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펀맨2016. 2. 29. 00:09

[우동을 먹던 날]


2016 02 28







 "아아, 신세져버렸군."



 엉망이 된 슈트의 먼지를 털어내고는 낡은 점퍼에 팔을 끼워넣던 무면허라이더가 시선을 들어올리며 웃었다. 고글에 가려져 눈까지는 보이지 않는 상태인지만 그 아래로 보이는 윤곽만으로도 사심 없이 환하게 웃는 것임은 분명하다, 마주하던 사이타마도 생각없이 저절로 웃음이 지어질 정도의 웃는 얼굴이었다.


 오늘의 사건은 사이타마까지 움직일만한 일은 아니었다. 출동한 히어로도 많았고 재해레벨도 측정되지 않은 사건으로, 그나마 가까이 있어 먼저 출동한 무면허라이더는 엉망인 몰골이지만 그가 엉망이 되는 게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구태여 오지 않아도 해결되었을 법한 일에 사이타마가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사건 외에 별도로 존재했다.



 "그러고보니, 자네-"



 무면허라이더가 의아한 듯한 기색으로 제 턱 끝을 조금 쓰다듬었다. 사이타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무면허라이더 이 녀석은 좀 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조금 더 밝아진 얼굴이었다.

 


 "응응."


 "뭔가 달라진 듯 한데."



 무면허라이더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진 사이에 사이타마의 얼굴에 약간 수심이 깃들었다. 와, 둔하다고는 했지만 이 녀석 정말 둔하구나. 그래도 어디까지나 간신히 웃는 얼굴을 유지하는 것만은 성공했다.



 "아, 머리카락을 새로 장만했군, 잘 어울리네, 흑발이라니 준수해보이고 아주 좋아. 그렇다고 평소에 준수하지 않은 것은 아니네만 확실히 인물이 사는 군."



 한참 고민한 무면허라이더는 그렇게 제 말들을 와르르 쏟아내고는 가볍게 박수를 쳤다. 마치 운동화 새로 바꿨구나-같이 가벼운 반응이었다. 사람의 몸에 공기가 채워져 있다면 아마도 지금 피슉하는 소리가 나지 않을까? 사이타마는 제게서 뭔가의 기력 따위가 비실비실 흩어지는 기분으로 맥이 풀려 버렸다.

 


 "......"


 "아, 이만 가봐야겠네! 다음에 또 보세!!"


 "...야..."



 정말, 그게 다야?


 이 곳에 도착해서 이 대화까지 모두 합해도 길어야 10분 밖에는 되지 않았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다들 한눈에 알아보는 머리의 변화를 저렇게 진지한 표정 끝에 뒤늦게야 알아차린 것도 모자라서는 어울리네 어쩌니가 다라니. 그리고 가볍게 손을 흔들며 자전거를 타고 휙하니 사라지는 모습이라니...



 "하아"



 낮게 한숨을 내쉰 사이타마가 기껏 공들여 고정했던 검은 가발을 떼어 내어 바닥에 던졌다.



 "나답지 않은 짓이었어."



 제노스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입술을 꾹 깨물고는 스스로가 폐허에 던져 넣어 엉망으로 뒹구는 검은 가발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사이타마는 우묵하게 잠긴 눈으로 조금 힘겹게 시선을 돌렸다. 하긴, 둔하다고 하자면 남을 탓할 정도로 형편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



 "그래서, 오늘도 말씀하지 못하신 겁니까?"


 "그냥 이야기 하지 말까하고."



 저녁은 우동이었다. 괴인의 집게발을 푹 고아 만든 국물에서는 대게 맛이 났다. 슬슬 괴물을 식료품으로 쓰는 건 그만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이 정도로 신선한 식재료를 사는 건 마트 타임세일을 노려도 확실히 여파가 크니까. 라며 국물을 후루룩 마셨다. 제노스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얼굴로 젓가락을 잠시 멈췄다.



 "친구분 이라고 하셨죠."


 "그런 거창한 것도 아냐, 그냥 동창 정도랄까-정말 얼굴만 아는 정도였고, 나도 기억해낸 건 최근이니까."


 "그래도 아침에는 밝히겠다고 하셨잖습니까."


 "뭐, 그랬지."



 사이타마가 피식 웃었다. 아침에는 확실히 조금 흥분했던 것도 같다. 제노스에게 검은 가발을 사오자며 신이 난 목소리가 되어서는 심지어 검은 눈썹까지 그렸으니까. 지금 생각하자면 제노스에게 부끄러울 만큼이나 그렇게.



 "역시 그만두려고."



