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닉무면] 1월은 너의 日과 1
처음엔 망상인 줄 알았어. 그 왜 성냥개비로 환상을 보던 여자애 이야기 있잖아, 나는 여자애도 아니고 성냥도 없지만 오늘 밤은 정말 추웠으니까. 그도 그럴게말이지 목소리에서 온도가 느껴질 리 없는데 들려온 말은 이상할 정도로 따뜻했거든. 현실에서 그런 게 가능할리가 없다-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야.
"꿈이야?"
"아니네."
대답을 듣고, 내밀어진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을 때도 나는 정말 망상인 줄 알았어. 계속, 그렇게. 동화 속에 있는 느낌이어서.
[1월은 너의 日과 1]
2016 1 24
"심심해..."
소닉은 베개를 안은 상태로 칭얼거리듯 중얼거렸다. 시선 끝에 상대는 없지만 혼잣말은 아니다. 방 건너, 거실의 책상 쪽에서 긴 한숨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조금 뒤, 여상한 어조로 대꾸가 돌아왔다.
"그냥 디비져 잠이라도 자지 그러나."
"넌 은근히 냉정한 말을 잘 하더라."
"하핫, 자네는 냉정한 말을 직설적으로 잘하니, 내 수준은 아직 멀었다고 사료되네."
웃음소리가 하핫이 뭐냐 하핫이. 소닉은 짜증 섞인 몸짓으로 베개를 쥐어 눌렀다. 쭈글거리며 줄어들었다가 다시 토동하게 부풀어오른다. 심심해. 저 자식 재미없어. 뾰루퉁한 얼굴로 베개를 괴롭히다가, 시트 위로 푹, 하고 뒤로 드러누웠다. 방금 저녀석이 한 말 지독하지 않았나. 수준 운운하면서 사람을 깔아보는 것도 정도만큼 해야지.
"...널 정의의 라이더라고 부르는 인간들 이해 안가."
"시민들은 끌어들이지 말게나."
부우-소닉은 부풀리고는 베개를 위로 던졌다 받았다. 자신한테는 매일 날 선 대꾸만 하며 자꾸 집 밖으로 나가라고, 직업을 구하던, 보호시설로 들어가건, 하다못해 집있는 애인을 만들라는 둥 잔소리만 하는 주제에, 그 놈의 시민님들이니 시민님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을 때는 봄 날의 바람이 따로 없는 꽃밭같은 어투였다. 뭔데 이 온도차-! 소닉은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이내 매트리스 아래로 떨어졌다.
쿵, 물론 당연히 낙법을 쓰거나 하다 못해 떨어지는 사이에 몇 가지 묘기까지 할 수 있을 정도-아니 아예 떨어지지 않고 매트리스 위로 오르거나 아무튼지 그 따위 짓들-일반적인 인간이 생각하는 것들이 무엇이던지 보편적 이상은 뛰어넘을 수 있는 소닉이었지만 큰 소리를 일부러 낸 것은 자신을 등지고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저 남자, 무면허라이더가 보일 반응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손바닥만한 집이니 방도 조그맣기 때문에 당연히 소닉이 떨어진 소리를 못들었을리가 없건만, 치사하게 그는 등도 돌리지 않고 키보드를 타닥이고 있다.
"치사한 무면허 놈아-야박한 놈아-이상한 소리가 나면 아 동거인이 다쳤나보다! 하고 달려와야지!"
"아 좀 조용히 해주게!! 업무일지 써야하니까! 15분이면 쓰는 게 자네 덕분에 30분이 넘게 진도가 안나가지 않나!"
"와 짜증냈다."
"...후."
소닉은 무면허라이더의 한숨소리를 들으며 다다미에 그대로 납작 업드렸다. 더 긁으면 저 녀석이 발작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이었다. 끈기와 성실과 노력의 대변자, C급의 마지막 희망-정치권에나 어울릴 것같은 그 수많은 캐치프레이즈와는 달리 실상 마주한 그는 은근히 참을성도 부족하고 다혈질이라 한 번 화나면 오래 간다는 것을 소닉은 이 집에서 며칠 동안 학습했다. 히터는 잠시 꺼두었기 때문에 바닥은 차갑기만 하다. 건조한 공기는 따뜻한데 바닥은 까칠하고 차가운-그 온도차이에 대해 생각하자니 그 표현이 몹시, 눈 앞의 남자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잠깐이지만 저런 성질 나쁜 녀석을 요정이니 천사니 생각했던 자신이 바보지. 소닉은 멍한 얼굴로 잘 청소된 다다미 바닥을 손가락 끝으로 매만지다가 무심코 자신이 그에게 외쳤던 말을 다시 되새기게 되었다. 아. 동거인-.
