에 방문한 일이 있다.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아득한 오랜 기억. 세 살이었던가, 네 살이었던가. 손을 잡거나 놀아준다던가 하는 따뜻한 행동이라고 없던 그의 아버지는 왠일인지 어린 그의 손을 잡고 이 섬을 찾았다.
희미한 기억이지만 새로 산 옷을 입고 있었고, 제복을 벗은 아버지는 티는 그다지 나지 않지만 따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처음 향했던 곳은-작은 휴양병원이었다.
선글라스 너머로 길을 찾아 헤멘다. 십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탓에 방향을 잡기 어렵지만 시간은 아직 한참이나 있었다. 익숙한 언덕의 산등성이를 타고 넘어 그 때와 거의 비슷한 외관의 건물을 발견했을 때는 얼굴 가득 웃음을 지었지만, 병원이 개조되어 식당으로 변해있는 것을 알고는 슬픈 표정으로 변했다.
“그렇구나. 남아 있을 리 없지.”
하얗게 칠해진 페인트 안으로 본래의 색이었던 민트색 페인트가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군데군데 칠이 엇나간 그 벽에 등을 기대고, 이 곳에 코비와 함께 오지 않은 사실에 안도하며 고개를 숙였다. 보는 이는 아무도 없는 가운데 참았던 단어 하나가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어머니…….”
헤르메포는 딱 한 번, 캄벨트를 타고 운-리레스에 방문한 일이 있다. 그리고 그 날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만났다고 한다. 이렇게 표현하는 이유는 그가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그 희미한 웃는 얼굴도, 작은 손을 감싸던 그 두꺼운 손의 감촉과 새옷에서 나던 향기, 코스모스로 가득한 길가를 넘어 병원으로 향하던 것-모두다 흐릿하게 남겨져 있는데 정작 어머니에 대한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는 굉장히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공포와 약간의 혐오를 보이던 아버지의 부하들은 그녀를 이야기할 때면 누구나 따뜻한 표정을 지었다. 미인이셨어요. 그렇게 말하지만 사진은 한 장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운-리레스에 방문했고 그녀에게 한눈에 반해 나를 임신시켰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에게 반하지 않았을 것이란 걸 어린시절부터 희미하게 알았다. 그는 잘생기지도, 상냥하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난폭했고 소인배에 속물이다. 아버지를 존경하던 시절에도 그 사실들을 부정하지는 못했다.
어머니가 나에게 남겨준 것은 레몬빛 금발과 속눈썹- 그리고 약해빠진 체질뿐이었다. 그녀는 나를 낳고 급속도로 몸이 망가졌고, 그녀를 돌려보내기 싫었던 아버지 때문에 위태로운 순간에서야 고향으로 옮겨졌다. 그래도 고향의 온화로운 분위기와 따뜻한 가족들의 힘으로 몇 년은 더 살았다는 것 같다. 그래서-회복된 어머니를 데리러, 아버지는 운-리레스에 왔던 것이다.
병원의 벽에서 벗어나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핀 길가로 돌아왔다. 벤치에 주저앉아 머릿 속을 다시 뒤져보지만 어머니의 모습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나 떠오르는 것은 짜증을 섞어 도끼손을 휘두르던 아버지의 고함소리, 그리고 그 주인을 알 수없는, 찢어지는 비명소리-.
분명히 무언가 더 떠오를 것 같은데 머리만 아플 뿐 더 이상 떠오르는 기억은 없었다. 아니, 더 이상은 기억하면 안 된다고 경종을 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코비, 언제쯤 오려나.”
약도를 꺼냈다. 그와 약속한 식당도 방문했던 곳이다. 지금은 몇 번이나 건물을 개축하여 커다랗게 변했다는 식당, 아버지가 사주었던 양고기는 정말 맛있었는데, 아직도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거, 제법 비쌌었으니까 코비는 질린 표정을 짓겠지.
“저기.”
