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오전 11시]
2014 5 4
가위바위보에서 졌다. 꼬박 한시간 반동안 잡초를 뽑았다.
끝 이 보이지 않는 듯하던 잡초와의 사투는 그래도 쉬지 않고 움직인 탓에 거의 종료, 잡초 같아 보이는 것이 드물 정도로만 남은 파란 뒤뜰의 구석구석을 점검하다가 이젠 무리다 싶어 그늘을 골라 벌러덩하고 몸을 뉘였다. 지나치게 가문 날씨로 어느 농가는 고생이라던가, 풋풋하다기보다는 뻣뻣한 풀의 질감이 그리 기꺼운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누워버린 이상에야 바로 다시 일어서는 것도 뻘쭘할 것 같다.
"덥다."
"곧 여름이니까."
혼잣말에 대답이 붙어서 더이상 혼잣말이 아니게 되었다. 고개를 들어올릴 기운도 남아있질 않아서 가만히 있자니, 머리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풀 소리와 옷 부스럭이는 소리가 들린다싶더니 머리칼에 와닿는 손길이 있었다. 미지근하지만 뜨겁지는 않은, 미묘한 온도의 손가락. 목소리로 이미 누구인지를 알고는 있었으나 곁에 앉아 내려다 보는 이의 얼굴을 구태여 다시 확인하고는 그 손을 굳이 거둬내지는 않은 채 머리 뉘이는 것만을 풀밭엣 그 이의 무릎 위로만 옮겨본다.
"권세모, 뭐하는 거야?"
퉁 명한 말투와 심드렁한 태도였으나 굳이 머리를 치워내지는 않기에 그대로 다시 눈을 감았다. 너무 딱딱하지도, 거칠지도 않고 적당히 단단하고 무른 감도와 적당한 높이는 중독성이 생기는 것을 염려할 정도로 쾌적한 기분을 부여한다. 잠시간 움직이지 않던 그의 손가락이 다시금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와 움직인다.
작은 바람이 불었다.
초여름이라기엔 지나치게 더운 날씨였고 기꺼운 바람마저 찰나일 뿐인데, 그 찰나의 바람에 하필 네 목소리가 초록으로 번진다. 땀으로 끈적한 등허리와 장시간의 노동으로 지친 몸은 여전한데도 그래도 어쩐지 조금은 살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것은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다.
"으, 너 옷에 풀물들었다."
그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보고 싶었는데 공연히 퉁명한 목소리로 내려오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기분이 상한다. 꼭, 이런 순간에 그런 말을 했어야 했니, 차하나.
"잔소리하긴."
"잔소리하는 게 아니라-이거 리모아저씨가 며칠전에 사준 새옷이잖아. 그러니까 옷 갈아입고 오라고 내가-"
잔소리가 멈췄다. 정확히는 잔소리를 멈추게 만들었다.
어쩌면 입안에서 단내가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이미 저지르고 난 뒤에 해버린 것이라 의미가 없었고 아빠가 늘 칼을 뽑았다면 무라고 썰라고 하셨기 때문에 착한 아들인 나는 행동을 계속하기로 했다.
달고 끈적하고 미지근한 맛이 났다.
바 람도 멎은 순간이었기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차하나의 얼굴이 지나치게 붉어져 있어서 그만해야 겠다는 것을 알고 입술을 떼어낸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눈만 동그랗게 뜬 하나의 얼굴에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가 가져온 걸로 보이는 수건을 집어 그의 입매를 다듬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오에 가까워지는 시간이라 그늘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뭐 이정도로 풀 뽑았으면 바위 하나의 대가 치고는 열심히 노동했다싶으니 그만 들어가도 욕은 안먹겠지.
"이만 들어가자."
나
는 이미 일어난지 한참인데, 돌처럼 딱딱히 굳어져 얼굴만을 붉힌채로 가만히 앉아있던 차하나의 자세가 별거아닌 한마디의 말로
흐트러지며 풀밭에 다리가 풀어진다. 저야말로 풀물들면 어쩌려고 저런 자세로 널부러져 있는지 이해는 가지 않는다.
"너, 너....!!!"
