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림] 곤란한 일은 아무것도
[곤란한 일은 아무것도]
2016 1 31
리모는 못마땅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옷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난 계절의 옷부터 해서 커버를 씌워 보관해두었던 옷까지 모조리 몸에 대어보았지만 썩 마음에 드는 옷이 없는 게, 도대체 자신은 뭘 입고 다녔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이건 너무 꾸민 것 같고, 이건 얼룩이 있고, 이건 어제 입었고, 이건 늘어났어. 이건 너무 노티나-!'
그렇다고 이렇게 심려를 할 정도로 대단한 외출을 앞두었는지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저 친구인 도운이 날이 많이 풀렸으니 정원을 손질하며 작은 탁자를 놓는다고 하며, 설치가 끝난 오후 쯤 차 한잔 하자며 청했던 것 뿐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조금 이른 봄맞이 겸 아이들을 제외한 조용한 친목도모의 시간'이라는 것 같다. 그래봤자 움직이는 거리도 정말 얼마 안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매일처럼 언제나 입는 옷을 입고 가는 건 내키지 않았다.
'둘만 시간을 보내는 건 오랜만이니까.'
사실 조금 들떠 있었다. 봄이라는 단어가 주는 기대감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아무튼지- 손목시계를 확인하다가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난 것을 알아챈 리모는 결국 마지막으로 골랐던 회색 배색의 흰색 셔츠를 선택했다. 살짝 다리고 향수를 뿌린다면 나쁘지는 않겠다고 중얼거리며 거실로 향하는 그의 얼굴에는 연한 웃음이 배어 나왔다.
둘만의 시간, 조금 설레이는 단어였다. '그 도운'이 먼저 청해주어서 기쁜 것도 있었다.
도운은 요즘의 거의 매일을 컴퓨터와 차에만 처박혀 보냈다. 특히 이제 끝나가는 겨울 동안은 휠체어가 자주 손을 탄다는 말을 자주 하며 외부활동을 더 줄여서, 쇼핑까지 마트에서 배달시키거나 아이들을 내보내곤 했다. 그나마 일하는 것을 제외하면 외부인과의 접촉이 상식적인 수준을 벗어날 정도로 없다.
리모는 내심으로 친구의 비사교적인 점이 괴로웠다. 도운은 설령 흔들린 적은 있을지언정 저에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친구였다. 사도를 걸었던 자신과는 달리 상냥하고 좋은 사람. 신뢰를 한 번 주는 건 가능하다해도 저한테 해를 끼쳤던 사람에게 다시 옆자리를 내어줄만큼 상냥한 사람은 드물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 때, 감옥에서 출소하고 다시 맨 손으로 도시에 돌아왔던 때, 자신을 진정으로 생각해 주려고 했던 이는 세모를 제외하면 오직 그 한사람 뿐이었다...부끄럽기에 구태여 입 밖에 내어본 적은 없어도, 리모는 그를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만나면 초봄 기분을 내며 소풍이라도 제의해볼까. 모두 같이 가도 되고, 아니면 둘이서 꽃 필 무렵에 근처 공원이라도 가서 캔맥주라도 마셔도 좋고. 가능하면 둘이 가면 좋겠다. 도운은 멋있으니까, 옷만 잘입혀서 사진도 찍으면 좋겠다-'
리모가 말하는 '멋진 도운'이라는 이미지가 소위 말하는 친구에 대한 너그러움인지는 명확하지 않았으나 현관을 나서던 이 시점에서 리모는 도운에게 품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 우정인지, 애착인지, 순수한 동료애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감정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려 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
십수미터 남짓의, 이동이라 하기에도 민망한 거리를 줄여나간다. 봄이라지만 겨울과 차이가 적어 쌀쌀한 탓에 셔츠 위에는 두꺼운 재킷차림이었다. 머플러를 걸칠까 하다가 바로 앞인데 조금 유난한가 싶어 드러낸 목깃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스쳤다. 리모가 뒷문을 열며 마주한 곳에는 이미 설치를 끝낸 듯한 테이블과 휠체어에 앉아있는 도운의 뒷모습이 보였다. 도운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혀다가 문득 놀려주려는 마음에 들어서 조용히 발걸음을 가까이 한 순간-
신경쓰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미약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확히는 노랫소리였다.
