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2018. 3. 14. 22:47

[발신인 불명]

-for 민또님


2018 3 14






[2017년 11월 11일]



 유독 지친 하루였다.

 치카게 라이카는 계산을 끝낸 장부를 접고 금전보관함의 문을 닫으며 뻐근한 어깨를 다독였다. 사람은 정말 너무 쉽게 지친다. 

 물론 그런 나약하고 연약한 신체로 살아간다는 점마저도 아름답고 어여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지친 것은 지친 것이고 몸에서 울리는 삐걱거림에 불쾌함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어서, 백색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사이에 자리한, 손님들에게서는 온화하다는 평을 자주 받는 라이카의 눈매가 일순 짜증을 섞어 일그러졌다.


 '목욕이라도 해야 할까.'


 그 뒤에 떠올리는 것은 라이카의 집, 욕실에 자리한 작고 자그마한 욕조가 아니었다. 너무 쉽게 떠올려지는 붉은 강. 어두운 하늘, 그 연상을 사진으로 옮겨 보여준다면 지옥의 강가 같다 평할 듯한 생경한 풍경을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던 라이카의 입매가 조금 굳어졌다.


 유용함이란 단어를 넘어 필수 적이란 것은 알고 있으나 치카게 라이카는 '그 장소'를 그리 기호하지는 않는다. 넘실거리는 것의 색이 제가 좋아하는 먹이의 색을 빼어 닮았음은 확연하나, 그 건조한 말라붙음을 피부로 채우는 행위에서 오는 쾌감이, 사랑해 마지 않는 섭취라는 행위에서 오는 감동과 근원과 향이 닮아 있다는 것이 불쾌한지도 모른다.


 그리 아름답지 않은 감정으로 머리카락을 넘기다가 문득 이상함을 깨닫는다. 요즘, 짜증이 늘지 않았나. 아득한 시간 동안을 어여쁨과 사랑으로 살아가서 매일이 행복하던 치카게의 삶에서 짜증이란 것은 흐릿하고 가볍고 쉽게 흩어지는 순간들이었는데, 지금에야 인식한 것이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늘었다. 확연하게.


 이마를 짚은 치카게가 기억을 더듬는다. 작년까지는 확실히 괜찮았다. 봄까지도, 그렇다면-



 -♪♪♪♪



 상념을 끊어내며 전화벨이 울렸다. 가게의 전화인가 싶었지만 휴대폰이란 것을 음으로 알고 챙겨두었던 가방을 급하게 열어 스마트폰을 꺼냈다. 가방 안에 있던 전화음은 확실해졌다. 라틴 풍의 벨라 루나. 기본음이었던 것을 조작하다가 고개를 들어 흐릿하게 웃던 얼굴을 떠올리느라, 한박자 느리게 전화를 받았다. 인사를 하기 전에 쇳소리가 섞인, 낮은 목소리가 느릿하게 들려왔다.



 [아, 주무시는가 싶어 전화를 끊을까 했는데. 너무 늦은 시간인가요.]


 "이미 전화하고 물어 무엇하니."



 다 큰 성인이 10시 반에 수면은 무슨, 공연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이렇게 이른 시간이 아닌가. 힐끔 시계를 보던 치카게는 얇은 코트를 다시 벗으며 카운터에 앉았다.


 

 [그도 그렇군요, 제가 좀 서투니 이해하세요.]


 "나는 충분히 널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단다."



 부드럽게 달래듯 대답하는 말이지만 치카게의 진심이기도 했다. 전화 너머의 그럼요, 하고 말하며 쿡쿡하고 웃는 소리는 얕은 잔상을 남겼다. 어쩐지 그 얕은 웃음소리는 조금 무거웠고, 소리 뒤에는 치카게에게 얕은 생채기를 남겼다. 사실인데, 정말인데. 정말이란 단어를 쓰기에도 안타까울 정도로 분명히 노력하고 있는데.


 그 모든 순간에 참아 삼킨 속엣말을 전부 내어 보이면 어떨까, 그 뒤에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치카게는 시리게 배가 고팠다. 저녁을 먹지 않아서만은 아니다. 이 느릿한 목소리는 허기를 동반했다. 참는 것에도 노력하는 것에도 익숙할 정도로 익숙한 저를 낯설게 만들 정도의 허기가. 진득하게, 따라 붙었다.



 "무슨 일 이니."


 [그냥, 생각나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오늘은 어떠셨습니까.]