 며칠 전에 무면허라이더와 우연히 만나 대화하고, 그의 뒷모습을 보다 기억해냈다. 과거의 인연이었다는 것을, 몇 안되는 인연 중에서도 그나마 좋은 것이라는 단어로 분류될 만한 그런 부류지만 아주 짧고, 아주 작은 인연의 끈이 남겨져 있다는 것을.



 "오늘 알아줬다면 그건 기뻤을거야. 그런데 오히려 잘된 것 같기도 해. 과거 소재로 친해진다는 게 좀 달갑지 않다고 할까. 좋은 시기도 아니었고 친구도 아니었고-"


 "그래도 선생님께는 괜찮은 인연이었죠?"


 "응, 확실히..."



 사이타마는 남은 우동면을 후루룩 삼켰다. 국물이 입가에 묻어서 손가락으로 훔쳐내고는 얕게 숨을 내뱉었다. 뱉어낸 숨은 의도하지 않게 한숨을 닮았다. 어쩌면 한숨일 수도 있었다. 검은 교복을 입고 학교라는 단체 안에서 지금보다 격렬하게 살아가던 시절을 떠올리고 있다. 혼자, 서 있던 어린 날의 사이타마-그리고 만약 그 곁에 안전모 따위를 쓰고 다니는 어떤 소년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분명 화려한 조합은 아니겠지만, 오히려 괴롭힘 따위를 가중시킬 그런 쓸모없는 조합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같이 자전거를 타고, 게임을 하고, 도시락을 먹고-점프를 나눠보는, 그런 두 사람이 있었다면.



 "확실히 그 때 친구가 되었다면 좋았을 거야. 뭐, 그렇지만 지나간 일이야, 제노스."


 "지나간 일 말씀입니까."


 "무면허라이더, 어떻게 생각해?"


 "약하지요."


 ".....아니 그런거 말고 좀 인간적인 평가로."


 "썩 마음에 드는 사람은 아니지만 좋은 부류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친교가 깊어진 느낌도 듭니다. 의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만."


 "응, 친교라. 그러니까 우리는 친해지고 있지?"


 "친목의 자리가 늘기는 했지요."



 사이타마는 우동그릇을 내려 놓았다. 제노스가 신경써서 잘라준, 동그란 꽃모양의 어묵 조각이 두 조각 가볍게 떠 있었다. 꼭 붙어서 자리잡은 모양새가 귀엽다고 생각하며 두 조각을 같이 잡아서 씹다가 국물과 함께 삼켰다.



 "지금 우리는 서서히 친구가 되는 단계를 밟고 있는 것 같아. 이대로면 아마 언젠가는 친구 비슷한 게 되겠지."


 "언젠가는 입니까?"


 "응. 언젠가는-뭐, 나는 그거면 된다고 생각해."



 제노스는 깨끗하게 비운 우동그릇의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제노스가 확인한 사이타마의 웃는 얼굴은 기쁘다기 보다는 어딘가 쑥스러운 것 처럼 어색하고 작은 웃음을 띄우고 있었다. 기뻐보이긴 하지만 마음 한 켠을 스산하게 만드는 어딘가 불안한 예감을 동반하고 있어서, 제노스는 이 느낌을 표현해야할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했다. 그저 예감인가. 정말, 사이타마의-제 선생님의 말대로 이렇게 마무리되어야 할 감정이었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사이타마는 풋, 하고 소리내어 웃고는 국물을 마저 마셨다. 아-맛있었다. 하고 길게 감탄사를 뱉어낸 후에 조금 진지함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제노스와 시선을 마주쳤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제노스는 잠시 고민했다. 친구라는 단어에 속하는 인맥이라면 이런 몸이 되기 전에는 몇십명이나 있었는데도 사이타마가 말하는 친구라는 단어는 그 가벼운 말투에 비해 어딘가 무겁고, 복잡하게 느껴졌다.


 설마 이게 사이보그가 된 것 때문에 사람의 감정에게 마저 둔감해 진 여파라면 조금 씁쓸할 것 같은데 어딘가 그런 방향은 아닌 것도 같아서. 역시나 선생님의 가르침이 더 필요한 부분이라며 이상한 결론을 내리고는 우동그릇을 치웠다.


 그릇을 치우며 살짝 돌아본 사이타마의 뒷모습은 기분 탓인지 조금 쓸쓸해보여서, 제노스는 아침에 가발을 쓰던 사이타마가 활기에 찼던 것을 기억하며, 그가 바라던 바라지 않았던, 사이타마와 무면허라이더 두 사람이 과거의 일들을 웃으며 말하는 풍경을 상상해보다가 역시나 그 풍경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고 조용히 결론내렸다.


 우동이 맛있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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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정이 좋습니다:>








Posted by 현재(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