키득하고 웃음을 짓던 중 문득 자신의 앞에 서있는 사람을 깨달았다. 허리가 구부러진 늙은 노파, 낡았지만 깨끗한 원피스에 체크무늬 숄로 가느다란 어깨를 감고 있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이지만 온화하고 따뜻한 얼굴, 뭔가 복잡한 감정을 가득 담은 늙은 여인의 눈이 헤르메포를 바라보며 애달픈 미소를 지어보인다. 주름지고 마른 손가락이 헤르메포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와 썬글라스를 붙잡아 천천히 그것을 벗겼다. 꽤나 느릿하게 이루어진 일련의 과정인데도 헤르메포는 그녀를 제지할 생각도, 행동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 광경을 보고만 있었다.
헤르메포의 시야에서 검고 투명한 막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노파는 한 때는 아름다웠을 눈동자 가득히 눈물을 채웠다.
“……헤르메포구나.”
낯선 노파가 건네는 자신의 이름에 헤르메포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낯설다. 하지만-어디에선가.
“……”
“내 손자…….”
가냘픈 그녀의 손이 헤르메포의 얼굴을 껴안았다. 그녀에게서 라벤더의 향기가 났다.
- 2 -
“코비상사입니다.”
짧은 노크와 함께 이름을 밝히자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거프중장의 방은 호화롭지는 않지만 멋진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한쪽 면을 채운 책장에는 각종 종류의 다채로운 책들이 가득 채워져 있고, 해왕류의 가죽으로 만든 카펫 위로는 고급이지만 화려하지 않은 동양풍의 책상과 탁자가 아늑한 느낌을 준다. 금방 마시고 있던 것인지 동양주 한병이 잔과 함께 탁자에 놓여져 있었다.
“부른 이유는, 당연히 모르겠지.”
평소라면 껄껄하고 웃을 거프중장은 침잠되고 진중한 표정을 하고 자신의 입매를 가다듬었다. 뭔가, 중요한 일인가. 코비의 표정도 덩달아 진지해 질 수밖에 없었다. 담담하고 조용한 약간의 시간을 보내고, 중장은 결심을 내렸다는 듯 손뼉을 두 번 쳤다.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인지 코비가 들어왔던 문을 통해 해군 두명이 들어왔다. 검은천으로 감싸인 상자 하나를 들고 있는 그들의 표정에도 웃음기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저 상자에 뭐가 들어있는 것인지 알지 못하는데도 상자를 보는 순간부터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두근두근두근. 아니. 왠지 짐작이 가기 시작했다. 저 상자 안에는 아마도, 분명히.
“아직 이릅니다.”
군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는데도, 코비는 입밖으로 그렇게 말을 뱉었다. 중장은 화를 내지 않고 다만 담담한 표정으로 코비를 응시했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하네.”
중장이 손짓하자 해군들은 상자를 들어 옮겨 탁자위에 올렸다. 검은 천이 풀자 극명하게 드러나는 하얀색 종이상자. 그리고 그 상자위에는 해군의 푸른색 마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상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야.”
상자가 천천히 들어올려진다. 코비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알고 있었다. 진급시험에도 포함되어 있는 내용이니까. 아니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이 세계, 이 위대한 항로를 항해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상사. 해군본부의 명이다.”
중장의 뒤에서 가만히 서있던 모자를 쓴 남자가 입을 열었다.
“자네에게 악마의 열매가 지급되었다.”
중장은 눈을 감았다. 코비는 상자의 안에서 드러난 기괴한 모양의 열매를 응시하며 손가락을 굳게 말아쥐었다. 수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하지만 가장 큰 생각은-아직, 아직 이르다는 사실 뿐이다.
쓰러질 듯 아득한 기분을 느낀다. 처음 떠오르는 것은 루피, 자신의 첫 친구의 얼굴-그리고, 자신의 바보스러운 동기가-헤르메포가 곁에 있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언젠가의 밤, 헤르메포와 악마의 열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아마도 그것은 당시 칠무해였던 크로커다일을 루피가 이겼다는 이야기를 멀리서 들었던 그 때 쯤이다.
