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무면] 한가지 거짓말 - 上
그래, 이야기해줄게. 나는 너에게 거짓말을 할거야.
[한가지 거짓말 - 上]
2016 01 17
육중한 소리와 함께 괴수가 쓰러졌다. 주변에는 피가 산재했지만 괴수 앞의 네 사람은 피 한방울, 오물 한 점없이 깔끔한 상태인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일행의 중앙에 서있던 검은색의 퍼코트와 긴 원피스 차림의 미모의 여성이 뒤를 돌아보며 말끔하고 의례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갑자기 불러서 미안했어."
"아닙니다."
미모의 여성, 후부키는 남자를 조심스럽게 눈으로 탐색했다. 타이트한 검은 정장에 진회색의 코트, 검은 안경 차림의 남자는 깔끔한 차림새였지만 지하철 어디에서나 보기 쉬운 한 사람의 신입사원 처럼 개성도 보이지 않고 그저 단정한 인상이었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후부키를 바라보며 약간 쑥스럽다는 듯 웃는 표정에서는 아직 어리다는 느낌이 물씬 풍겨나왔다.
말끔한 인상의 이 남자는 한때 후부키의 수하였다. 뭐 예전에 제 부하였다고는 해도 눈에 띄는 활약을 했던 적은 없다. 다만 그는 몹시 짧은 기간 조직에 속해 있었으며, 훗날 수하들의 입에서 제 소속을 떠나 트레이닝을 계속 했다던가, 재수가 없으니 싹수가 노랗다는 등의 말만을 들었던 적은 있긴 했었다-그게 후부키가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오늘 그를 이 장소로 부른 명목상의 이유는 보조. 이따금 혼자 활동하는 히어로들에게 호출을 넣는 경우는 더러 있으니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겠지만 보통 명목상의 이유가 있다는 것은 진짜 이유가 별도로 있다는 것을 뜻하기 마련이다.
"페이는 계좌로 넣을게."
"네, 그럼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다시 뵙겠습니다."
정말 수하라도 된 마냥 깊숙하게 허리를 숙여서 인사하는 그를 바라보던 후부키는 핑글 하고 뒤로 돌아섰다. 한참을 걸어가 부하가 열어주는 차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간 후에야 참았던 한숨을 옅게 내쉬었다. 그녀는 차창 밖으로, 진회색코트의 남자가 전철역으로 향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새로 장만한 코트 안쪽에서 하얀 봉투를 하나 꺼내 들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봉투를 벌려 내용물을 꺼내 집는다. 단정한 손글씨로 쓰여진 종이와 사진 한장. 종이 쪽지 안에는 짧지만 그리 단순하지는 않은 내용의 글자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C급 무면허라이더와 B급 신인은 협회와 유착관계에 종속되어 있으며, 신인은 무면허라이더를 성착취하고 있다.>-그리고 사진 속에는 반 정도 옷이 벗겨진 무면허라이더의 뒷모습과, 그를 내려다보는 신인의 얼굴이 선명히 찍혀져 있었다. 이 봉투는 지난 토요일에 익명으로 후부키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렇게 지독한 녀석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히어로끼리의 일이면 차라리 협회에 제보를 할 것이지. 어째서 하필 자신에게? 후부키는 입술을 깨물며 봉투의 내용물을 조심스럽게 추스려 다시 코트 깊숙히에 넣었다. 다른 곳으로 토스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혹시 새어나가기라도 하면 입맛이 씁쓸할 만한 큰 폭탄이다. 신인이라면 몰라도 C급의 무면허라이더에게 이 스캔들은 제법 큰 타격이 될 것이 분명했다. 약하지만 강인하고 상냥한 성품으로 인망이 넓기도 하고, 이미지도 워낙 서민적이고 착하다고 소문이 나있었기 때문에 이런 사진이나 투서가 공개된다면 순식간에 언론이며 시민들에 의해 뭇매를 맞을 가능성이 높다.
