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이키리] 감히, 약속
와작, 얼마 남지 않은 감자칩 한 조각이 소리를 내며 바스라졌다.
며칠 전 키리코가 전해준 작은 TV에선 동물에 대한 채널이 나오고 있다. 체이스가 의도한 채널은 아니었지만 틀어 두고는 찾게 되는 빈도가 높다. 사람을 더 많이 이해하기 위하여-라는 명목을 붙이고 시청을 시작한 동기에 더하면 동물 채널을 보고 있는 것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다른 채널은 너무 어렵기도 하고, 이따금 나오는 오늘의 귀여운 영상 코너는 조금 좋아하니까 괜찮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프로그램은 역사에 대한 다큐멘터리였다. 처음은 놓쳐서 이름은 모르는 작품 속에서는 사자 몇 마리가 사슴 한 마리를 쫓는 것을 비추고 있었다. 이내 사냥이 성공하는 장면을 끝으로 화면은 빠르게 바뀌어 검은 배경에 앉은 중년 남자의 모습으로 변했다. 남자는 두툼한 손가락을 깍지를 끼고는 흥미롭게는, 이라는 단어로 입을 연다. 그런 시작인데도 흥분하지는 않은 듯 침착한 어조였다.
길고 어려운 한자로 쓰여진 이름과 그 이름만큼 긴 부연 설명은 그가 생태문화연구가라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체이스는 상단의 그 이름을 빠르게 읽다가 조금 어려운 한자여서 당황할 즘에 이름이 사라져 가볍게 포기했다. 어차피 그큰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종족이 시작하여 영유한 그 기나긴 시간 속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동물과 다른 객체성을 정의내리게 된 시점은 언제였을까요. 저는 감히, 그 시작을 이름, 명명이라는 행위에서 찾고자 합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사냥에 성공한 암사자들이 이전의 전투에서 획득한 커다란 사슴의 몸뚱이에 주둥이들을 묻고 있었다. 붉은 피와 내장이 보임에도 모자이크가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사실이 체이스를 조금 의아하게 만들었다. 분명 일전에 신노스케, 키리코와 함께 본 영화라는 매체 안에서 인간이 살해되던 장면에서는 모자이크가 되어 있었는데. 같은 죽음과 시체인데 어째서 그 표현이 다른 것인지 의아하기만 하다. 와그작, 의문 속에서 흩어지는 감자칩이 또 한조각.
[이전에 언어가 발견되고 나서도 한참 동안,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늙은 암컷, 젊은 암컷, 늙은 수컷, 우두머리, 따위의 객체가 아닌 그룹으로 불려졌을 겁니다. 네. 마치 조금 전의 짐승과도 같이 말이지요. 하지만 이름이란 것이 등장하면서 각자의 존재를 정의 내리게 되었다.-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늙은 암컷이라는 통칭으로 수 많은 여성이 서로 구분되지 않았다가, 각각의 개체, 단 한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의 이름, 그 하나의 이름을 부여 받는 행위 속에서, 한 사람의 인간은 그저 동물로 존재하는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며, 이름을 가지게 됨으로 비로소 한 인간으로서의 정의가 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감자칩이었나. 내용물이 빈 봉투를 접어 휴지통에 넣고는 TV의 전원을 껐다. 그저 시간 내에 정보를 습득하기 위한 TV 감상이었으니 계속되는 감상도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의미, 인식, 이름, 그 긴 문장들 중에 완벽하게 납득한 것은 희박했다. 길게 남은 몇 가지의 단어들의 끝에서 마지막에 체이스에게 남은 단어는 이름이었다. 이름...그 단어를 다시금 되뇌이다가 몸을 일으켰다.
[감히, 약속]
-for 레스타트님
2016 05 07
특별할 것 없는 여상한 날이었다. 아, 어쩌면 특별한 일이 없음에도 체이스가 이 곳, 특상과에 방문해 있는 것이 특이하다면 특이하다 싶을까? 그 또한 최근에는 방문이 늘어서 특이하다 부르기에는 조금 부족한 느낌이 있다. 그럭저럭 조용한 날이었다. 신노스케는 수사 1과에, 린나도 자리를 비웠고, 과장은 딸이 싸주었다는 도시락을 일찌감치 해치우고는 이른 오수를 청하고 있는 모양이다. 큐의 타자 소리만이 잔잔히 울리는 한적한 공간 속에서 체이스는 잠시 시선을 돌리다가 아마도 신노스케가 가져다 두었을 바이크 잡지를 손에 집었다.