“어둠의 능력이 제일 강하다던데 말야.”
신이 나서 각종 열매와, 그 열매를 먹었던 능력자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헤르메포에게 코비는 질문을 던졌다. 헤르메포씨는 악마의 열매를 먹고 싶으세요?
“먹고 싶었어.”
어째서인지 과거형의 대답이 돌아왔다. 코비의 시선에 헤르메포는 어쩐지 쑥스러운 듯 웃으며 쥐고 있던 펜으로 종이에 빙글빙글 낙서를 했다. 무언가의 열매의 모양을 그린 그는 그 위에 엑스표를 그렸다.
“너도 알다시피 한 사람은 하나의 열매밖에 먹지 못하잖아?”
“네.”
“그거 말이야, 왠지 가능성을 막는 것 같아.”
“가능……성이요?”
“응, 더 강해질 가능성.”
존경하는 동시에 목표인 루피는, 그리고 그의 동료들 중의 일부는 악마의 열매 능력자다. 루피는 고무고무, 그리고 그의 동료들 중에는 니코로빈이라는 여자와 애완동물같이 생긴 사슴인간. 그리고 그 움직이는 해골도 아마 분명히. 그 밖에 다른 동료들도 어쩌면 능력자일지 모른다.
“먹으면 좋겠지. 예전에는 먹고 강해지고 싶었어. 하지만-”
헤르메포는 말을 끊었다. 이만 자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죽은 듯이 잠든 그와는 달리 코비는 머릿 속에 악마의 열매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
그 때만 해도 두 사람은 약해빠진 잡부에 불과했다. 악마의 열매, 그 천문학적인 가격의 열매는 영원히 둘에게 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대화는 사실 의미가 없었다. 당시에는 그랬다.
“악마의 열매…….”
코비는 자신이 열매를 먹는 상상을 하기도 하고 이리저리 강해진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하다가 하얗게 날을 지새웠다.
“상사.”
중장의 부름에 현실로 돌아온다. 지금은 망상을 펼칠 때가 아니었다. 무슨 열매인지는 모르지만 열매는 눈 앞에 있었다. 사실 이렇게 망설일 것도 없는 일이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당장 몇 단계는 강해질 수 있다. ‘체’와 함께 사용한다면 악마의 열매 능력은 더 다채롭게 활용할 수 있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 것을 먹어야 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내키지 않는 것인가.
“중장님.”
미칠 듯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코비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시간을, 주세요.”
거프중장은 시계를 가리키며 시간을 지정했다. 오후 여섯시. 그 안에 해군에 보고를 해야하니 그 안에 결정하라는 명령이었다.
“예, 그럼 그 때 뵙겠습니다.”
코비는 떨리는 발걸음으로 출구를 향했다. 힐끔, 그의 눈빛이 탁자위의 악마의 열매로 향했다가 다시 돌려졌다.
“중장님 말씀이 맞군요.”
“그렇다고 했잖나.”
모자를 쓴 남자는 탁자에 다가가 열매를 들었다. 단단한 열매, 그 것을 먹어본 이들이라면 지독한 맛에 치를 떤다는-하지만 이 바다를 항해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이 열매를 꿈꾼다.
“좋아할 줄 알았는데요.”
지금까지 진중한 표정을 보이던 중장이 처음으로 웃음을 지었다. 그의 시선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 풋내기를 쫓는다. 어린 상사의 눈에 비쳤던 것은 분명 욕망이었다.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 그것을 저열하다고 폄하할 수 있을까.
“마음이 그리 단순한 것이겠나.”
술병을 기울여 잔을 채우고는 그 맑은 빛과 향기를 음미한다. 그가 좋아하는 술이었다. 달고 개운한 맛이 혀끝을 스치고 씁쓸함으로 변해 목을 타고 넘어간다.
“풋내기라고 해도 사내라는 거지.”
결정의 시간까지 앞으로 일곱시간.