시작은 열흘 전, 아주 추웠던 겨울 밤에 공원에서 잠들어 있던 자신의 몸 위로 낯선 점퍼가 덮여 있었다.
그 다음 날에는 지퍼를 열면 자동으로 가열되는 즉석식품들 따위가, 그 다음날에는 핫팩-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단순하게 숙소를 구하기 귀찮고 이 정도 추위는 버티지 못할 것도 없어서 자고 있을 뿐인데 누구를 거지 취급을 하나 싶어 화도 났지만, 점퍼는 꽤 마음에 들었고-보라색라인이 들어간 검은색이었다-음식도 맛있었고, 핫팩의 곰돌이도 귀여워서 그 공원을 떠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민감한 자신이 인기척도 느끼지 못하고 잠들었을 정도면 어느 정도는 지쳐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했다. 단순히 그의 존재가 소닉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한 터럭의 살기라도 있었다면 소닉이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으니.
일주일 전, 기온이 최저점을 찍던 그 날, 그렇게-겨우 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을 때, 웃기는 차림을 한 남자가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러다 얼어죽겠다고, 며칠 정도면 재워주겠다고.
'며칠이라고 했지 정해진 기간은 아니었잖아.'
그렇게 지낸 것도 어느새 일주일째, 애초에 제의받자마자 당연히 거절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정말 그 날 분위기가 너무 이상해서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왔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휭하니 출발했고, 당연스럽게 따라가다가 문득 일반인은 자전거의 속도를 도보로 뒤쫓기 어렵다는 걸 생각하고 물었다. 그는 나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괴인이건 악당이건 자신의 구역 내에서 얼어죽는 걸 본다면 속이 쓰릴 것 같다고, 참으로 한심한 대답을 웃는 얼굴로 해서 대꾸할 말도 잃었다.
소닉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매일 정해진 곳을 순찰하는 무면허는 오전 순찰 후 그 날과 전날 저녁에 있었던 일을 수첩-세상에 요즘 세상에 수첩이라니!-에 기록했다가 다음 날 오후에 기록하는 게 습관이었다. 기록이라고 해봐야 별 거 없다. 어디의 보도블록이 위험해보인다던가 CCTV가 파손되어 있었다던가, 범죄자를 잡았다던가 그런. 오늘은 무슨 특이한 점이 있나 싶어 책상에 기대서 모니터를 살펴보고 있지만 오늘도 그다지 별다른 일은 기록되지 않아 있었다. 무면허라이더는 힐끔 소닉을 보았지만 이번에는 돌아가라고 말하지 않고는 손가락을 까닥이다가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대충 마무리가 되었는지 마지막에는 도덕책에서 발췌한 듯한 간단한 소감을 두어줄 기록하더니 저장을 누른다.
"저녁 만들어야 겠군."
그가 몸을 일으켰다. 소닉도 따라 일어서서 작은 부엌으로 따라 들어갔다.
"카레할까."
"카레보단 하이라이스가 좋은데."
소닉이 무면허라이더의 어깨 뒤에서 말하자 무면허라이더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카레가루를 잡았다. 와, 이 자식 역시 성격 나쁘단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등을 바라보다가 문득 라운드티셔츠에 감싸인 그의 허리가 근육량에 비해서는 얇은 편이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뒤에서 끌어 안아 보았다.
"...뭐하나."
"뱃살 있구나 너."
"일반인이면 다 있어. 자네 같은 체구가 더 이상한거라고 생각하네."
무면허는 불편한지 꿈지럭거렸다. 그만하라니까. 손가락으로 뱃살을 만지다가 그가 주춤거리느라 높이가 낮아진 김에 터틀넥으로 가려져 있던 목덜미를 깨물어본다. 와, 역시 이 쪽도 말랑거리네, 그가 이런 장난 싫어한다며 자꾸 밀어내고 짜증을 나며 실갱이를 하다가 서로 마주보게 된 자세로 변했지만 소닉은 끈질기게 그에게 매달려 이번에는 다른 위치로 각도를 바꿔 목을 다시 깨물었다. 약간 짭짤하고 적당히 말랑하고 딱딱해서 씹는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며 한참 우물거리자 그가 종아리를 걷어차온다. 제법 묵직한 통증이긴 하지만 못참을 것도 없어서 어깨를 더 단단히 붙잡았다.
"아악-그만 좀!"
찰칵.
