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서바이벌/현우이솔] 살아있는 실패 for 쌀토끼님
[살아있는 실패]
for 쌀토끼님
2016 01 17
피비린내는 아직도 생경하게 느껴진다.
"다행이네."
아이솔은 그 생경함이 몹시 반가워 간신히 웃을 수 있었다. 상처에서 피가 더이상 나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고정했던 붕대를 물 위에 흘려 보내고 나무에 기대 앉았다. 이제 등대가 금지당했다. 남은 장소는 이제 네 곳-생존자는 이제 자신을 포함하여 셋이니 거의 끝나가고는 있지만 트랩을 모두 소진했다. 방어구는 어떻게 제법 맞추긴 했지만 보조무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탓에 손에는 나이프 하나만이 들려있었다.
"이번 판은 실패일려나."
스스로 작게 뱉어낸 말에 어폐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번 판은'이 아니다. '이번 판도' 쪽이다. 아이솔은 살아있으나 실패했다. 사실은 그 생존성 마저도 의심받고 있는 마당이지만 일단 피는 돌고 심장은 뛰며 기억이 잔존하며, 내 이름을 기억하고 내 이름을 타인에게 말할 수 있으니 죽었냐고 물으면 살음에 가깝다 대답하겠다. 애초에 이 섬에 성공이라는 단어가 존재하기는 하나.
명예도 혁명도 없는 이 전장에는 성공, 희망, 꿈 같은 아름다운 단어들이 모조리 거세당한 것 같았다.
이기고 지고를 따지기 전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한 결같도록 모조리 실패를 거듭하고 있을 뿐 승자라는 단어는 찰나에 스쳐가는 허망 같은 것이었다, 이 흐르다 고인 피에도 실패가 흐르며 피와 쓰레기가 뭉친 심장은 실패의 덩어리라 말하겠다.
실패를 사랑하는 이가 어디 있을까.
실패가 싫은 이 섬의 체스말들은 나를 포함한 타인을 싫어하며, 그 실패를 소거하려는 자들은 타인의 뒤를 계속 추격한다. 이번 판에는 죽음도 죽임도, 동맹도 내키지 않아서 계속-마주치는 이 없이 등대의 어귀와 검은 숲 따위 만을 떠돌아 다녔다. 하지만-
오늘 오전, 견제로 깔아두었던 트랩에서 젊은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직후에 있던 방송에서는 그녀의 죽음을 알렸다. 이름이 뭐였더라. 단순하게 기억이 흐릿해짐에도 섬뜩해지곤 하지만 아이솔은 이내 그녀의 이름을 떠올렸다.
이름을 뱉으려는 순간 총소리가 들렸다. 아, 절 쪽이었다. 움직일까 했지만 다른 지역에도 트랩이 깔려 있으니 그대로 은신을 택했다. 체력은 아직 다 차지 않았다. 생각이 끊어졌다가 이어진다-그녀의 이름은.
"혜진이 네가 죽였냐."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혜진, 그런 이름이었다. 달을 등지고 서늘하게 서있는 이전 동료가-서늘하게 웃고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몰골이지만 머리 쪽의 부상은 크게 보이지 않으니 타인의 피라고 쉽게 짐작했다. 희미하게 김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 방금 전 총소리의 원인 쪽일 것이다. 짐작이 가는 건 아야인가. 병원 쪽에서 학살을 하는 것을 얼핏 보았으니 꽤 강해졌을 텐데. 그는 발치에 너덜너덜해진 트랩의 잔해를 던졌다.
"...너구나, 장현우."
"집합장소 왜 안왔어, 너 초반에 죽은 줄 알았는데 트랩 보고 알았어."
"그래?"
"그래라니. 싱겁게."
현우에게도 이젠 제법 피가 익숙해졌다. 붕대뭉치를 꺼내 대강 머리카락을 닦아내는 손길에는 익숙함과 싱거움이 엿보였다. 가능하다면 아직은 너도 피에 생경함을 느꼈으면 좋겠다고-일방적으로 생각하다가 쓸데없는 생각이란 것을 깨닫고는 몸을 일으켰다. 트랩의 상태를 힐끔 확인했지만 완전히 망가져서 고철에 가까웠다. 이쪽은 포기.
"글쎄, 왜 그랬을까."