집은 작았지만 아늑하고 아기자기한 느낌으로 꾸며져, 처음 오는 곳인데도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벽에는 모르는 얼굴의 가족이 그림들이 잔뜩 붙어있었다. 인자한 얼굴의 중년남자와 미모의 여성 사이에는 라벤더 꽃 한아름을 안고 있는 작은 꼬마숙녀가 얼굴 가득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진도 한 장 있었다. 조금 더 나이를 먹은 소녀의 머리색은 연한 레몬색. 자신의 것과 같다. 신기한 마음에, 그리운 마음에 손가락을 뻗어 사진을 만지려다가 손을 거둔다. 자리를 비웠던 노파가 직접만든 것으로 보이는 과자와 다기셋트를 가져왔다. 좋은 향기가 찻잔을 타고 넘어 거실을 가득히 채운다.
“네 어미가 좋아하던 차란다. 이 섬의 이름과 같은 차지.”
운-리레스. 그 것은 이 섬의 뒤편에 가득 피어난다는 라벤더 꽃과 다른 허브들을 섞어 만든 달고 향기로운 향의 차.
“예전에 마셨어요.”
약간은 어색한 느낌을 지우지 못하고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찻물을 삼킨다.
차를 즐기지 않던 아버지의 방에는 언제나 이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한번도 마시는 일을 보지 못했지만 차는 조금씩 줄어들었고 이따금 다음 상자로 바뀌었다. 고상한 척을 해볼까싶어 헤르메포가 처음으로 그 차에 손을 댔을 때, 모건은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그 흉물스런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 후로 헤르메포의 방에도 차상자가 놓여지게 되었다. 비록 지금 상황에는 마실 수 없게된지 오래였지만 말이다.
“해군에 다니는 구나.”
“예. 오늘은 휴식삼아 잠시 들렀어요.”
아버지에 대해서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그렇게 고민했지만 노파는 조금 안타까운 눈으로 헤르메포의 옷에 새겨진 해군마크를 바라보았을 뿐 모건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다.
“과자는 어떠니? 마음에 드니?”
“네. 정말 맛있네요.”
단답형의 대화만이 그렇게 이어졌다. 노파는 질문을 던지거나 이따금 아련한 눈으로 헤르메포를 바라보곤 했다. 그 눈빛을 받은 헤르메포는 부끄러운 기분이 되어 그녀의 시선을 엇갈려 피했다. 호감이었고, 애정이었다. 그 감정이 몹시 낯설기만 했다.
“어. 어떻게 지내세요?”
말을 더듬으며 처음으로 질문을 던지자 그녀는 은은하고 멋진 미소를 짓고는 차상자를 들어보였다. 이걸 만든단다. 그녀의 등 뒤로 열려진 창문 밖으로 계절이 달라 꽃을 틔우지 않은 라벤더의 녹색 꽃밭이 드넓게 보였다.
“다른 밭에서는 과일을 키우기도 하고 닭과 오리도 기르지. 과일이 남으면 잼을 만들기도 한단다.”
그녀는 연한 웃음을 지우지 않고는 헤르메포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늙고 주름진 손가락, 헤르메포는 크게 몸을 움찔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기에 가만히 있었다. 노파의 눈은 헤르메포의 눈의 색과 같았지만 오히려 더 맑고 투명한 빛깔이었다.
“얘야.”
“네?”
“이 섬에서 같이 살지 않겠니?”
차의 향기가 일순간 사라졌다.
방의 구석에서 코비는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을 채운 것은 루피도, 헤르메포도 아닌-알비다였다.
매끈매끈 열매를 먹기 전의 알비다. 그녀의 배에서 식충이처럼 굴려지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코비가 악마의 열매를 먹는 일을 처음 생각했던 것은 그녀의 배를 타고 있을 때였다.