바이크를 특별하게 좋아한다고 느끼는 건 아니지만 역시 달리는 것은 기분이 좋다. 공기를 가르는 느낌, 빠르게 지나치는 풍경들, 사람들이 후련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그 바람에서 오는 상쾌함 때문일까. 달리는 순간에야 비로소 제가 답답함이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기묘한 인식.
문득 느껴지는 움직임에 고개를 돌리자 큐가 가까이로 향했다. 잠든 과장을 배려하는지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는 얼마 전 체이스에게 나눠준 감자칩이 마음에 들었는지 묻기에 체이스도 마찬가지로 목소리를 작게 줄였다.
"조금 짠 맛이 났다."
"응, 조금 그렇긴 했지. 오늘은 치즈맛으로 챙겨뒀으니 돌아갈 때 가져가."
"고맙다."
"별말씀을."
큐, 엄밀히 말하면 경찰청의 소속이 아니라는 이 남자는 로이뮤드라는 종족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부정적인 반응을 어쩔 수 없이 내비치곤 하는 특상과 내에서도 드물게 체이스에게 친밀함을 보이고 있었다.
그 행동은 어째서일까, 언젠가 신노스케에게 그 까닭을 물었지만 시원치 않게 고개를 저어 보이기에 큐에게 직접 물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마땅하게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은 큐도 마찬가지었다. 다만 언젠가 큐와의 첫 만남에서 그가 언급했던 로이뮤드의 존재에 대해서 희미한 의미를 찾을 뿐이다. 그 개체는 분명 저와의 공통점이 없었는데도-단 한 체의 로이뮤드가 인간 하나가 종족 전체를 대하는 태도 자체를 바꿨다는 그 자체가 체이스에게는 조금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곤 했다.
지금도 문득-스치는 큐의 시선에 묻어나는 씁쓸한 감정들에는 더더욱.
"저기, 오늘 점심-"
"좋은 오후~아, 체이스!"
우물거리던 큐의 목소리를 가르며 인사소리가 들려왔다. 키리코, 그녀의 목소리-문은 어떤 방법으로 열었는지 제 상체를 뛰어 넘는 크기의 커다란 서류박스를 든 그녀가 위태로운 걸음으로 들어선다. 안쓰러운 움직임에 체이스가 다가서 그녀의 손에서 박스를 잡아 제가 들었다. 썩 무거운 무게는 아니었다. 그가 박스를 탁자로 옮기는 사이에 큐는 종잡을 수 없는 동작으로 위 아래로 손을 움직이다가 화들짝 놀라며 제 자리인 모니터 뒤로 주춤주춤 돌아갔다. 아마도 저도 돕고 싶었던 모양인데 그는 행동이 조금 느린 편이다.
"고마워, 체이스."
"? 별 일 아니다만."
"아니. 그냥."
특별히 감사를 받을 일이 아닌데 인사를 받으면 조금 난감해진다. 이런 일에도 쓸만한 적절한 표현이 있으면 좋으련만 또 적절하지 않은 반응으로 대꾸해버렸나, 하는 뒤늦은 후회 속에서도, 저를 향해 키리코의 얼굴에 지어진 웃음은 또 지나치리만치 아름다워서 또다시, 마음의 한 켠이 아렸다.
그래, 아리다, 아픔과 닮았지만 즉각적이지 않고 안쪽에서 번지어 이따금 올라오는 이 고통에 대해 큐가 찾아준 그 단어는 울림마저도 쓰리게 공기에 흩어지고는 했다. 키리코의 웃음을 마주칠 때마다, 큐가 머뭇거리는 친절과 안타까운 시선을 이따금 보일 때마다, 신노스케가 자신에게 로이뮤드인 존재로서 가능한 것들에 대해 넌지시 건네는 말의 끝소리에서도, 정도와 방향은 다르지만 어딘가의 속에서-어쩌면 코어 안쪽에서부터 깊이 울리는 아픔들, 정말 이 모든 아린 것들이 같은 아픔인지, 같은 감정인지 구분지을 수도 없지만 아직은 모르는 것들을 큐의 상냥함에 대한 답례로 아직은 아리다고 부르고 있다.