후부키는 잘 손질된 손톱끝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도움을 청할만한 사람이 있을까? 그럴 듯한 이름이 몇 사람 떠올랐다가 곧 사라졌다. 가능하면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하도록 조용히, 조용히 처리해야 할텐데.
"무면허라이더의 순찰구역으로 가줘."
후부키는 한숨을 숨기지 못하고 다시 한 번 내뱉었다. 일단 또 한명의 당사자를 만나보는 게 순서라고 생각되었다.
-
"부상?"
운도 없지. 기껏 찾아가려던 의도가 아쉽게도 무면허라이더는 물풍선을 가지고 장난치던 아이들을 설득하다가 부상을 입고 병원에 갔다고 한다. 히어로라는 사람치고는 퍽이나 어설픈 부상사유라서 한심함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후부키 자신도 인지도가 있다보니 병원까지 찾아가는 건 아무래도 모양이 좋지 않다...고 생각할 때 쯤, 불현 듯 어떤 남자가 떠올랐다. 얼핏 두 사람이 친구라도 들은 것도 같으니 살짝 정보를 얻기엔 좋지 않을까? 망설임은 길지 않아서, 후부키는 차를 돌려보내고 수하만 둘 챙기며 도로에 섰다. 성가시다는 인상만은 지울 수 없지만 그렇다해도-일단 손대기 시작한 일이니까, 조금 더 알아보는 쪽이 덜 찝찝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20분 뒤, 후부키는 낡은 맨션의 낡은 방석 위에서-스스로 사온 손바닥 크기의 병주스를 잡고, 제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와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무면허라이더씨한테 요 근래 이상한 점 없었어?"
지상최강의 남자. 25세로 무직에 미혼, 취미가 히어로이며, 헤어스타일의 외향이 몹시 개성적인 남자 사이타마는 미모의 여성을 눈 앞에 두고도 뚱한 표정 그대로,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던 주스와 같은 브랜드의 주스뚜껑과 다투며 성의 없는 대답을 했다.
"별로-?"
"그런 태도 말고 성실히 말해!"
"글쎄다."
"아무튼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고-멍청할 정도로 바보 같다는 건 알겠는데 정보가 너무 없어. 친구라는 당신까지 이렇게 나오면..."
"아, 뚜껑 열렸다."
후부키의 방문-정확히는 후부키가 들고온 쥬스상자 때문에 집 문을 열어주었던 사이타마는 겨우 뚜껑을 연 유리병에 든 주스를한입에 깨끗이 비우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애초에 이 여자가 여기 찾아온 이유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비싸디 비싼 유기농 쥬스-심지어 맛있는-을 받아 놓고 입을 씻는 것도 조금 곤란할 것 같고. 무엇보다 뭐라도 말하지 않으면 후부키가 돌아가지 않고 여기 남아서 귀찮게 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계속 들고 있었다.
뭐라도, 말해주는 게 좋을까.
"뒤에서 두번째 정도는 빼는 게 좋을 걸."
"뭐?"
"나와 그 녀석은 네가 말하는 것 정도로 친하진 않아. 다만 조언을 한다면-그 녀석, 나랑 조금 닮았어."
"전혀 안닮았는데!!"
후부키가 손가락으로 사이타마의 두상을 정확히 가리키며 날 선 목소리로 소리쳤다. 주방에 있던 제노스가 한 순간 살기 어린 시선을 보내서, 후부키가 뒤늦게 손가락을 접고는 다시 평소처럼 여상한 표정으로 돌아갔지만 사이타마는 살짝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볼을 부풀렸다.
"아니 머리카락이나 강함이나 그런 부류가 아니라-"
사이타마는 단어에서 조금 망설이는 것 같았다. 무언가 대단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이어지는 말은 사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녀석, 바보긴 한데 멍청하진 않아. 근본적인 부분에서 나랑-닮았거든."
