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체이] 소망
*후반편 보지 않은 상태에서 기술하여 캐릭터 붕괴 / 설정 붕괴 있을 수 있습니다.
[소망]
-for 서화님
2016 04 16
고우는 어두운 소파 위에 혼자 있었다.
조명이 꺼진 부스는 고요했고 몇개의 보조등과 기계의 불빛만으로 윤곽을 비추고 있을 뿐 잠잠하기만 하다. 늘상 컴퓨터를 붙잡고 연구와 씨름하던 린나까지 자리를 비운 상태로 벨트씨도 신노스케와 함께 있으며 시프트카들 또한 자취가 없다. 온통 조용한 이 공간을 고우 혼자 긴 시간 사용하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언제나의 고우라면 밝고, 활기차고, 화려한 것들을 좋아할 것 같다는 평을 듣는 편이고, 실제로도 그렇지만 이런 고요와 정적도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좋아한다는 개념이 있는 건 아니다, 이렇게 혼자 보내는 시간에 익숙한 것 뿐이다.
다만 이 공간이 조용한 것이 낯선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 이 안에 잔소리를 늘어놓을 누군가라도 한명 있다면 조금 달랐을까,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피해서 이 곳에 홀로 남기를 선택한 것은 고우 자신이다.
지금 이 시간의 특상과 안에서는 작은 파티가 열리고 있다, 이전에 폭발사고의 참조인이었던 학생과 학생의 부모가 특상과에게-정확히는 과장에게 답례품으로 케이크와 와인을 선물하고 갔다던가, 그걸 계기로 하여 친목도 도모하고 체이스의 합류를 한 번 더 축하할 겸 한 번 더 간소하게 파티를 열었다는 것 같다.
그러고보면 그 폭발사고의 상처, 아직도 남아 있는데-이전 폭발의 여파로 남아 목덜미 아래에 부풀어오른 잔흔을 손끝으로 더듬어 위치를 확인하던 고우의 얼굴에 비죽이 한줄기 웃음이 스친다. 그 학생은 이 사건을 계기로 세상을 비뚤게 바라보던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그래- 개심, 개심이라, 그렇게 쉽게 방향이 틀어지는 것들을 마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가. 그래 뭐 그렇다고 할 수는 있는데 그런 것 좀 비겁하지 않나?
실제로 범죄를 방조하고 신노스케를 비웃으며 서툴기에 더 질나쁜 냉소를 보내던 그 녀석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한데 그걸 십대의 치기라는 이름으로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건가. 사람이란 게 그렇게 쉽나, 그렇게 따지면 저도 십대인데 그딴 짓 안하는데 말이다. 모두가 용서와 관용이라는 감정으로 너그럽게 넘어가는 것들을 왜 자신만은 넘어갈 수 없는 건지, 아 이렇게 생각하면 결국은 내가 문제구나.
고우는 뒤틀리는 입매를 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다. 과민하면 안된다. 예민하면 안된다. 할리박사님도 벨트씨도 그렇게 말했다. 고우 너는 너무 성급하다고, 생각을 너무 많이 한다고-조금 더 자신을 믿고 노력하라고. 하, 노력? 무슨 노력을 하라는 건지, 구체적인 제안을 해주면 좋겠는데 그 정도의 성의는 보이지 않을 거면서.
벽에 몸을 기댔다. 고개를 약간 뒤로 제쳤을 뿐인데 혹사당한 몸에서는 온통 삐그덕거리는 불유쾌한 소리가 난다. 그럼요, 노력해야죠, 더, 더-더-하지만 언제까지? 무언가 검붉고 얼룩진 것들이 목구멍을 비집고 입안을 맴돌다가 비릿하게 번진다. 불쾌함이 유난하다 싶더니만 입 안이 터진 모양인지 실제로 비릿한 액체가 혀에 모여서 억지로 삼켰다. 구역질이 저절로 치민다.
오늘은 그래, 사람이라는 건 이따금 이렇게 푸념을 늘어놓을 때도 있는 거겠지. 이렇게 정의내릴 정도로 사람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지만서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어서 그렇게 생각해 두기로 했다.
이 곳에 틀어박히기 직전, 마지막에 마주친 것은 키리코였다. 그녀는 홀로 고민하고 홀로 부딛치던 체이스의 문제가 해결된 것에 몹시 만족한 모양인지 시종 화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키리코, 키리코-고우의 단 하나 뿐인 가족, 그의 누나는 분명 고우의 소유물이 아니며 스스로 온전하게 판단하고 행동할만한 성인이니 그녀가 그렇게 행동한다고 해서 고우가 서럽다던가 서운하다는가 하는 감정을 느끼는 건 분명 온당한 처사가 아니란 것 쯤은 고우도 알았다. 분명-알고 있었다.
