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제무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소년은 플라톤을 생각하고 있다. 그가 플라톤의 사상과 교감 중이라고 생각된다면 먼저 부정하겠다. 애초에 소년은 문과도 아니거니와 몇 천년 전의 사상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애초에 지금 사상에도 관심이 없다- 가능하다면 현인류와도 담을 쌓고 싶다는 게 오히려 솔직한 심정이라고 하겠다.
다만 지금 그는 높은 확률로 가정한다. 플라톤이 오늘의 풍경을 본다면 분명 지금의 저와 같은 말을 지껄일 것이라고.
"아...이 사무치게 멍청한 인류..."
란도셀이 매어진 작고 아담한 몸은 치미는 분노를 감당하지 못하고 부들거리며 도로 위에 멈춰섰다. 떨떠름함을 감추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가 무심코 길 건너의 편의점과 마주치고는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한숨을 푹 길게 내쉬었다. 시력이 좋지 않으면, 저런 것들을 조금 덜 목도하게 되면 이 분노도 줄어들까?
"도대체 왜 저런 거에 넘어가는 거야."
세상의 모든 날들은 어차피 모든 해와 일생을 가리지 않고 인간의 생에 단 한 번만 찾아오지 않던가, 물리학선상에서 객관적으로 규정하여 오늘 하루의 가치는 사실상 다른 날들과 아무런 차등이 없다. 시간의 배열은 지극히 동등하며 균일하게 흘러가고 있다. 때로 규칙이나 가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약간의 변동들은 있겠으나, 적어도 지금 이렇게 발을 딛고 있는 이 지구위에서는 그러하다-하루에 주관적 가치를 부여할 수는 있겠으나, 그 가치를 부가하는 것은 개인 본인이어야지, 나라나 기업이나 집단이 되어서는 안된다-집단이란 때로 얼마나 멍청한 건가. 이성이 인류의 최고의 무기라는 걸 정말 다수의 인류는 모른단 말인가...!
소년은 그 멍청함에 질식할 것 같다고 느꼈지만 슬슬 지각이었다.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그가 보던 편의점의 유리에는 빨간 하트의 포스터와 함께, 해피 발렌타인데이-따위의 글자가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렇다. 발렌타인데이에 한탄해 마지 않는 소년의 이름은 동제-본업은 S급 5위의 히어로, 금년 10세 부업으로는 학원강사와 함께 아이러니하게도 소학생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for 발렌타인데이
2016 02 13
"저기, 이거..."
소란스러운 점심시간의 교실 안, 급식의 회수도 끝나 한적해진 참에 양갈래머리의 소녀가 수줍게 웃으며 준수한 얼굴의 소년에게 초콜릿을 내밀고 있다. 이 부분만 읽는다면야 그럭저럭 로맨틱한 상황이겠지만 제목 전에서도 말했다시피 그 상대가 동제가 되어서야 로맨틱이라는 단어와는 상당히, 달과 지구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거리가 생기고 만다.
이따금 이런 종류의 설정을 가진 캐릭터들은 만화책 속에서 곤혹스러움을 느끼고는 한다던데 동제에게는 그나마의 곤혹스러움 마저도 없다. 비단 동제 뿐만이 아니라 이 교실의 거의 모든 학생들이 소녀의 짧은 생애-무려 10년이나 되는-에서 일어난 일생일대의 로맨틱 이벤트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이 없는 듯 일상처럼 자신들의 발렌타인데이를 보내고 있다.
'참 좋은 나이네.'
소녀 뒤의 화기애매한 교실풍경을 바라보던 동제는 다시금 한숨을 내쉰다. 언제나 그렇지만 때때로 더욱 더 동년배의 존재들은 동제를 질식시키고 마비시키며 때로 혐오스럽게 만들고는 한다-. 아, 플라톤, 플라톤...문득, 이 소녀가 과연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에 대해 이름이라도-가타카나의 표기에 대해서라도 알고 있을까 가정해 본다. 설마 그 정도는 제대로 표기하겠지.
"플...뭐?"
"아아. 아냐. 고마워."
