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김탈수



Criminal Rec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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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누군가 파티를 한다면 소품으로 종이꽃가루를 사용하는 것은 절대로 추천하지 않으리라. 분명히 지난밤에도 오늘 아침에도 전부 쓸어버린 것 같은데 어떻게 시선을 피했는지 이불에 묻어있는 사각의 분홍색 종이를 떼어 버렸다. 발견해서 버린 게 이걸로 두 자리가 넘는다, 간밤에 버리면 아깝다고 아내가 억지로 먹인 케이크만큼 완전히 물려버렸다.

곧 비워질 1인실의 병실은 청결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병원 특유의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는 어쩔 수 없긴 하다만 가라앉은 공기는 오렌지 향에 섞이고 습기를 제어하는 공기청정기는 일정한 간격으로 제가 일하고 있다는 소리를 낸다.

지금은 이렇게나 조용하지만 지난 저녁만해도 이 병실 안에선 요란스러운 파티가 진행되고 있었다. 병원에서 열린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만큼 활기차고 즐거운 파티였다. 향기가 진한 꽃을 장식할 수 없다는 말에 파티에 꽃이 빠지면 안된다며 젊은 간호사가 접어온 커다란 꽃 장식들이 병실의 벽과 천장을 장식되고 그 사이를 색색의 풍선이 채웠다. 케이크는 특제로 주문한 3단이었다. 아이들과 부모는 자잘한 선물을 남기고 오늘의 주인공인 아이에게 퇴원을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말했다. 환자복 위로 분홍색 가디건을 걸치고 은색 왕관을 쓴 아이는 어느 왕국의 공주마냥 제가 쏟아지는 사랑을 거부하지 않고 기껍게 즐겼다. 솜씨 좋게 접힌 종이꽃들은 아내도 다른 가족들도 버리기엔 아깝다고 말하며 가져가고 싶은 아이들에게 소율이 쥔 두 송이만을 남기고 전부 나눠주었다. 종이꽃은 금새 사라졌다. 꽃을 가져가던 누군가가 말했다. 우리 아이도 소율이처럼 퇴원하게 되면 좋겠다고, 그렇게 온 아이들이 많았는데도 케이크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서 남은 케이크를 꾸역꾸역 먹어야 하던, 씁쓸함이 남는 파티의 마무리 속에, 가져가고 싶다는 아이들을 물리치고 양손에 꽃 두송이를 쥔 아이를 보며 물었다, 기념품이면 하나로 충분하잖아? 내 말에 아이는 웃었었다. 한 송이는 오늘 파티에 오지 못한 사람 중에서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고개를 돌리자 아내가 예쁘게 입힌 새 옷이 무색하게도 원피스를 잔뜩 구기고 침대에 엎드린 자세로 동화책을 보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이소율, 내 딸. 올해 열 살이 되었다. 딸이라, 이런 단어로 부른다고는 해도 실제로 다시 만난 것은 고작 반년이 조금 넘었을 뿐인, 아직 어색한 아이다. 그런데도 아이는 유독 나를 좋아해서 그 사실이 가끔 이상하고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소율이는 한손으로는 종이꽃의 삐죽삐죽하게 잘라진 단면을 만지작거리며, 다른 손가락으로는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펼쳐진 동화책의 면에는 갈색머리에 안경을 쓴 남자아이가 나를 사랑해달라고, 그러면 모든 것을 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게 거래가 가능할까, 동화책의 내용은 나로선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소율은 어제 퇴원파티의 선물로 받은 이 책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소율아!”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율은 동화책을 던지듯 내리고는 몸을 번쩍 일으켜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

아내와 함께 들어온 것은 하얀 가운을 걸친, 의사라기엔 지나치게 젊은 의사다. 소율은 당장에 몸을 틀어 의사에게 뛰어들 듯 안겼다.

못 오시는 줄 알았어요!”

미안 일이 많이 바빠서.”

어제 엄청 재밌었는데 선생님도 오시지.”

당직근무를 바꿔줄 사람을 구하질 못해서.”

퉁명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소율의 말에 의사는 볼을 긁었다. 바쁜 것은 사실이리라, 그는 이 병원의 내과의이기도 하지만-다른 업무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도, 그리고 이 병원의 모두도, 시민들도. 철부지 의사라 본래도 바쁜 시기였으나 그가 그 다른 업무 때문에 수시로 병원을 비우는 탓에, 나머지 근무를 채우느라 집에 가지 못하고 병원에 거의 살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나와는 크게 연관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퇴원 축하해, 많이 보고 싶을 거야. 소율아.”

젊은 의사는 허리를 굽혀 소율에게 눈을 맞췄다. 잔잔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시선을 맞추는 의사를 향해 소율은 화사하게 웃었다. 곧 찾아올 봄날 같은 웃음이었다.

, 저도요. 그렇지만 저는 여기 너무 오래 있었으니까요.”

6살부터 성도대학부속병원으로 옮겨와서 긴 입퇴원을 반복하며 올해로 4년차, 오래 있어서 좋은 경력은 아니다. 소율은 이 의사보다도 병원과 어린이병동에 더 오래 있었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의사의 눈매가 어둑해졌다가 소재를 돌리려는 듯 소율이 받은 선물더미로 시선을 주었다.

우와, 선생님은 선물 못 챙겨 왔는데. 소율이는 인기가 좋구나.”

에이 선생님 선물은 기대도 안했어요, 그 정도로 섬세한 성격은 아니잖아요.”