이따금 상상하곤 했다. 무시무시하게, 인간이 아닌 정도로 강해져서 그녀의 배를 박살내고는 큰 소리로 웃으며 그들을 내려다보는 일을. 하지만-그거, 지금도 가능하지 않던가? 알비다는 이 바다에 들어온다면, 해군의 힘을 약간만 빌린다면-아니, 해군의 힘까지 동원하지 않아도 어쩌면 코비 혼자서도-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후우.”
문득 올려본 시야에는 헤르메포가 잔뜩 벌려놓은 전단들이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그러고보면 저녁을 산다고 했을 때 그가 느끼하게 웃음지었던 건 이 섬에 도착한 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관광지라면 꽤나 비쌀텐데 감당할 수 있을지-
“풋.”
방금 전까지 왕따당하고 구박당하던 기억을 되새기며 잔뜩 우울해했던 주제에 지갑이 얇아질 것을 걱정하고 있는 자신의 상황이 아이러니했다. 그렇구나. 그때는 정말 죽고싶은 심정이었는데-고작해야 이런 일이었나.
약속시간에는 한참 이르지만 코비는 몸을 일으켰다. 중장에게 들러서 결정을 내리고 헤르메포와 약속한 식당으로 가자. 그리고 비싼 메뉴는 고르지 못하게 해야지.
‘루피. 기다리세요.’
문을 향해 다가가는 코비의 얼굴에는 어떤 결심이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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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리레스의 식당은 섬을 찾은 해군들로 북적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 헤르메포가 기대서 있었다. 군복을 입지 않아서 더 눈에 띄는 그는 늘 입던 옷이 아닌 헐렁한 작업복위로 금발을 느슨하게 묶고 탁자에 앉아 있다. 평소의 복장이 워낙 유난했기에 함께 같은 배에 탔던 군인들조차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다.
그리고 식당의 문이 열렸다.
코비가 천천한 걸음으로 들어와 주변의 동료들과 인사를 나눈다. 평소보다도 기분이 훨씬 좋은지 얼굴에는 방실하는 웃음마저 떠올라 있었다.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더니만 헤르메포를 발견하고는 손을 크게 저으며 달려온다.
“어? 옷은요?”
“아, 그럴 일이 있어서.”
헤르메포는 씁쓸한 웃음을 짓고는 코비에게 말을 돌렸다.
“중장님은 무슨 일이었던 거야?”
코비는 짓궂게 웃었다.
“아,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식당에서 가장 유명한 유황생선요리를 주문했다.
“죄송합니다.”
헤르메포가 노파에게 말했다.
“여기 있고 싶지만-저, 약속한 일이 있어요. 그리고-”
“아버지보다 훌륭한 군인이 되고 싶습니다.”
노파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웃으며 말했다.
“말려도 소용없겠지. 너도 그 애를 닮았다면 고집이 셀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한동안의 침묵,
헤르메포는 작업복이 있는지 묻고는 남자가 없어 망가진 집 이곳 저곳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편지 보내도 될까요. 망설이며 꺼낸 그의 말에 노파는 물론이지, 라며 차상자를 잔뜩 챙겨주었다.
“죄송합니다.”
코비가 거프중장에게 말했다.
“먹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저는 약속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먹는다면 헤르메포와 같이 먹겠습니다.”
거프중장은 놀란 듯 입을 벌렸다. 자신이 좋아하는 동양주가 잔을 벗어나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있다가 뒤늦게야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놓치면 다음 기회는 없다고 해도 말이냐.”
“네.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동안의 침묵. 거프중장은 껄껄하고는 큰소리로 웃었다. 그리고는 유황생선요리가 맛있다는 말과 함께 돈주머니를 건네주었다.
두 사람은 알고 있다.
언젠가는 다른 길을 걸어야 할 수도 있다. 지금의 선택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오늘의 선택을 계속 후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적어도 오늘과 내일과, 앞으로 이어진 지극히 짧은 앞날만큼은-눈앞의 이 철없는 풋내기 녀석과 같은 길을 걸어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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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8 마찬가지로 기간이 지난 글이니 공개해봅니다. 헤르메포와 코비, 이 두사람은 아직도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