알고 있다는 건 이해한다는 단어와 얼마나 먼 걸까. 얼마나 가까운 걸까.
지독하게 피곤했고 지독하게 멀미가 난다. 하지만 지독하다는 단어를 제게 적용할 정도로 육체적으로 피로한 것도 아니었다. 온통 꼬여버린 생각들은 제대로 된 수순 없이 뭉쳤다가 풀어졌다가를 반복하며 온통 검고 복잡하게 얽혀져 있어서 그 끝이나 순서를 제대로 잡지 못하게 했다. 문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단어들에 대한 탄식으로 눈가가 시리다. 아. 사무치는 것들 중애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다.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 쯤이었다.
작은 발소리와 비슷한 것이 들린다 싶더니 삐긋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두웠던 공간으로 빛이 새며 파고들었다. 복도의 연록색 보조등 빛은 그리 밝기가 진하지 않음에도 제대로 된 조명이 꺼져있는 공간에 자취를 드러내는 것 정도는 쉽사리 이뤄냈다.
키리코일까, 아니면 신노스케-? 빠르게 지나가는 두 얼굴이 있었지만 빛을 등지고 서있는 인영의 정체는 두 사람 모두 아니었다. 고우는 입가를 가리던 손가락을 더 뻗어 진득하게 얼굴을 누르며 터지는 한숨을 지그시 눌러 삼켰다. 차마 삼키지 못한 것들 중에서 불쾌감이 눈매에 번진다. 아, 보고싶지 않은 얼굴이다.
"체이스"
입밖으로 나온 이름마저도 곱게 들리지는 않았다. 제 귀에도 그렇게 들렸으니 녀석의 귀에도 그렇게 들렸을 것이며-그 결과를 바라고 있기도 했건만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하는 건지 체이스의 얼굴은 평온해보이기 그지 없었다. 로봇 같은 놈, 불쾌하기 짝이 없다. 아아, 실제로도 인간이 아니었던가, 고우는 어둠에 감사했다. 지금 제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 지 빛 아래에서 확인하고 싶지 않다. 적어도 평상시의 제가 바라던 형태는 아니겠지. 아아, 하지만 밝았다면 조금 더 체이스를 불쾌하게 만들 수는 있지 않을까.
문이 닫혔다. 체이스는 희미한 기계의 빛들 속에서도 분명하게 제게 다가섰다. 체이스의 윤곽이 푸르스름하고 보라색으로 물들어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는 것 같다 싶더니 소파 위에 내려 놓은 것은 케이크 한 조각이었다.
"키리코가 전해달라고 헀다."
누구 맘대로 키리코라고 부르는 건지. 대놓고 적의를 보이는 표정이 보이지도 않는지 여상한 어조로 말해오는 체이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아군에 들어선 마당에 심술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마냥 투정을 부리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다.
"받았어, 돌아가."
고우는 고조되는 감정을 눌러 삼켰다. 개심, 개심, 개심, 이전의 생각의 연장이 자꾸만 체이스에게 이어진다. 악당이잖아, 로이뮤드에 있었다고 하잖아, 키리코를 구했다고 하지만 결국은 정말 이전의 일이고 그 이후의 로이뮤드들의 범죄에는 방조하고, 혹여 일조하고, 심지어 돕고 협력하고-그런 녀석. 개심, 마음을 바꿨다고, 쉽게 아군이 된다고, 사람을 지키겠다고-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뻔뻔하게, 아-정말로 그렇게 뻔뻔해도 되는건지. 정말로 이렇게 쉽게 용서받는 것인지.
그 모든 것들이 가소로워서. 분해서.
"왜 안가지?"
금방이라도 체이스에게 쏟아낼 것만 같은 이 난폭한 감정들을, 어떻게 해야하는 지-할리박사님도 벨트씨도 키리코도-신노스케도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정말 모르겠는데.
"고우, 마하-"
눈앞에서 체이스 네가 사라지면 좋겠다.
"너는 내가 싫은가."
싫어하고 있다. 정말 미안하지만, 사실 미안하지도 않지만, 고우에게는 그를 싫어할 이유와 변명들이 몇 개나, 몇 십개나 있었고 심지어 그것을 늘여낼 수도 있었다. 줄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왜?
"우리는 이제 동료다, 친구가 되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체이스를 싫어하고 싶다. 할 수 있다면 계속. 아마도 사람들은 허락하지 않겠지만, 모두는 그것을 바라지 않겠지만 고우 본인은 그것을 바라고 있다.
"노력하겠다. 고우."