아이솔은 어깨를 으쓱였다. 현우의 손에 쥐어진 너클은 색으로 보아 구하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고 방어구도 훌륭했다. 좋은 동료를 얻었을까? 아이솔이 고독에 취해 홀로 터널 어둠의 구석에서 수 많은 실패의 기억을 되새기며 동물마냥 숨어다닐 때 현우는 이전의 아이솔처럼 동료를 모으고, 쓸만한 물건들을 모으고-타인을 학살했을 것이다. 이렇게 둘이 마지막에 마주한 이상 그 가정은 분명, 사실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다.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 아이솔이 혼자 행동했던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이 섬에서 동맹이라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일이고 선택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지난 몇 번 동안 현우는 쓸만한 동료의 역할을 능숙하게 해냈고, 평소였다면 분명 팀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이번에 혼자 움직인 이유라고 하면.
"내키지 않아서."
아이솔 또한 목적을 가진 이들처럼 사람 사는 세상으로 금의환양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전 까지는 이 섬에서 살아나가겠다고, 누구보다 열심히 움직였었다. 그래. 그랬던 적이 더 많았다.
"너답지 않네."
"그러게."
너답지 않다라. 동료였던 이의 이름에서 나온 말은 이상하게 둔탁한 울림으로 울렸다. 네가 날 얼마나 알았다고 그런 말을 해. 장현우. 네가. 방송이 나왔다. 남은 인원은 두명-총소리가 울렸던 것을 알고 있다. 아야를 상대하고 직후였고 후반의 아야를 상대한 현우가 아무런 데미지가 없을리는 만무하다. 현우의 복부에 출혈이 비치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할 만한가. 현우가 볼을 긁적이며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아이솔의 반응 쪽이 훨씬 일렀다.
"선발필승-"
"너-"
왼발로 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나이프로 현우의 왼쪽 목덜미를 그었다. 대화하던 중라고는 해도 좋은 신체능력인 주제에 무방비하게 약점을 내놓고, 심지어 반격까지 한 박자 늦다니- 녀석은 이렇게 무디다.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피를 얼굴 방향으로 뿌렸기 때문에 현우의 시야가 가려졌다는 것을 확인했다. 트랩이 남아있는 구역은 우물, 설치 위치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물로 달려 나갔다. 애초에 괴물같은 현우자식이랑 몸으로 붙어봐야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디다...?라. 아이솔은 입가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방금, 눈을 나이프로 찌를 수도 있었는데 경로가 어긋났다. 아니 어긋난 쪽은.
'무딘 건 내 쪽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눈에 보이는 약초를 쥐어 뜯고 나무 뒤로 잠시 몸을 숨겼다. 약초를 짖이겨 충분한 식수에 타고, 바로 마신다. 절에 트랩을 설치하면서 어떤 물건들을 버렸었는지 기억을 되짚는다. 수중에 피아노줄 조금, 유리컵이 있었으니 유리를 갈아서 트랩을 만들어도 좋을 것이다. 몇 가지의 가정을 하고 있자니-다시, 두고 온 동료의 얼굴이 떠오른다.
직전의 판이었다. 남아 있는 건 열 대엇명이었고 현우는 수면을 취하고 있었다. 혜진을 보초로 맡긴 아이솔은 혼자 해변에서 보급품을 모으고 돌아왔고, 그 날 저녁 약속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던 현우는 모든 장비품과 보급품을 잃은 상태로 고깃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흔한 피, 흔한 죽음, 흔한 고깃덩어리. 피와 살과 뼈-고작 그 따위.
흔하지 않았던 오히려 아이솔, 자신의 반응쪽이었다.
정말 지겹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이 섬을 나간 사람은 보지 못했다. 실패없이 나갈 수 있다면, 아아, 나는 실패했다. 또 실패해버렸다. 너도 실패했다. 다수의 실패의 기억이 까맣게 아이솔을 먹어들어간다. 기억이 기억되고 그 기억자는 반추되는 기억에 질식해들어간다. 숨이 피냄새로 틀어막히며 쓰레기같이 얼룩진 핏물이 심장을 돈다. 몸을 돈다. 피투성이의 고깃덩어리를 안고 차마 소리조차 내지 못하며 아이솔은 외쳤다.
알려줘. 내게 알려줘, 상처없이 사랑하는 법을, 패배 없이 혁명을 일으키는 법을- 죽이지 않고 살아남는 법을, 알려줘.