 진열대에 몇 남지 않은 화과자 만큼이나 달작한 말이었지만 그 허울과 껍데기에 흔들리기에는 그를 안 시간이 너무 길어서, 치카게는 늘 그랬듯이 달짝지근한 말을 흩으며 가벼움을 가장해 말투를 만들어 냈다.



 "엄청 바빴단다. 포키데이지 않니. 도대체 빼뺴로나 먹을 날에 왜 달달하다고 이 가게까지 찾는 지 모르겠구나. 아침 부터 밤까지 바빠서 의자에 엉덩이도 붙이지 못해서, 이런 날이 다 사라졌으면 싶었단다."


 [그거 이상하군요, 당신이라면 기뻐하는 사람들의 기뻐하는 모습에도 사랑스럽다 어여쁘다 하실 줄 알았습니다만.]



 그래, 참으로 이상하다. 분명 그런 날들이 압도적이었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들어오는 어린 것들,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고아한 말투를 꼭 닮은 노부부의 상냥하고 따뜻한 대화들, 그 모든 것들이 사랑스럽고 어여쁘고 고운 것에는 변화가 없었으나 이따금 짜증과 허기가 돋았다. 그 치들을 먹고 싶은 것은 아니다. 주면 거절하지는 않겠으나 최근에는 주린 것이 줄었다. 주린 것은 사실인데 주리지 않다. 짜증이 치밀고는 했다. 이게 아닌데. 바라는 것도 명확하지 않은데 치밀어 불쾌한 것들이 몇 번이고 일어났다.


 짐작이 아예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정하기 싫은 것도 있겠지. 머릿 속에서 구르는 것들이 뾰족함이 되어 목소리가 저절로 날카로워 졌다.



 "네가 내 무얼 알고."


 [그럼요, 소인은 치카게씨를 모르지요.]



 받아내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오히려 아팠다. 사실은, 사실은 아프지 않은 순간이 없다. 화과자 처럼 달아서 혀가 아릿하다가 말차보다도 씁쓸하고 아프게 입안을 후비는 것 같아서, 이따금 대화라도 하거나 문자라도 오가는 날이면 치카게는 따끔거리는 고통에 몇 번이고 대화를 되새기며 일상을 멈춰야만 했다. 그보다 아픈 것은 그런 말 쪼가리라도 없는 시간들이다. 고통스러운데도 사라지면, 멈추면, 그 쪽이 더 아플 것 같아서, 깊이도 없이 얕게, 단어가 오간다.


 그럼에도 가끔, 깊게 베이는 것은 아마도 그가 말을, 글을 다루는 사람이기 때문이겠지.


 저는 칼이 좋았다. 차라리 네가 칼로 대화한다면 대화의 순간들은 이리 날카롭진 않을까, 일반론과는 다른 것들을 가정하다가 칼조차 다루지 못하게 된 그의 손을 떠올린다. 입안이 달았다. 지친 탓이리라.



 "그래, 너는 어떠했니, 기념일을 즐겼니."


 [즐기지는 못했습니다만.]


 "어찌하여."


 [글쎄요, 은애하시는 분이 기념일 같은 것을 기호하지 않아서.]



 짤막한 침묵이 스쳤다. 은애라고 했나, 달 아래에서 그리도 상냥하고 예쁘장하게 미래니 약속이니 하는 말들을 주워 섬기고는 은애라, 사랑같은 말을 무섭지도 않게 입에 담는다. 전화로 이어져 있는 상대가 누군줄을 알고 겁도 없이, 상대의 이름을 알면, 내가 어찌할 줄을 알고, 실로 건방진 자다. 하지만, 그리 생각하는 중에도 치카게는 동시에 알았다. 누군지 알면, 내가 먹을 수 있을까. 해칠 수 있을까.


 네가 은애하는 사람을, 내가 어찌 해칠까. 그러면 너는 나를 괴물로 볼텐데.


 괴물로 살아가는 삶이 지독한 것은 아니다. 저는 행복하고 기쁨에 찬 괴물이었고 삶의 나날은 아름답고 어여쁜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네가 은애하는 자가 그 날들을 사랑하게 된다면 좋겠구나."


 [네, 실로.]



