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내."
라는 파트너의 상낭한 말투에도.
"무슨일 있음?"
이라는 동료의 질문을 들어도, 사실은-아무런 감흥이 없다. 라고 말한다면 나는 나쁜, 혹은 잘못된 로봇이 되는가?
늦여름의 햇살을 피해 그늘에 주차된 파랑과 흰색 도장의 차량은 인간이라면 한숨이라도 나올 법한 심정을 꾹꾹 눌러삼키며, 그늘 속에서 의도적으로 사고의 흐름을 늦추기 시작했다. 소요되던 메모리는 낮은 기복으로 잦아들며 깊이, 깊이 침잠되어 고요해져간다. 이따금 의도와 다르게 맥박처럼 오르는 과도한 메모리의 사용, 그 때마다 떠오르는 어떤 목소리, 어떤 이에 대한 자신의 반응에 대해서는 고장, 혹은 오류라는 말 외엔 설명할 방도를 찾지 못하겠다.
알았다고 생각한 날도 있었지만, 지금은 정말-모르겠다.
요동치는 메모리 속에서 C는 파트너를 향해 무전을 보냈다.
"오순경, 트랜스포메이션과 일시 근무지 이탈에 대한 허가를 바란다, 이상."
여전히 이 행동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상태로.
[ERROR CODE]
2014 09 25
본부의 수리실 안.
현재는 사용중을 뜻하는 초록불이 꺼져있는 상태지만 지난 주말에 일어났던 화재사고로 도장과 일부 외골격, 양팔을 부상당한 R이 이 곳을 사용하고 있었다.
R의 옆을 지키던 네옹은 중간고사 기간으로, 수리와 시험이 끝날 때 까지의 출입금지를 당해버렸고 관리자인 두 박사도 자재 보급을 위해 자리를 비운 탓에 R은 홀로 어둑한 공간에 남아 있었다. 찾아올 이도 없는 상태라 외부의 신경을 거의 차단하고 휴식에 잠겨있던 R은 문득, 희미한 청신경으로 누군가의 방문을 깨달았다.
신경에 연결에 따라 차츰 선명해지는 발소리, 사람의 것이 아닌 무겁고 차가운 소리, 소리로 추측되는 보폭의 크기와 무게로 추정되는 로봇의 이름 정도는 R도 쉽사리 짐작해 낼 수 있었다. 사실대로 고하자면 듣는 순간 알아차렸으나 스스로도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는지는 모르기 때문에 일반적인 해설을 덧붙여내고 만다.
"정신이 들었나."
치익-하는 노이즈가 섞여나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눈을 떴다고는 해도 눈꺼풀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은, 보이지 않던 시야가 켜지는 순간은 인간의 그 것과 닮은 형태일 것이라며-박사들이 말해주었다. 아직도 둔한 프로세스를 정리하고 있자니 왼쪽에서 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둔탁한소리로 바닥에 떨어져 핑글핑글 돌고 있는 것은 R이 즐겨 사용하던 브랜드의 엔진오일이었다. 요란한 움직임으로 돌다가 멈춰서는 것을 확인하고는 팔을 뻗어 오일통을 잡으려던 그는 그의 팔에 연결된 케이블의 폭이 오일통에 닿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것을 발견하고는 행동을 멈췄다.
여덟개, 아니 뒤 쪽까지 합치면 복잡하게 얽힌 열 한개의 케이블을 맞는 위치로 다시 연결할 재간이 있을리 없다.
"쯔, 무능하긴."
그늘 속에서 걸어나온 것은 R의 앞선 예측 대로 레스큐조, 라는 소속의 로봇 C, 일단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져서 R딴에는 다른 동료들보다는 조금 더 친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던 로봇이다. 뭐 그렇다해도 혼자만의 생각이었나 싶었던 것은, 그가 요사이에 부쩍 저와는 닿기도 싫다는 것 처럼 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R보다는 가벼운 발로 오일통을 걷어차 R의 바로 앞까지 굴려보냈다. 살짝 찌그러진 금속통을 집어드는 참에 문득 현재의 시간을 알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분명 C는 아직 근무시간일텐데요. 본부에 와도 괜찮은 건지요?"
"내 상냥한 파트너가 혼자 날뛰다가 부셔진 멍청한 또봇 상태를 체크하라고 부탁해 왔다. 상태를 확인했으니 곧 근무지로 복귀 예정이다. 이상."
"그렇습니까?"
"불만이라도 있는가?"
"아뇨, 기쁘다는 소식인데요."
기쁘기는, 작은 소리로 중얼인 C는 바로 복귀한다던 말과는 달리 엔진오일 한 통을 쥔 채로 R과 마주하는 벽으로 걸어가 앉았다. 오일이 사라지는 소리만이 조용한 공간에 울린다. R은 C를 바라보고 있었고 C는 고개를 구석으로 돌린 상태였다. 그 방향에 있는 것이라고 해봐야, 케이블 더미 뿐만인데도.