소리 없이 질식한 듯 외치다가-그 직후에 현우의 방어구를 가지고 있는 혜진을 만났다. 왜 너는 살아있어? 아이솔은 질문조차 하지 않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혜진을 죽였다. 아무런 대화도 거래도 없이-그는 최후까지 살아남아 안온한 시간을 허락 받았다. 이깟 승리, 이깟 시간, 고작 이런 것을 실패가 아니라 말할 수 있나. 매번 시체 위에서 썩어들어가고 있는데, 정말 이런 게 승리인가. 검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갔다. 고작 몇 번이나 겪은 현우의 죽음 따위로.
이번 만은 죽이고 싶지 않다. 연구시설에서 깨어나며 그렇게 생각했었다.
"장현우."
인기척 없는 곳에 말했다.
"이번 판, 너 줄게."
"뭐, 그러면 땡큐지."
네가 죽음으로 퇴색되어간다. 사람 한 명 죽이기 힘들어했으면서. 독 한방울에도 무서워했으면서. 지가 죽어도 남을 죽이지 못하고 매일 물러나서, 결국 아이솔의 총으로 몇 명이나 죽이게 했으면서. 그런 너는 이제 없다-. 이상하지. 네가 강해지길 바랐던 것 같은데 이렇게 네가 강해진 걸 보니 역시 속이 좋질 않아.
"장현우."
핏줄이 불거진다. 역시, 스펙이 좋은 녀석이 망설임까지 없어지자 무지막지하게 데미지가 박힌다. 울컥이며 핏물이 입 밖으로 불거져 나왔다.
"...멍청이."
현우의 발 아래에서 빛이 터져나왔다. 막대한 양의 빛과 빛 속에서 흩어지는 금속조각, 검고 붉은 것들- 아이솔은 몸을 동그랗게 말아 상처를 감싸며 건너편으로 몸을 날렸다. 비산했던 고깃덩어리가 두 박자 느리게, 철퍽, 하고 아이솔의 얼굴에 닿았다-끔찍한 감촉, 아이솔은 눈을 감았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멈췄던 기억에 익숙한 노래가 들렸던 기분이었다.
아이솔은 서서히 눈을 떴다. 아직 수거되지 않았다-해가 뜨고 있었다. 한 때 현우였던, 동료의 고깃조각들이 너덜너덜하게 흩어져 있었다. 얼굴에 말라붙은 덩어리는 말라서 쉽게 떨어졌다.
해가 뜬다. 아침, 또 아침. 아이솔은 몸을 일으키며 발치에 닿는 무언가를 주었다. 거리로 보면 현우에게서 떨어져 나간 듯한 그 물건은 검게 변색된 십자가였다. 현우는 잘 쓰지 않는 십자가지만-꼭 탐색을 나갔다 십자가를 발견하면 그는 그 것을 꼬박꼬박 주워서 아이솔에게 건네주고는 했다. 아무 말도 없이, 마치 사소한 빵 한조각을 보급품처럼 건네는 것 마냥, 그렇게.
'포르투칼에서는 주기도문도 다르게 말하겠지?'
'팔찌로 번역되니까, 똑같이 들릴 것 같은데.'
'그럼 성가라던지.'
'애냐. 그런 거 말할 시간에 밥이나 처먹어!'
'네...'
그 대화는 언제의 대화였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이미 잊었는지도 모른다, 아이솔은 십자가를 쥐고 바닥에 앉았다. 은총이 가득하신 성모님, 죽음은 어디에 있나요. 승리는 어디에 있나요. 복되신 마리아님. 이 어린양의 승리에 기뻐하시고 계십니까.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해 빌어주세요. 아멘. 아멘.
젠장 맞을 아멘. 수백 번 부를 아멘.
아. 성모님. 나는 이 죽음이 견디기 어렵습니다. 아이솔은 스스로 고백했다.
고깃덩이에 정을 주지 말라고 한 것도 자신이었다. 이번에는 죽이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자신이었다. 실패. 아, 또 실패. 아이솔의 과거는 실패로 점철되었으며 지금도 실패했으며 앞으로도 실패했다-마음을 주지 않는 것에도 실패했다. 모든 것이 다 실패였다.
아아. 아침인데-눈 앞은 왜 검기만 할까.
팔찌의 불이 꺼질 때까지-아이솔은 소리내지 않고 울었다. 온전히 동료의 죽음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는 게 못내 서러운 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