사이타마가 장난치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모호한 발언인 건 분명했다. 후부키는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해달라고 사이타마를 재촉했지만, 그는 그 이상의 이야기를 해주지는 않았다. 애초에 쪽지를 공개하거나 협조를 한 것도 아니고 주스 상자를 사들고 처들어와서 다짜고짜 정보를 뱉으라고 하면 정상적으로 대꾸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 의외로 도움이 된 것은 후부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제노스 쪽이었다.
"으앗- 당신!"
벗어둔 코트에서 비져나온 봉투를 발견한 제노스는 빠르게 내용물을 읽었고, 바로 사이타마에게 보낼 것이라는 후부키의 예상과는 달리 무뚝뚝한 얼굴로 다시 봉투를 돌려 놓았다. 감정을 읽기 어려운 표정이지만 손가락으로 문 밖을 가리키는 모양이 아무리 봐도 후부키를 불러내는 모양을 하고 있어서, 후부키는 복잡한 심경으로 사이타마에게 인사를 고하고 코트를 챙겨 입었다. 하이힐을 신던 후부키의 눈에 언뜻 비친 사이타마는 평소와 똑같이 멍청한 표정이었지만 생각 탓인지 그를 감싼 분위기는 어딘가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았다.
현관 밖에서는 제노스가 팔짱을 끼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노스는 침착하고 묵묵한 목소리로, 어떤 미사여구도 없이 입을 열었다.
"그 쪽지의 발송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어떻게라니?"
"..."
후부키는 구두를 신느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하고는 입가를 매만졌다. 마스카라로 진하게 강조된 긴 속눈썹 아래의 눈동자가 반짝이며 움직이다가 눈꺼풀 아래로 덮였다.
"후, 내부고발자겠지. 일반 시민은 아니고 아마도 높은 확률로 히어로, 정말로 나쁜 의도라면 협회겠지만 이 쪽이면 끔찍해. 단순한 장난질로 보이진 않아. 쪽지가 내 사무실 책상위에 있었고 조직원들은 이것도, 이 걸 가져다 놓은 사람에 대해서도 전혀 몰라. 원한일 가능성이 커. 신인이나, 무면허나 둘 다 후보겠지만 무면허라이더 쪽의 평판을 볼 때 전자인 신인에 대한 원한 가능성이 높겠지."
"후부키조의 조직원일 가능성은?"
"거의 없을거야."
제노스의 눈이 후부키에게 직접 와 닿았다. 색이 반전된 서늘한 동공을 바라본 후부키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사이타마가 곁에 있을 때와는 명백하 다른 분위기-이 남자를 독립적인 상태에서 가까이에서 본다는 건, 이런 느낌인가.
"자작극일 가능성은?"
"있을리가 있겠어? 두 사람 다 그럴 만한 사람이 아냐."
제노스가 고개를 저었다. 금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며 유려한 모양을 만들었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만, 힌트를 주지. 이 글씨 굉장히 단정하고 정리가 되어 있는 반면, 무면허라이더와 신인이라는 글자를 쓸때는 윤곽선이 조금 더 두껍고, 필압이 흔들리고 있다."
"그렇다는 건?"
"네 말대로, 쪽지를 쓴 사람은 이 둘에게 특정 상태 이상의 감정 변화를 보이고 있다는 뜻이다. 원한, 복수 계열이 아마도 맞겠지."
후부키의 스마트폰이 그 때 쯤 울렸다. 무면허라이더가 병원 밖으로 나섰다는 연락이었다. 황급히 제노스에게 손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후부키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제노스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어졌다가 일상적으로 돌아왔다.
"선생님이 신경쓰이지 않는 선에서 수습되면 좋겠는데."
제노스는 현관으로 들어갔다. 후부키에게는 미처 말하지 않았지만 그 종이에 있던 글씨는 제노스가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의 글씨체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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