"점심 먹었어, 체이스?"
"아니."
"그럼 조금 늦었지만 같이 먹으러 내려갈까!"
점심이라는 단어에서 자연스럽게 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분명 키리코가 들어오기 직전에 그가 점심이란 단어를 입에 담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데도. 극렬하게 고개를 휘저으며 손으로 엑스자를 그리는 큐의 행동을 보면 부정의 의미인 모양인데 왜 구태여 말로 하지 않고 저런 방식으로 표현을 하는 것 인지 까닭은 알 수 어렵다.
"그럼, 가지."
"응."
큐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긍정의 수신호를 보냈다. 화창하게 웃는 큐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키리코와 함께 행동하는 것이 큐가 바라던 행동이란 것은 알았지만 어떤 경로로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 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상태로 고개를 돌렸다. 인간의 모든 행동을 이해하기에는 아직은 배움이 모자라는 걸 보면 슬슬 동물 채널이 아닌 다른 채널을 선택해야 하는 걸까? 잠깐 생각해보긴 했지만, 역시 오늘의 귀여운 영상 코너는 포기하기 조금 아까웠다.
"체이스-이것 봐, 창 밖에 날씨가 제법 좋지?"
"그렇군."
"어제는 무슨 일을 했어?"
"그냥-순찰과, TV시청 정도일까."
"아 TV 봐주었구나. 중고품이긴 하지만 그래도 잘 작동하지?"
"그래."
"좋아하는 채널도 있어?"
"음-동물채널일까, 특히 귀여운 영상이라는 코너가 있는데 토끼와 고양이가-"
"풋"
"응? 왜 웃지?"
"아니 좀 귀여워서, 계속 말해줘, 체이스."
"귀엽다? 의미를 모르겠다. 그 밖에는, 그래-아침에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이름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전부 본 건 아니었고- 설명해줄 만한 이야기는 하기 어렵군. 그래, 이름이 어려운 남자가 나왔다."
"이름..."
키리코는 웃음을 지운 얼굴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창을 등지고 빗겨선 그녀를 따라 체이스 또한 걸음을 멈췄다. 정오를 지난 햇빛은 비스듬히 키리코의 등 뒤에서 비춰지고 있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섬세한 이목구비가 어쩐지 후련하지는 않은 표정을 하고 체이스를 향한다. 속눈썹의 떨림, 빛의 흔들림, 어쩐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도 같지만 착각이리라.
"체이스."
"그래."
"체이스에게 성은 없지?"
"큐는 따지면 체이스 스타인벨트-가 아닐까라고 말했지만 부정한다. 본래의 이름이라면 프로토 드라이브 정도가 적당할까."
"그건 지칭이지 호칭이 아니잖아."
일전에 이 주제로 큐와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는 아마도 저와 지냈던 로이뮤드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못했던 것에 약간 미련이 남았던 기색이었다. 큐와는 농담 삼아 주고 받았던 말들인데 어째서 키리코는 자신의 호칭에 대한 대화에서 이토록 괴로운 듯 미간을 좁히는 것 인지에 대해선 이해하지 못했다. 저는 애초에 인간이 아니니 인간과 같은 형식의 이름은 가지고 있지 않고 앞으로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 명백했다.
이전의 큐와의 대화에서 신노스케도, 그와 함께 있었던 크림도 그저 웃었을 뿐 큐의 그 스타인벨트라는 발언을 크게 부정하지 않은 이유 또한 까닭 없이 납득하고 있었다. 아마도 크림은 제게 스타인벨트라는 성을 허락하지 않을 테니 그 이름은 그저 농담일 것이다. 그 사실은 체이스도-크림도-신노스케와 큐까지 모두 알고 있었기에 결국 농담처럼 의미 없이 흩어졌건만, 키리코 만은 마치 이 언급을 불쾌한 것으로 느끼는 것 같은 반응을 보인다.