참다 못한 듯 몇 톤이나 높아진 무면허라이더의 히스테릭한 목소리와 거의 동시에 낯선 기계음이 들렸다. 으음...? 그와 소닉이 소리의 방향으로 동시에 고개를 돌리자-주방에 나있던 작은 창문 밖에서 지상 최강의 사나이, 사이타마가 스마트폰의 카메라를 이 쪽으로 향한 상태로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
"..."
"아-하던 거 해-다음에 올게!!"
사이타마는 무해한 표정으로 창문 밖으로 얼굴을 감췄다. 아마 놀러왔던 모양이다...전화나 하고 놀러와주었다면 이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있는데로 얼빠진 표정으로 아-아-따위의 반응을 하는 무면허라이더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 이 녀석 괜찮은 건가, 소닉이 그의 어깨를 토닥이자 정신을 차린 남자는 그의 팔을 확 하고 쳐내며 짜증 섞인 말투로 빠르게 말을 중얼 거렸다.
"나, 난 이제 그를 어떻게 보나! 자네 장난 때문에 술친구가-! 술친구가아!"
소닉은 기분이 급속도로 떨어지는 걸 느꼈다. 방금까지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는데-아니, 나빠진 이유는 사이타마가 사진을 찍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애초에 정말 하나도 알지 못했던 것 같은 무면허와는 달리 소닉은 집 밖의 인기척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도 이미 느끼고 있었고 사진같은 거 찍혀봐야 제 삶에 지장이 가지도 않는다는 것까지도 계산하고 있었다. 게다가 사진이 퍼지면 또 어쩔까, 애초에 별다른 짓도 하지 않았고 장난과 비슷하긴 했다. 그런데 무면허라이더, 이 남자의 입에서 막상 장난이라는 말을 듣고-이렇게 쉽게 손을 내쳐지고 나니, 새삼.
소닉 자신의 위치가 정말 하찮게 느껴져서. 무면허라이더라는 칭호를 가진 이 남자에게는 정말 자신이 어쩔 수 없이 떠맡은 동거인에 지나지 않나 싶어서-
소닉은 제게서 등을 돌리고 서있던 남자의 팔을 훅하고 잡아 땡겼다. 언제나 짜증을 내는 주제에 약간 힘을 준 것 만으로 당겨지는 연약함이 짜증을 돋궜다. 당황한 남자의 얼굴을 그대로 잡아 누르며 입술을 겹쳤다. 폭신하고 건조하고-꼭 이 집같은 느낌이 드는 입술은 겨울 바람인지 약간 까칠한 감촉이 남았다. 호흡을 두어번 불어 넣고 떨어지자, 얼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시선과 바로 마주쳤다.
"잠깐-"
다시 입을 겹쳤다. 이번에는 말캉한 혀를 밀어 넣었지만 크게 반항하지는 않고 다만 반응해오지도 않았다. 서툴다, 너는 어떻게 스킨쉽까지 익숙하지 못한 건지. 뱃살이 늘 정도로 나이를 먹었으면서 이 정도 밖에 키스를 못한다는 게 몹시 우스면서도 이렇게 함께 지낼 거라면 가르쳐 주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혀를 얽었다. 티셔츠 사이로 손가락을 넣을 때 쯤-
"아, 그래도 라면은 두고갈-아, 미안."
얼빠진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미안이라는 말과는 달리, 찰칵하는 소리가 한 번 더 들린 걸로 봐서는 전혀 미안해하는 의사가 없는 것 같다. 무면허가 무릎으로 소닉을 쳐내고는 휙 하고 밀어냈다.
"오해네-오핼세!! 사이타마!! 사이타마군!!"
소닉은 다다미 위에 앉아서 안타까운 목소리로 외투도 없이 집 밖으로 뛰쳐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문을 채 닫지도 않은 상태로 뛰쳐나간 탓에 겨울 바람이 집으로 슈욱, 하고 식간에 스며 든다. 겨울. 겨울이구나.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을 덮었다. 이불에서 느껴지는 낯선 스킨냄새에 눈을 살짝 감았다. 들여올 때는 제 맘대로 쉽게 들여놓았을 지 몰라도, 나가는 것은, 쉽게 들어주지 말자- 그 남자도 제게는 퉁명하니까 그 정도의 일 정도는 요구해도 괜찮을 거라고, 소닉은 그렇게 멋대로 결론 내렸다.
+
"맞다. 제노스. 오늘은 이런 걸 봤는데."
"사진...? 입니까."
"응."
"흐음, 이건."
"그렇지-?"
"음속의 소닉(웃음)도 이기지 못하다니 무면허라이더는 얼마나 약한 겁니까."
"그런 문젠가...?"
-
코브(@corvsaber)님에게 소닉무면, 집착 키워드로 받아서 조각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