얼마나 사람에게 지쳤으면 제가 표정관리가 깨질까. 동제는 익숙하게 입술을 들어 천진한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안그래도 문어처럼 붉었던 소녀의 얼굴이 더 붉게 물드는 것을 보며, 새삼 웃는 얼굴의 위대함을 깨닫게 된다.
아이돌들의 무기가 미소라고 누군가 말했던 것 같은데 아이들의 무기도 분명 미소다. 가뜩이나 어리고 연약한 외향은 타인에게 있어 보호본능을 일으키며 그것에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목구비와 천진한 웃음까지 더해진다면 가히 최강, 그리고 동제 자신은 분명 그 모든 조건에 해당된다. 이건 왕자병 같은 것도 아니다. 다만 '사실'로 존재할 뿐이다.
더군다나 동제의 직업은 일단 히어로-영웅, 이 시대의 히어로라 하면 아마이마스크를 일변도로 한 아이돌식 우상의 역할까지 해내어야 하는 공인에 가까운 존재인 것이다. 어렵지는 않지만, 피곤한 일이다. 정말로...
"바...받아줄래?"
"그럼, 얼마든지."
그래서 동제는 소녀에게 기꺼이 허락하고는 오른손을 내밀어 창가를 가리켰다. 초콜릿을 전달하려는 소녀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오르기도 잠시, 그녀는 창가에 수북하게 쌓인 초콜릿 무더기와, 그 무더기를 지키는 소년 한명을 목격하게 되었다. 이게 뭐지? 10년의 인생에서 상정해보지 못한 결과에 소녀가 당황한 사이에 소년, 마츠미 카제야군(10세, 소학생, 단역)은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와 포스트잇과 샤프를 건네주며 상큼하게 웃어보였다. 얼덜결에 건네 받은 포스트잇에는 193이라는 숫자가 써있었다.
"아. 그 포스트잇 초콜릿에 붙이고, 편지 유무랑 이름 써놓고 나한테 주면 돼. 수제초콜릿은 아니지? 작년에 손톱이 검출되서 올해부터 수제초콜릿은...어. 너...우냐?"
마츠미군의 만류에도, 소녀는 초콜릿을 교실 바닥에 던지고 울며 뛰쳐나갔다. 그 떠나가는 손의 동작마저 순정만화스러워서 마츠미군이 감탄사를 뱉으며 박수를 치는 것 까지 바라보며-동제는 인류의 불합리함에 새삼 한숨을 내쉬었다. 플라톤, 플라톤. 그리고 마츠미군이 193번의 포스트잇에 무명, 미확인이라는 글자를 서툰 글씨로 새겨 초콜릿을 초콜릿타워~for 동제~의 맨 위에 조심스럽게 올리는 사이 교실의 문에서는 다시금, 한 학년 아래의 소녀가 또 수줍은 얼굴로 실내화를 딛고 있었다.
이런 세상 따위 망해버려라. 그렇게 생각하며 동제는 다시금 웃었다. 입꼬리에 경련이 이는 것 같았지만 원래 이렇게 돈을 번다는 게 어렵다. 참고로 말하자면 마츠미군은 2년째 동제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초콜릿 한 개의 관리당 백엔, 작년에는 받은 돈으로 신상 자전거를 뽑았다던가? 이 교실 안에서 발렌타인데이의 특혜를 가장 합리적으로 즐기고 있는 것은 의외로 기념일 특수를 전력으로 누리고 있는 마츠미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마츠미군의 노동과 동제의 직업의식의 협력으로 수업이 끝난 청소시간까지 합하여, 마츠미는 총액 25,000엔과 불로소득 주제에 부가세 10%까지 현금으로 챙겨 받고는 수위에게 빌린 손수레에 초콜릿을 실어 교문 앞까지 배달을 마친 후 작년에 맞춘 자전거를 끌고 상큼한 얼굴로 고용주에게 보고를 끝냈다. 카테고리별로 종이백에 나눠 분류한 상태에서 직업정신마저 느껴진다. 내년에도 같은 반이 된다면 그를 고용해야겠다고 다시금 생각한다.