-♪
고작 한 마디의 노랫소리일 뿐인데 리모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숨쉬기 괴롭다. 누군가가 목구멍을 틀어쥐고 석고라도 드리부은 듯 텁텁하게 답답한 느낌에 사로 잡힌다.
식간에 떠오르는 기억들은 언제인지도 정확하지 않은 주제에 목소리와 노랫소리만은 또렷하게도 재생되었다.
-노래라니, 별일이네.
-...그게 말이야.
그는 사실 노래를 잘 듣지도 부르지 않았음에도, 이 노래 만큼은 몇 주를 연습했었다. 결국은 이상함을 참지 못하고 물어보던 리모의 앞에서 볼을 물들이며 발갛게 웃던, 지금보다 퍽 어렸던 도운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 노래로 청혼, 할까하고.
서툰 노래를 계속 연습하던 그를 지켜보며 응원의 말을 건네면서도, 청혼이라면 그가 결혼한다는 거니까 지금처럼은 지내지 못할 것이라며 씁쓸해하던 그 날들의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 몇 주나 연습했던 그 노래를 들으며 상냥한 웃음을 짓던 소녀같던 표정의 아가씨의 울음 섞인 승낙의 말도 기억하고 있다.
리모는 작은 노랫소리에 반응하며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쏟아지는 기억 속에서 주춤 뒤로 걸음을 물렸다. 무의식적인 뒷걸음질이었다. 이 노래를 듣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 도운과 마주할 수는 없다. 막연하게 그렇게 생각하는 중에도 소리를 내지 않으며 자리를 떠났다.
주춤거리며 몇 걸음의 거리를 확보한 리모는 담을 뒤로하고 주저앉았다. 모처럼 손질한 쟈켓이며 바지가 바닥에 더럽혀졌지만 신경을 쓸 정도의 여유는 남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틀어막은 입속에는 당혹감과 의문이 맴돈다. 뭐지. 방금 뭔가 걸리는 게 있었는데-, 도운의 노래를 들으며 소란스러웠졌던 마음과 옛기억들이 엉망으로 머릿속을 헤매다가 무겁고 불쾌한 것으로 변하며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방금 크게 충격을 받은 것은 같은데 어떤 이유인지, 리모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정말 모르는 건가. 나?
그 질문을 던지는 순간 머리속이 하얗게 비었다, 깨끗하게 지워진 뇌 속에서 차분히 떠오른 첫 생각은 객관화가 동반된 냉정한 사실문이었다.
'도운은 그녀에게 청혼했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단순하고 명쾌한 구조의 사실문은 겨울이 지나면 봄이 찾아오는 것처럼 아무런 문제가 없이 자연스러웠다. 이어서 자연스럽게 다음의 구문을 생각해낸다.
'도운은 아직도 그녀를 그리워 한다. 사랑한다.'
이 문장에는 아무런 오류도 없었다. 심지어 아내를 사별한 배우자의 일반적인 태도로서도 몹시 당연하며 바람직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이 두 사실문을 인지하는 것 만으로 리모의 손 끝까지 불쾌함에 덜덜 떨렸다. 그래, 불쾌감이었다-절대로 유쾌한 감정일 수가 없었다.
그 불유쾌한 감정에서 발산되는 수 많은 단어들과 잠겼던 기억들이 삽시간에 떠오르며 짧은 사실문에 섞이고 뒤엉킨다. 그 것에 지금은 들려오지 않는 거리에 있음에도 가사를 모두 알고있는 도운의 노랫말이 합쳐지며 덩어리가 되었다가 다시 단어 단위로 분해되었다. 자음과 모음의 형태로 산산히 부셔졌다가 다시 거품처럼 부풀었다가 잘게 다져지고, 길게 늘어났다가 폭발했다. 그렇게 엉망인 잔해로 남았던 것은 결국은 새까맣고 끈적하게 번졌다.
그 참란한 잔해 속에서 리모는 겨우 깨달았다.