의사와 아이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분홍색 유니폼을 입은 단발머리의 간호사가 소율의 입원기록을 짐작하게 하는 두터운 카르테를 들고 아내를 불렀다.

어머님, 소율이 방문일정 조율해야 하는데 제가 해드릴게요, 잠깐 같이 데스크로 가시겠어요?”

.”

돌아온 지 얼마 안된 아내는 침대에 두었던 작은 핸드백을 어깨에 걸치며 고개를 틀었다.

잠깐 다녀올게, 여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일을 나눠하자고 말했지만 약을 타오겠다, 인사드릴 사람이 있다며 아침 일찍부터 움직인 아내는 자리에 앉을 틈이 없었다.

아냐, 번거롭게 다시 돌아오지 말고 거기 있거나 커피라도 한잔 하고 있어, 짐 챙겨서 소율이랑 같이 나갈게.”

짐 꽤 많은데 혼자 들고 올 수 있겠어?”

그럼, 이게 뭐가 많다고.”

미심쩍은 눈으로 나와 막대한 짐을 바라보던 아내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간호사와 같이 등을 돌렸다. 그 사이에 의사의 머리에는 커다란 종이꽃이 꽂혔다. 소율이가 꽃을 선물하고 싶던 건 그였구나, 나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꽃장식을 하나씩 머리에 달고선 다정하게 말을 나누는 두 사람을 문틀에 기대 지켜보았다.

선생님은 원래 소율이 담당이 아니죠? 이제 병원에 와도 못만나요?”

아냐, 소율이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나와야지, 소율이가 병원에 오면, 선생님이 땡땡이 쳐서라도 올게.”

소율이 얼굴을 구겼다.

간호사 선생님들 걱정시키면 못써요.”

의사선생님이 땡땡이쳐도 되는 거예요?”

어린애의 질문이니 장난으로 넘어가도 될텐데, 선생은 저도 조금 걸리는 부분이 있었던지, 소율과 눈을 마주친 상태로 고개를 기울여 눈을 접더니 머쓱히 웃어 보였다.

그러네, 그럼 선생님과 소율이만 아는 비밀인 걸로 하자.”

참 상냥한 풍경이다. 손가락을 걸어 약속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부녀지간이라기 보단 나이차이가 나는 남매 정도로 보일까, 연휴 특선으로 방송되는 특선 가족드라마의 한 장면 처럼 보이는 대화에서는 봄날처럼 따스한 온기가 머물었다. 두 사람에게선 비뚤어진 사람이 진부라는 단어로 부르는 보편적인 행복의 냄새가 난다.

습관적으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런 풍경을 보고 냉소를 지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아직은 내가 평범한 사람까지는 되지 못한 모양인지, 익숙하게 새겨진 감정들이 목구멍에서 고여서 고약한 냄새를 만들어냈다. 생각이 있다면 타인에게는 맡게 하고 싶지 않은 구취다.

풍기고 있는 것들을 삼키고, 새어나오려던 말 대신 상냥한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소율아, 이만 가야지? 엄마가 기다리겠다.”

! 아빠!”

크지 않게 건넨 목소리에도 소율은 또박또박 대답하고는 깨끗한 운동화에 신겨진 작은 발을 움직여 내 곁을 스쳐 문 밖으로 먼저 뛰어나갔다. 병원은 익숙한 장소니 길을 잃을 걱정은 없겠지. 아이에게 병원이 익숙하다는 것이 좋은 일일까 만은, 한 박자 느리게 캐리어을 밀고 나서려다가 문득 고개를 뒤로 돌렸다.

마주친 곳에는 장난스러운 꽃을 아직도 달고 있는 젊은 의사가 있다. 제가 마치 정말로 소율의 오빠나 가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율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젊은 의사, 도명호. 그의 이름을 문득 입안에서 굴리고 있자니 시선이 머무른 시간이 걸었던지 의사의 말간 얼굴에 의문이 깃들었다.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그와 추가적인 대화를 나눌 계획은 없었음에도, 내 입에 고여 있던 도명호라는 이름은 목구멍에 걸쳐있던 것들과 섞여 고려하지 않았던 문장으로 변했다.

……도명호 선생님은.”

잠시 머뭇거리며 고개를 꼬았다. 이런 질문을 주고받는 것은, 환자의 보호자와 의사라는 관계에 있어서 일어나는 일일까?

선생님께선 저 같은 사람이 행복해져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악당과, 그 악당을 회개시킨 히어로의 관계에서는?

명호의 눈이 둥글게 떠졌다. 불을 꺼둔 병실이라 빛이 부족했는지 깔린 그림자의 속에서, 그의 눈은 어울리지 않게 검고 어둑해 보였다.

차갑게 굳어진 것 같던 눈매는 이내 능숙한 호선으로 변했다. 아무리 상냥한 의사인 그라고는 해도 쉽게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을까.

그래도, 아버님은 소율이의 손을 잡아주셨으니까요.”

아버님은, 이라는 것에서 느껴지는 약한 강세에서는 마치 부모를 포기한 어떤 다른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도 들린다. 착각일까? 소아과를 얼마간이지만 담당했던 명호였으니까 어떤 다른 환자와 부모의 이야기가 사례로 있는지도 모른다.

누구라도 행복해지는 미래를 선택할 수 있다고 믿어요.”

그가 웃는 얼굴 속에서 내게 건넨 말은 몇 번이나 반복했던 것처럼 단단하게 굳어져 진실처럼 들렸다. 그려진 듯한 의사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90도보다도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Posted by 현재(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