물어본 적은 없는데 다른 아이에게 말하는 목소리에서 그가 오늘 받은 돈으로 신형 게임기를 산다는 것을 들었다. 사실 마츠미군이 사려는 기종은 동제가 개발한 모델이었기에 샘플이라면 넘쳐나는 상태여서 한 대 보너스로 건네어 줄까하다가 노동의 대가를 즐기는 상큼한 소년의 동심을 차마 깨트릴 수 없다는 판단으로 제 발상을 때려쳤다. 아무래도 오늘 노동 때문에 뇌가 혹사당한 모양이다. 이런 멍청한 생각을 했던 걸 보면.
운전기사는 조금 늦는다고 한다. 이후의 일정이 새벽까지 이어져 있는 참에 딸아이의 학교에 들러 초콜릿을 받아오고 싶다고 말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30분 정도의 텀이기도 하고 그 나마도 20분 정도 남아있다-. 그 요청을 쑥스럽지만 행복하다는 내색을 지우지 않은 상태로 말해오던 기사의 얼굴에 동제는 새삼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불합리해, 비이성적이야, 하지만 행복해 보였다. 제게 찾아오던 소녀들도 마츠미군도 운전기사도-이런 세상의 모든 것들에 한숨을 하기 보다는 어쩌면 진정 한숨을 내쉬어야 하는 대상은, 어쩌면 이 세계에서 잘못된 것은.
쌀쌀한 바람이 한 줄기 교문 앞을 스친다.
동제의 눈 앞에서 소년과 소녀가 손을 꼭 마주 잡은 상태로 조근조근 이야기를 나누며 지나간다. 같은 반의 아이들이지만 동제에게도 동제 뒤의 쇼핑백무더기에도 전혀 관심이 없는 듯 하다, 오로지 서로의 얼굴 만을 바라보며 행복하게 웃는 둘의 웃는 얼굴은 분명 천진해 보였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있는 것도 같아서.
아아, 잘못된 것은 그래 어쩌면.
동제는 고개를 숙였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생각을 지쳤다는 핑계로 내뱉으며 어깨를 늘어뜨린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자꾸 그런 생각이 든다. 이런 날은 이래서 싫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하니까, 그러니까.
-치링-
자전거의 벨소리가 들렸다. 마츠미군인가, 꼴사나운 표정을 보일 수는 없어서 디폴트로 갖춘 연한 미소를 띄우고 고개를 들었지만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어서 조금 놀랐다. 전투모드도 학교에서는 완전히 풀어버리는 탓에 반응이 한참이나 늦었다지만 그것도 사실상 핑계에 불과했다.
"여, 오랜만이군."
"......그러네. 아저씨."
무면허라이더, C급 1위, 한 자리수의 넘버라고는 해도 S급의 동제와는 몇 백의 차이, 무력으로만 따지면 몇 백배의 차이가 날 지 가늠할 수 없는 몹시 연약하고(!!) 가녀린(!!) 그가 자전거를 타고 인사해오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니 활동이 겹친 것도 여러번이라 친하다고 하지는 못해도 그럭저럭 익숙한 사이기는 했다.
그의 바구니 안에는 발렌타인데이의 초콜릿이 하나-저렇게 약한 주제에 누군가와 하하호호 하며 즐길 여유도 있다니 좋겠네. 자각하지 못한 비소가 자꾸 입술 밖으로 새어나올 것 같은 저열함으로 동제는 표정을 꾹 눌러 삼켰다.
"이런, 동제군, 사랑받고 있군."
눈이 있다면 알아차리지 않는 게 이상한 동제의 초콜릿의 무덤~버전 쇼핑백~을 바라보던 무면허라이더는 특유의 아저씨같은 말투로 싱긋, 하고 웃어보였다. 무해한 얼굴로 들고 가기 곤란한 거면 도와줄까? 하고 묻는 말에 다시금 짜증이 일어난다. 도와줄 능력도 없으면서-초콜릿 하나를 소중하게 담아가지고는 뭐가 잘났다고 웃는 얼굴인지, 싱긋 따위인지. 한층 짜증을 섞어 속엣말로 투덜거리다가 한 박자 느리게 자각한다. 지금 하고 있는게 짜증은 맞구나 하고-근거 없이도 짜증을 내고 있구나 하고.
"아저씨도 받았나보네."
"하하, 어머니에게 받았네, 아무래도 내가 안쓰러웠던 모양이지."