'나는 도운을, 좋아하게 되었구나.'
학창시절에 문득 생각했다가 지워버렸던, 먼 훗날인 지금에서야 깨달은 그 감정은 드라마나 순정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풋풋한 노랑이나 분홍색 따위가 아니었다. 그 말은 떠올리는 것 자체가 서늘하고 어둡고 괴로운 냄새가 났다. 무력한 기분. 도망가고 싶다. 하지만 어디로? 그의 곁을 떠난다고 이렇게 한순간 가정하는 것 만으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뒤따르는 감정은 마땅히도 죄책감이었다.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다니, 그것도 하필이면 동성의, 자신의 하나뿐인 친구라니.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 맹세했던 자신의 교만에 대한 어리석음으로 공포와 두려움, 고통 따위의 이름을 가진 것들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온다.
하지만 그 아득한 감정들 속에 오직 불쾌한 것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소름끼치게도 유쾌한 것- 그런 것이 존재했다.
동화책의 해피엔딩처럼 도운과 행복하게 맺어질 수 있다는 그 따위는 아니었다. 하지만 친구인 채라면, 지금의 도운은 혼자니까 언제까지나 곁에 있고, 언제까지나 같이 지낼 수 있다. '지금' 그 곁에 있는 건 그녀가 아닌, 자신이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뭔데?
자신의 맹세마저 저버린 그 추하고 한심한 발상에 리모는 자신의 마음을 떠나 제 존재 자체가 끈적하고 불쾌한 타르덩어리가 되는 감각을 맛보았다. 오래된 기름얼룩처럼 묵직하고 불유쾌한 감촉이 몸을 적신다. 괴롭다. 싫다. 이 모든 감정들이 구토가 날 정도로 역겹다.
그렇게 실제로는 짧지만 리모에게는 조금 긴 시간이 지났다.
리모는 생각의 끝에 도운이 그 노래를 연습하던 어린 날을 떠올렸다. 그 때의 자신에게는 무엇이든 쉽게 느껴졌고 세상은 리모에게 수월하고 행복한 공간이었다. 좋은 친구, 좋은 연인이 있었다. 미래는 밝게만 느껴졌다.
아름답지 않은 것은 보지도 않고, 의미 없다고 생각되는 일은 하지 않으면서 리모는 그 시간 속에서 행복했다.
사랑도 미래도 우정도 얼마든지 아름답게 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아무렇게나 하고 싶지 않아서, 힘들어도 미학적으로, 성스럽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시절의 오만하던 권리모는 제가 오직 온전할 것 같던사랑을 잃고, 길 바닥에 처박혀서 이토록 초라한 모습으로, 다시 한 번 사랑을 입에 담는 비참한 짓거리를 하리라고는 꿈에라도 생각하지 못했겠지.
리모는 그 앉은 자리에서 길게 침묵하다가 천천히,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두 걸음 정도는 흔들렸지만 곧 일상적인 움직임이 되었다.
하지만 정말로 이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곤란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리모는 제 집을 나서던 순간에서 지금까지 무언가를 잃어버리지도 않았고 나쁜 짓을 하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단지 과거의 기억을 조금 떠올렸을 뿐이다. 어떤 일도 시작하지 않았으니 끝날 것도 없었다. 단지, 그 뿐. 그 따위의 아무 것도 아닌 것들.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자.
리모는 얼굴을 감싸고 제 숨을 손가락 사이에 불어넣어 다시 삼켰다. 마치 풍선인형에 혼을 불어 넣는 행위 같다며 근거 없이 생각하고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한 번 찾았다가 돌이켰던 문을 여상하게 열고는-혹여나 노랫소리가 들릴까 큰 소리로 도운의 이름을 불렀다.
도운이 돌아본다. 웃으며 리모의 이름을 부른다.
리모는 제 그림자를 짓밟으며 인사를 건넸다. 언제나와 같은 표정으로, 언제나와 같은 초봄의 날, 겨울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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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ruden26님을 위해서. 옛날 좋아하던 노래를 부르는 도운을 바라보는 리모, 문장키워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