노력하고 싶지 않아, 사실은. 얼굴도 보고 싶지 않고-이런 체이스가 그저 뻔뻔하고 불쾌하다. 그래서-그 노력하겠다는 단어에 치밀어 올랐다. 노력, 그 노력-도대체 그 단어가 뭔데. 노력하면 모든 게 달라지디? 생각도 바뀌고, 정의도 바뀌고, 아군도 적군도 바뀌고? 그것 참 대단하네. 아주, 정말, 대단하시네.
챙그랑, 삼키지 못한 것들이 행동이 되어 나타났다. 접시와 케이크는 쉽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뭉게진 케이크, 금속포크는 바닥응 몇 번 튕기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공기를 찣고 지냈다. 체이스의 눈동자가 크고 동그랗게 변한다. 연두색의 불빛에 비춘 눈은 놀랐다는 형태 속에서도 무기질을 감추지 못했다. 그 모든 게 짜증스럽기만 하다.
"알았으니까, 돌아가."
더이상 감정을 표출하고 싶지 않다. 꾹 눌러삼킨 목소리로 전한 진심에도 체이스는 몸을 숙였다. 케이크를 담는 동작에서는 어떤 놀람이나 당황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치우겠다는 생각인 것 같은데 그럼에도 체이스가 제 앞에 있으면 지금 이 모든 것들을 그 탓으로 돌릴 것만 같다.
"놔두고-돌아가."
"하지만 이걸 보면 키리코가 슬퍼할"
"알겠으니까! 닥치고 돌아가라고-!"
사실 알고 있다. 체이스에게 감정을 쏟아낼 것 같아서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사람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그저, 누군가를 본다면 지금 이 엉킨 것들이, 제게 쏟아져내릴 것이란 걸-알고 있었으니까. 정말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은 체이스에게 이렇게 감정을 토설할 이유도 체이스가 그것을 감당해주어야 할 의무도 없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제발."
마지막 말은 한숨같이 들렸다. 끄윽, 고우는 고개를 숙였다. 양손을 붙잡은 얼굴 속에서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끄윽거리는 감정들이 꾸역꾸역 붉고 뜨겁게 치밀어 얼굴을 달군다. 눈이 아프게 저며오고 머릿 속이 어지러웠다. 아, 차라리 울 수 있으면 좋을까. 그렇다면 나아질까. 하지만 체이스, 이 녀석의 앞에서는 울고 싶지 않은데.
"?!"
얼굴을 감싸는 것이 있었다. 서늘한 옷의 질감, 단단하게 죄여오는 팔-사람의 것과 꼭 닮았지만 조금 더 서늘하게 느껴지는 체온, 머리카락 위로 쏟아지는 머리카락, 얼굴에 닿는 이질적인 머리카락의 감촉, 쉽게 인식했지만 부정한 뒤에 한 박자 더 느리게 다시 알아차리는 존재감. 감싸안긴다. 부정하고 싶은 존재에게.
"너-"
"괜찮다, 고우."
무엇을 던질까 확정하지 못해서 던지지 못한 질문에 생각하지 못한 답변이 돌아온다. 뭘 안다고, 아무 것도 모르는 존재이면서, 등신같이 이용이나 당하고 중학생 꼬맹이마냥 병신같은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는 머저리 같은 녀석이면서, 그런데 체이스 너는 왜, 어떻게.
"괜찮다."
체이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서-고우는 잠시 눈을 감았다. 어둡다. 아직도 어두운 공간, 좀전까지도 치밀어 분노를 가중시키던 존재가 더 해졌으니 더더욱 바닥으로 향해야할 마음인데도 이상하게 아까보다 조금 더-나아진 것 같은 건 착각일까.
고우는 눈을 떴다. 양손으로 체이스를 밀어내자, 금방까지 힘을 주어 안았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쉽게 떨어져 나갔다. 체이스는 여전히 가만한 표정이었다. 뜻모를 얼굴-, 정말 모르겠는 녀석.
"앞으로 이런 행동 하지마. 여기도 내가 치울테니까 나가고."
"하지만-"
"아니."
"알겠다. 가보지."
차라리, 계속 그를 미워할 수 있으면 좋겠다. 뒤돌아서는 그를 보며 고우는 작게 욕소리를 뱉었다. 체이스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등신에 머저리 같은-정말로 그렇게 느껴지는 저를 향한 욕소리, 고우는 체이스에 대한 불쾌하고 불유쾌한 감정들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절실함을 담아서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아 이제 다시 혼자-고우는 그렇게 제게 다시 돌아온 어둠 속에 주저앉았다.
엉망으로 뭉개진 케이크의 우유향이, 바닥에서도 타고 올라 연하게 코끝을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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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체이...고우체이...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