이상하다. 방금 그의 대답에서 묘하게 짜증이 가시는 느낌이었다. 역시 한심한 녀석이라는-그 나이에 어머니에게 받았다니 더더욱 한심한 녀석인 게 입증이 되었으니 더 짜증이 나야 할텐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짜증이 사그라든다. 이성적으로는 바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동제는 조금 곤란함을 느꼈다. 지쳐서 그래. 지쳐서-하지만 정말 그것 뿐인가?
"곧 차 올테니까 신경쓰지 말고 가."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동제가 말했다. 어쩐지 얼굴을 마주보는 게 괴로워져서 초콜릿 쪽을 바라보고 섰는데 무면허라이더는 자전거에 체인을 걸며 세우고 있었다. 학교에 용건이라도 있었나 싶어 보고 있자니 제게 성큼 다가와서는 곁을 지키듯이 섰다. 정말로-지키듯이. 누가 누굴 지킨다는 건가 싶어 어이가 없어지는 행태다.
"...아저씨 뭐하는 거야?"
"소학생을 어찌 혼자 두겠나. 자네 스스로 몸을 지킬 수 있는 건 잘 아네만 요즘 이 학교 근처에 변태가 나온다는 소문도 있고-으음, 아니, 그냥 순수하게 말동무라도 하자면 웃을 텐가."
"아저씨 말도 제대로 못하잖아."
"일본어라면 문제는 없네만."
"......맘대로 해."
막상 말동무를 해준다고 해놓고서도 말은 없었다.
휴대폰으로 메일을 확인하고 느린 동작으로 답장을 보낸다던가, 이따금 입매를 장갑낀 손가락으로 매만지고는 하는 동작에서는 그럼에도 동제에 대한 특별한 의식이나, 곤란함이나 초조함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초조한 건 오히려 동제 쪽이었다. 실로 이상하게도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어지간히 비이성적인 인간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지만 이 남자는 상상이상으로 비이성적이어서-그럼에도 자신의 기준이라는 것은 지키고 있는 것 같아서, 솔직히 말하자면 동제는 그가 불편했다. 그의 존재도, 이 이상하고 유보적인 동반도, 이 침묵도 모두 초조하고 불편하기 그지 없었다. 이전에도 그랬고 오늘은 더더욱 심하게 괴롭다-
"무면허라이더."
침묵이라도 깨어볼까 하는 시도로 동제가 입을 열었다. 고글낀 시야와 무해해보이는 작은 입매, 어린아이가 하면 안되는 생각이라는 걸 알지만 퍽이나 어려 보이는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몇 살 정도의 차이로 보일까, 그래도 까마득한 나이와 시간을 두고 있는 건 분명하겠지. 단순한 시간의 중첩, 넘어갈 수 없는 시간의 벽-왜 가정하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상태로이성을 넘어서 사고 하고 있다. 동제는 그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고 생각의 흐름 속에서 되는 대로 말을 꺼냈다.
"내가 아저씨한테 초콜릿 주면 기뻐할꺼야?"
...정말 되는 대로 내뱉은 말이었다. 동제는 뒤늦게야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자각하면서 미슥거리는 구역질을 느꼈다. 와, 잠깐, 소학생컨셉이라고는 하지만, 애는 애다운 말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컨셉질 하긴 했지만!! 방금 컨셉이라는 자각 안했잖아? 지금 무슨 짓 한거지? 따위의 것들로 뇌세포가 뒤죽박죽으로 뒤섞이고 뉴런이 혼재되어 간다. 바이러스라도 먹었나보다. 동제는 울것 같은 심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방금 이 것이 S급 5위가 할 법한 대사였나. 뒤늦게라도 수습하려면 컨셉인 척 해야 한다는 생각은 좀 들었는데 그렇게 하기에도 전의가 들지 않았다. 소학생의 말버릇을 빌자면 지금, 굉장하게-무지막지하게 쪽이 팔려서 말입니다.
그런 동제의 옆에서 조금의 공백 뒤, 하핫.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고개를 들자 무면허라이더가 사심 없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자네처럼 귀여운 히어로가 건네주는 것이라면 초콜릿 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물론 기쁘지 않겠나."