이젠 실어증이라도 걸린양 너라는 단어만을 반복하며 부들거리는 손가락으로 사람을 향해 삿대질을 한다. 얼굴도 새빨간 것이 정말 더위라도 먹은 건가, 뙤얏볕에 고생한 건 나인데 제가 얼마나 나와 있었다고 벌써 더위를 먹고 그런담.
한
참을 멍청하게 그러고 있던 하나는 벌떡 일어나 내 팔을 붙잡아 온다. 발갛게 뜨거워 보이는 얼굴만큼이나 와닿는 손도 달궈져 있어
그리 기꺼운 기분이 아니기에 그 손을 떼어내고는 땀때문에 자꾸 이마에 흘러내려 달라붙는 성가신 머리칼들을 쓸어 넘겼다.
"덥다. 달라붙지마."
혹 시 계속 이 뙤얏볕 아래에 있고 싶은 건가해서 먼저 본부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는 발걸음을 옮기기도 잠시, 채 세걸음도 가지 못했는데 등에 무언가 둔탁한 충격이 쿵 하고 와 닿았다. 뭔가 싶어 확인하니 돌돌 뭉친 수건이었다. 눈 뗀지 얼마지났다고 참 야무지게도 뭉쳤다 싶어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그대로 풀어 끈적한 목을 닦아낸다.
"무슨 짓이야, 권세모! 누가 볼 줄알고!!"
"남 없는데서 할 행동이면 남 있는데서도 하라던데."
잠시간 생각을 하는 듯 조용해졌던 차하나는 이제는 소근거리려던 목소리를 다섯배 정도로 키우며 내 어깨를 찰싹찰싹 때렸다. 애교라고 보기엔 솔직히 조금 아파서 손목을 잡아 멈추자 이제는 다시 입을 종알거린다.
"뭔 개소리야!!"
참
종알종알 시끄러운 것이, 이대로 있으면 돌아가는 것은 저녁이 되어서야 가능할 성 싶어서 그의 팔을 잡아 내게 끌어당겼다.
방심하고 있었던지 두걸음 남짓의 거리가 한순간에 가까워져서, 코끝이 닿을지 모른다는 정도의 공간만을 남기고 눈을 마주한다.
동그랗게 뜨여진 갈색눈동자에선 당황한 기색은 느껴지지만 공포나 두려움 따위는 한점도 없다. 어쩜 이렇게도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생물이 시험은 그리도 잘 보는 것인가, 대도시의 미스테리 감이다.
"차하나."
그리 강하게 말하는 것도 아닌데, 숨이 뱉어지고 말을 하는 그 순간마다 내 숨소리에 맞춰 그의 속눈썹이 팔랑이는 것을 가까이에서 보는 경험은 어쩐지 조금 기묘한 기분이었다. 돌이켜보면 약간은 숨이 거칠어진 것 같기도 하다.
"뭐..."
"나 잔소리 싫어한다니까."
그 말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안그래도 붉던 얼굴이 햇님보다도 붉어졌다.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숙이면서도 발이나 몸을 돌리려고는 들지는 않는데 이건 뭐 어쩌라는 거지 싶어 고민하다가 계속 잡고있던 하나의 손을 그대로 입에 가져다대고 그 손목의 안쪽에 입술을 꾸욱하고 눌렀다.
"이걸로 참아, 더우니까 일단 들어가자."
이 번에는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빨개졌다 하얘졌다 어쩜 그리 색이 쉽게 변하는 지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뒤로 돌아서는데 잠깐 방심한 사이에 정강이를 제대로 가격하는 강력한 한방이 들어왔다. 뼈속 깊이 고통이 새겨질 정도로 강하고 둔탁한 폭력행위에 무슨 짓이냐며 항의하자 이번에는 반대편 다리의 정강이를 제대로 가격하는 차하나의 운동화.
"야 진짜 아파...!!"
아린 통증에 다리를 붙잡고 앓는 소리를 하는 데도 괜찮은지 한 번 확인하지도 않고 빠른 걸음으로 본부로 향하는 하나의 얼굴이 만두처럼 부풀어 오른 것을 보자 신기하게도 고통이 조금 잦아들은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기분만이었다. 아직도 아프다.
뭐 그래도-
나쁘지 않은 오전인 건 확실하려나.
-
한편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