"다른 용건이라도 있습니까?"
"글쎄."
R은 이 시간이 조금 괴로워졌다. 같은 공간안에서 상대방이 자신을 껄끄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예상을 하게 된다면 로봇이 아니라 인간이래도 불편할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R은 제 입가를 매만지다가 C를 향해 조심스런 소리로 제안을 건넸다.
"저는 멀쩡하니까, C도 근무지로 복귀해서 오순경님에게 보고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방문에 기뻤습-"
"너는"
말토막이 잘려나갔다. 탱강, 텅빈 오일통이 바닥에 던져지는 소리, 자리에 일어선 C는 미련없는 태도로 일어섰다. 어둑한 수리실,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비춘 검고 푸른 광택 속에서 점멸하는, 어떤 빛.
"방문에 불만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불편하다면 돌아가주겠다. 이상."
"불만이라고는-"
"돌아가주겠다고."
우드득, 케이블이 뜯겨나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소리에 놀란 C가 고개를 돌려 마주한 시야에는 팔과 다리에 연결된 케이블이 모조리 뜯겨진 R이 C를 쫓으려던 자세로 뒤늦게야 현상태를 확인했는지 어색한 자세로 곤란해 하고 있었다.
"정신은 모르겠지만 힘은 멀쩡하긴 한 것 같다. 이상."
"하하...곤란한 상황이란 소식인데요."
R은 케이블을 주섬주섬 쥐고 이전 기억에 의지해 큰 것 부터 엉성한 솜씨로 다시 연결하기 시작했다. 소리는 거의 끝나간다지만 아직 데이터를 측정하고 있던 탓에 지금 이렇게 방치해둘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가을을 앞두고 한참이나 소방캠페인을 이어가고 있던 참이고, 추수철이 되기 전에 농작물 쪽으로 지원요청도 몇 번이나 들어와 있어서 빠른 복귀는 R도 바라는 바였다.
"그 쪽이 아니다."
R의 손에서 케이블을 낚아채는 훨씬 가는 손가락, 이미 돌아간 줄 알았던 C는 R의 곁에 앉아 팔에 케이블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대화는 없이 금속의 마찰음과 결합음만이 드문드문, 들리는 가운데 R은 C의 작업이 용이하도록 팔의 각도를 조금씩 바꿔간다. 처음에는 느린 속도였지만 곧 호흡이 맞아들어갔고 제법 시간이 흐른 뒤에는 원상태와 비슷한 정도까지 연결을 끝낼 수 있었다.
"C"
R은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또봇 C"
"...용건을 말하길 바란다."
"아뇨, 좋아서요."
C의 손이 일순간 행동을 멈췄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행동을 다시 시작한다. R은 그의 침묵을 자신에 대한 암묵적 허락으로 수용하고는 주섬주섬 말을 이어갔다.
"요즘 피하는 것 같았거든요, 호출해도 별로 내키지 않는 것 같고, 본부에도 오지 않고-이렇게 둘만 있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C의 손이 팔을 움켜잡았다. 제 팔뚝에 비하면 턱 없이 약한 힘인데도 단단히 붙잡혀 움직이지 못할 것 같은 느낌으로 R은 말을 멈춘다. 특별한 행동을 하지도 않았건만 C의 온도는 평상시보다 조금 더 상승되어 있었다. 그 상승의 원인이 저라면-조금 기쁠 것 같은데.
"화재사건에 부르지 않았나."
침묵에 감싸인다.
이전 화재사고의 발원지는 음식점으로 가스 폭발이 연쇄되고 있었다. 다른 건물로 번질수도 있는 상황이었고 다행히 도시가스는 차단되었으나 두 블록을 두고 주유소가 있었다. 더 큰 사고로 번질 수 있는 상황이었고 다른 또봇들에게 지원을 요청했어야 했다. 그래, 알고 있었다. 네옹은 당황해서 경황이 없었지만 화재 교육을 받았던 R은 파일럿보다도 더 자세하고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가장 가까운 또봇이 C라는 사실을 파악한 후에는 조기 수습을 위해 제 몸을 먼저 사고에 던졌다.
"C는 화재사건에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통신이라도 했어야지!"
"저로도 잘 끝냈다는 소식이-"
"수리과정만 사흘 째, 이러고도 잘 끝낸건가?"
한발 늦게 상황을 파악한 경찰 쪽의 통신을 듣고 C가 도착했을 무렵에는 사고는 수습되어 있었지만 엉망인 외향의 R이 건물더미 속에 깔려 있던 상태였다. 지금에야 멀쩡에 가까운 상태지만-그 때에는 C가 화내며 무언가 말들을 쏟아내던 소리들도, 하나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꽤 강한 부상이었다.
"죄송합니다."