쿵, 하고 무언가가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묵직해지는 데 나쁜 기분은 아니다. 절대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무겁다, 하지만 나쁘지 않다. 오히려, 오히려- 동제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쇼핑백으로 향했다. 편지가 없는 것, 수제가 아닌 것, 감별이 끝난 쇼핑백을 뒤적여 포스트잇을 떼어내고는 대여섯개를 골라서 무면허라이더의 바구니에 가져다 쏟았다.
"이거, 다른 아이들이 내게 준거야. 그런데도 기뻐?"
동제는 웃었다. 천진한 웃음이라는 무기를 장착하고는 무면허라이더를 올려다보며 원하듯이 물음을 던진다. 잔소리를 해, 나쁜 짓이라고 말해, 이런 짓 하지 말라고 평소처럼 도덕교과서에서 나올 말들을 멋대로 지껄여주길 바라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근거없이 두근거리던 심장의 고동이 차차 평상시처럼 고요하게 잦아드는 것을 알았다. 두근거리고 있었구나, 뒤늦은 깨달음에서 역시 평소의 상태가 아님을 다시금 깨닫지만 어디부터 고쳐야 할 지는 아직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동제의 예상과는 달리 무면허라이더는 동제에게 가까이 다가왔다-그리고 끌어 안았다.
"뭐, 뭐야?"
"자, 가만히 있게."
밀어내려면 얼마든지 밀어낼 수 있고 애초에 안기기 전에도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의 행동에 살의나 의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핑계로 안겨 있었다. 약한 히어로의 몸은 아직은 어린 동제보다는 한참이나 커서, 동제의 얼굴과 몸을 끌어 안아주기에는 충분한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표정 하지 말게, 동제군."
"무슨 표정?"
"억지로 웃는 아이의 표정만큼 내게 괴로운 것도 없어. 그런 표정으로 말하면 내가 어떤 대답을 해줘야 할지 모르게 되어 버리네, 차라리 괴로우면 괴롭다 말해주게나."
네가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하나. 기다리던 잔소리였지만 생각하던 방향은 아니었다. 아저씨가 뭘 안다고. C급 주제에, 못생긴 주제에, 키도 작고 힘도 하나도 없는 주제에. 제 주제에. 동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딱딱한 싸구려 갑옷의 감촉과 싸구려 옷으로 감싸인 단단한 팔은 그럼에도 따뜻해서, 그래서일까.
"분명 타인의 선물을 다른 이에게 선물하는 건 권장하는 행위는 아니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자네는 내게 기쁠거냐고 물었지. 기쁘네. 그러니 억지로 웃지는 말아주게나."
".....알았어."
동제는 웃는 얼굴을 풀었다. 무료함에 젖은 평소의 얼굴로 돌아오자 무면허라이더는 감싸안았던 포옹을 풀고 한 걸음 물러나 화사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동제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쓰다듬는다-처음 받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대응할 것이 쉽게 떠오르지는 않았다. 어린애취급이라니 같지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런 사이에 손가락이 떨어지자 조금 아쉬운 느낌이 든 것도 같았다. 분명 착각이었으리라.
"이거 고민이군."
"뭐가?"
"화이트데이에 답례할 것 말일세."
"어차피 남아도는 걸 준거니까 그런 거 필요없어."
"그래도, 그럴 수는 없지."
무면허라이더는 그 말을 끝으로 자전거의 잠금을 풀었다. 동제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세단이 도착되어 기사가 기다리는 상태였다. 얼마나 무방비한 상태였는지 짐작하지 못할 정도로 풀어져 있었다는 것에 동제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뒤를 돌아 웃어보인 무면허라이더는 가볍게 패달을 밟아 순식간에 멀어졌다. 동제는 입술을 꾹 깨물며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곧 운전기사에게 다가가 쇼핑백을 옮겨달라고 부탁하고는 차에 올라탔다.
시트에 몸을 묻으며 여러모로 지친 머릿 속을 가닥씩 풀어 정리해 나간다.
"멍청한 주제에 어린아이 취급하기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중얼거리는 동제의 얼굴은 뾰루퉁한 어린 아이의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화이트데이가 언제였더라. 앞으로 한달인가-라고 가정하는 동제의 머릿 속에서 이미 플라톤 같은 단어는 지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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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발렌타인:>!! 화이트데이에 후편이 나올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