무언가 또 잘못 말했을까. 하지만 어디에서? 체이스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표정을 정리한 키리코가 수척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뱉어진 목소리는 그다지 괜찮은 듯 들리지는 않았다.
"저기, 체이스."
"말해라."
"모든 전투가 끝나면-성, 그러니까 가족의 이름, 내가 주어도 될까?"
"의미를 모르겠다만."
키리코가 웃었다. 그녀가 손바닥을 내어 보이며 한 손을 내밀기에 혹시나 싶어 마주 내밀자 그녀가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다. 내밀어진 손바닥 위에 키리코의 손가락이 획을 그린다. 시-지-마-그리고 이어지는, 체-이-스, 낯선 단어의 연결에 키리코의 앞머리칼 사이, 가려진 시야에서 의미를 알아보려 하지만 단어가 끝난 뒤에도 키리코는 어쩐지 고개를 들지 않고 잠시 멈춰 있었다.
체이스의 이름 끝에서 멈춰선 손가락이 가만히, 손바닥에 남겨져 있다가 아쉬움을 남기며 느릿하게 떨어지는 과정을 잠시 눈으로 쫓다가, 뒤늦게야 제게 향한 키리코의 얼굴이 희미하게 붉어져 있는 것을 알았다.
"무슨 글자인지 알겠어?"
"체이스지 않나."
"앞에 있던 건?"
"시지마?"
"이어서, 말해줄래?"
"시지마-체이스."
"한 번 더."
"시지마 체이스."
납득할 수 없는 두 단어의 나열 인데도 키리코가 소리 내어 웃었다. 공기를 울리는 맑은 웃음소리는 어떤 망설임도, 고통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이 구름 없는 하늘 만큼이나 청명한 색을 하고 있었다.
"그 이름, 내가 줄게. 고우는 조금 반대할지도 모르지만-분명 그 아이도 이해해 줄거야!"
"그런가."
"응. 모든 전투가 끝나면. 과장님도 분명 체이스의 공로를 인정해서 도와주실테니까."
"끝..."
키리코는 서둘러 말을 끝내고는 빠르게 앞으로 달려갔다. 끝, ㄹ로 울리는 마지막 울림 속에서 체이스는 언뜻 불안한 감정을 느꼈다. 키리코의 바람이란 건 그녀의 표정을 보면 분명 아름다운 일이겠으나 어쩐지 제게 닿기에는 머나먼 것으로 느껴졌다. 크림, 그조차도 주지 못한 가족의 이름을 키리코라는 일개의 개인이 제게 줄 수 있을까. 그런 것, 정말 가능한가. 체이스라는 호칭 조차도 인간이 준 것이 아닌데-
"체이스?"
키리코가 뒤돌아선다, 저를 부른다. 로이뮤드가 지어준 이름임에도 그녀의 입술에서 뱉어지는 이름의 어감은 인간의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 사실이 체이스를 조금 안도하게 했다. 그래, 키리코의 말들도 나중의 나중을 전제한 것일 뿐 당장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런데도.
어쩐지 마음이 다시 아렸다. 두근거린다.
이름, 성, 두가지로 구성된 사람의 이름. 신노스케와 같은, 고우와 같은, 큐와 같은 형태의 구성으로 된 이름-그걸 받는다면 무언가가 달라질까, 커다란 변화가 제게 일어날까?
[한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의 이름, 그 하나의 이름을 부여 받는 행위 속에서, 한 사람의 인간은 그저 동물로 존재하는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며, 이름을 가지게 됨으로 비로소 한 인간으로서의 정의가 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침에 들었던 문장이 떠오른다. 이름이라면 이미 가지고 있음에도 키리코가 제게 다시 이름을 준다면, 그렇다면 저는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인지, 아직 명확하지는 않지만 혹시나 그 이름을 받으면 인간으로서의 정의가 세워지거나 하는 극명한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을까.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 아직 온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키리코가 웃고 있으니까, 분명 이어질 일은 괜찮을 것이라는 근거가 약한 확신으로, 아직 오지 않은 날을 기다리며-
"그래, 가지."
그렇게, 나중에의 약속을 남기던 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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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연성, 체이키리, 정의 키워드로 연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