R은 아직도 제 팔을 붙잡고 있는 C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뒤늦게야 건넨 사과, 처음부터 변명을 하기보다는 솔직하게 말하는 쪽이 C 성격으로 보아 맞을 것이란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솔직하게 생각해서- 무서웠다. C가 현장에서 다칠까봐, 훨씬 화재에 특화된 저도 다칠 위험이 있는 상태에서 그가 부상을 입을 까봐, 이 우려들로 부르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다가 C가 상처입거나 화가 나서 지금보다도 자신을 더 피할까봐서. 불쾌해 할 것 같아서, 그래서-.
"불러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부르지 못했습니다."
"...어째서?"
"당신이 다치는 게 싫어서, 아니, C를 사랑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C는 손을 빼냈다. 검은 광택의 시야부에 푸른 빛이 차갑게,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R은 이어질 말을 예상해 보았다. 어떤 말이건 부정의 의미가 담겨 있을 그 말들을.
"틀리다."
C는 몸을 들었다. 단 세글자로 어렵게 건넨 말을 부정당한 R은 이미 예상했던 것임에도 고개를 떨궜다. 생각보다도 강한 고통이 마인드코어를 집어 삼키는 듯 하다.
마인드 코어, 마음이, 감정이 이렇듯 아플 바라면, 이렇게나 아프고 참담한 심정이 인간에 가까운 마음에서 오는 것이라면 그 마음 중에서 제가 뱉었던 사랑이란 마음은, 전투나 평화를 위해서는 필요없을테니 만들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R의 아픔 위에 확언 하듯 다시 내려오는 부정의 단어.
"틀리다. 그럴 리가 없다. 이상."
"C!"
R이 부르는 제 이름을 뒤로 하고 C는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는 걸음에 R은 이번에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 다시, 혼자였다.
-
최근, C는 R을 대하는 게 불편했다.
다른 동료들과의 시간은 얼마든지 괜찮은데도 이상하게 그와 있으면 이성적이고 바라고 곧은, 정의라는 제 마음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평등적이고 평균적인 시선이 흔들리며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워진다는 것은, 그건 스스로에게 파트너가 부여했던, 정의라는 단어에 상반되는 반응이었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DB를 통해 제게 일어난 변화를 규명하는 단어를, 어떤 정의를 찾아냈다.
그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의 이름은, '■■', 도무지 로봇에게는 적용할 수 없는 단어였으나 제게 생겼던 모든 변화들이 그 단어에 부합되고 있었기에 부정하기만도 어려웠다. 단어를 찾아낸 C는 R에게 물어볼 참이었다. 나는 아마도 너에게 다른 동료와는 다른 감정을 가진 것 같다고,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하지만 R이 사고를 당했던 그 날, 최종적으로 다시금 DB를 확인하던 C는 제 데이터베이스가 갱신된 것을 알았다.
단서가 붙었다. 그 감정은 '이성간'에만 적용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제 마음은 무엇인가. 남성을 베이스로 기조된 우리는 서로 간에 그 감정을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었다. 법은 우리에게 그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정의와 법을 구현해야 하는 저에게 닥친 혼란 속에서 C가 잠시 근무에 소홀해진 시간, 하필 그 시간에 사고가 일어났다.
뒤늦게서야 도착한 현장에서 엉망이 된 그를 발견하고는-꼬여버린 회로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괜찮은 거냐, 일어나라, 그동안 미안했다, 사랑한다. 그렇게 엉망으로 말해버리고 나서야-이미 자신이 법을 거스르고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아차렸던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그도 내게 말했지만, 나도 그런 것 같지만-우리는 그래서는 안된다. 틀리다.
트랜스폼을 해제하고 돌아가는 길에 무전을 켰다. 어느 사이엔가 과자를 물은 한심해보이는 파트너의 얼굴에 그래도 위안을 얻어 소리에 까지 번잡한 심경이 더해지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다.
"복귀하겠다. 이상."
<응, R의 상태는 어때?>
"약간의 에러가 있는 것 같지만, 곧 나아질 것으로 보인다. 이상."
그러니까, 그 단어는 우리, C와 R에게 일어난 명백한 에러임에 분명하다.
-
트위터에서 쿠셔니스트 @cushionist 소재와 커플링 받았습니다. 문법이 재차 개정되면서 사랑이라는 단어에 "이성간의"<-가 빠졌다가 추가되어서 고민하는 C였는데 글이 안써져서 영...나중에 수정할게요.ㅠㅠ
'또봇 > nov'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권부자] 10분 -for 생강맛과자님 (0) | 2014.10.21 |
---|---|
[덥젵] 시간이 흐르면 -for 악필님 (0) | 2014.10.02 |
[권부자] 밤의 버스, 어린 날. (0) | 2014.09.01 |
[셈한] 이토록 고요한 시간에 (0) | 2014.08.31 |
[씨훤] Red alert (0) | 2014.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