 내뱉는 말이 진심이 아니었는데도, 돌아온 말이 진심 같아서 무거웠다. 뾰족하고 둔탁한 것들이 머릿 속에, 마음 속에, 또는 몸에 굴러다녔다. 돌구르는 소리가 난다. 아마도 지친 탓이리라. 의례적인 말들을 몇 마디 주고 받다가 검게 변한 액정의 스마트폰을 테이블 위에서 밀어두고 엎드렸다. 지독하게 몸이 무거웠다. 감기에 걸리지 못하는 몸으로 치카게는 감기약을 꺼내 삼켰다.


 목에 걸렸다가 넘어간 뒤에 남겨진 쓴맛마저도, 약의 흐릿한 향마저도 떠오르게 하는 것이 같아서 속이 아리다.



-



 왜, 그 날을 떠올렸을까, 아마도 오늘이 같은 기념일이었기 때문이다.

 연인들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정해 특히 사랑을 위해 보내기로 정한 날, 사람들은, 인간들은 오늘도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사랑스러운 말들을 하며 치카게의 가게를 찾았다. 라이카는 상냥한 얼굴로 사랑스러운 사람들을 응대하고 축복의 말을 건네는 중에도 몇 번인가 가게를 닫고 싶다는 충동을 삼켜야 했다.


 이전에는 알아차리고 나면 달라질 줄을 알았다.


 그래서 채근하며 마지막으로 기울어가던 너를 붙잡고, 어린애처럼 몰아 붙여서 대답을 들었다. 끝을 바랐다. 행복이라고는 가정하지 않았지만 그 반대라고 하더라도 끝내지 않으면 고장난 허기가 영영 고쳐지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에 내몰려서 안달이 났다. 혹시나, 설마, 하며 맞이한 그 날은 최악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말하던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연결된 모든 날들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접어두기로 했다.


기대했다가 버렸다가, 그리고 다시 떠올리는 모든 날들은 천국인 동시에 지옥 같았다.


 돌이켜보니 조금 더 네가 솔직했다면 좋았을 것 같다.


 어여쁘지 않아도 좋으니, 달지 않아도 좋으니, 살아서 그저, 이 앞에 서서,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작년의 그 날처럼 전화라도 걸어주면 좋겠다. 웃어주면 좋겠다.


 빈 가게는 불을 이미 꺼서 어두웠지만 치카게에게 어둠은 몹시도 익숙한 것이어서,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다가 카운터 아래에 넣어두었던 택배 상자를 하나 꺼내들었다.


 수취인 치카게 스미레님 귀하. 사인을 지켜보던 택배원이 본인이 아니지 않나. 하는 얼굴로 올려다 보다 귀찮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것을 기억한다. 발신인은 불명이지만 누가 택배를 붙인 것인지는 알만했다. 창백한 얼굴로 그 사람 뒤치닥거리가 생각보다 힘들다며 푸념을 늘어놓던, 마르고 예쁘장한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다가 손톱으로 테이프를 그었다.


 지이익-


 쉽게 뜯기는 테이프 사이로 보인 것은 분홍 벚꽃이 압화된 고운 카드였다.

 역시나 보낸 이의 이름은 없다. 카드를 치우자 연보라색의 자수가 곱게 놓인 하얀 가디건이 접혀 들어 있었다. 펼쳐들자니 라이카에게는 조금 클까 싶은 크기의 가디건에 수놓인 문양은 제비꽃의 모양을 하고 있다, 그렇지, 언젠가의 날에 너는 내가 봄 같다 말했다. 그것이 라이카를 말한 것인지, 아니면 스미레를 말한 것인지 물을까 싶다가 묻지 못한 순간이 있었다.


 라이카는 떠올린다. 너무 많은 기억들이 식간에 지나가 일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묻지 않은 것들에도 너는 이따금 답해왔다. 때로는 바로, 때로는 한 박자 느리게, 때로는 - 이토록 사무치는 순간들에.


 떨리는 손가락으로 카드를 열었다.


 [은애하는 당신이 모든 날들을 계속 사랑하기를]


 유려한 글씨체에 치카게는 카드를 구겼다. 지독한 기만이었다. 동시에 청원이라는 것도 알았다. 진심이란 것도 알았다. 하지만 들어줄 수 없는 청이기도 했다. 어째서 존재하지 않음에도 너는 아플까. 잘도 남은 시간을 말할까, 어떻게 감히. 치카게 라이카의 입매가 일그러진다. 끔찍하다. 사랑스럽다가 사랑스럽지 않다가 다시 돌아 사랑스럽다.


 실로, 지독하고, 실로 달고-실로 사랑스러운.


 


 내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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