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PG-LOG2023. 8. 16. 07:56

"혼자서도 잘할 수 있지? 이타루."

 

고개를 끄덕이면 답으로 주어지는 품이 좋았다.

생각할 필요도 없고, 어차피 선택권도 없어서.

그렇게 완간지구에서 혼자 살아가게 된 것은 중학교에 들어갈 때의 일이었다.

 

DX3 「이코미키의 마에스티티아」  After talk

: 이하, 시나리오 내용을 포함합니다. 플레이할 계획이 있다면 열람에 주의 부탁드립니다.

: 시나리오 이후 PC2 나스노 후카의 죽음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이타루 군~"

 

그 지나치게 발랄한 목소리와 둥근 울림이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을 마에모리 이타루가 알아차린 건 조금의 시간이 약간 지나서였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는데."

"깐깐하긴, 친구랑 붙어 다니면서 좀 말랑해졌다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야?"

 

같은 반의 여학생이다. 이름은 딱히 기억나지 않는데 애초에 기억하지 않았던 것 같다.

 

"...... 용건은?"

"저기, 네 친구 말이야."

 

여기서 친구라고 지칭하는 것은 아마도 나스노 후카인 것 같았다. 두 달 전, 모종의 사건 이후로 조금은 가까워진, 그리고 며칠 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폐를 끼치고 말았던.

 

그리고-이틀 때 학교를 결석 중인.

 

"이제야 나를 보는구나?"

"...... 그래서, 용건을 말해주면 좋겠는데."

 

여학생의 입술이 벌어졌다. 유행한다는 분홍색 틴트가 발라져 있었다. 분홍색, 나스노의 눈과 같은.

 

"며칠 전에 일어난 주유소 화재사건 알아?"

"... 뉴스로 보도된 정도는."

"내 친구, 미야비가 그 근처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거든."

"그게 나랑 무슨..."

"들어봐, 이타루 군."

 

눈을 마주치며 이름을 기억해 냈다. 나나미나나미 나기사, 나스노 후카와 출석번호가 하나 차이여서 출석을 부를 때면 항상 먼저 불리고는 하던.

 

"미야비가 주유소 화재 직전에, 네 친구가 주유소에 있던 걸 봤다고 해."

"그게 무슨..."

"나스노 군이 등교하지 않은 건 화재사건 다음 날부터 잖아?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나도 괜히 그런 말을 들으니까 신경이 쓰이고-"

 

나기사는 목소리를 낮췄다.

 

"사실, 이타루 군이 형사 같은 사람이랑 말하는 걸 본 적이 있거든. 그러니까, 뭔가 알게 된다면 말해줘."

 

팔랑팔랑, 손을 흔들고 나기사는 제 무리로 돌아갔다.

마에모리 이타루는 무리가 없기에 옆자리가 비어있는 제 자리에 앉았다.

화재 사건이 일어난 건 월요일이었다. 그리고, 나스노 후카가 등교하지 않은 건-화요일, 나기사의 말이 옳았다.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신경이 쓰이는 것을 참지 못하고 수업 중에 후나토 아츠시에게 보낸 메일은 알아보겠다는 짤막한 내용이었다.

마에모리 이타루는 나스노 후카가 마지막으로 등교했던 월요일을 기억했다.

 

-

 

"어? 마에모리도 9월이 생일이야?"

"...... 도라는 건?"

 

지갑을 정리하다가 학생증을 본 후카는 조금 놀란 듯, 본래도 커다란 눈을 깜빡이더니 씨익 웃었다. 가방을 뒤적이더니 제 학생증을 꺼내서 보여왔다. 2006년 9월 24일 생.

 

"딱 일주일 차이네. 신기하다."

"그런가."

 

마에모리 이타루는 생일에 그다지 신경을 써본 일이 없었다. 늘 각자의 사정으로  바쁜 부모는 한 번도 생일을 챙기지 않아서, 이타루가 생일을 축하받은 건 초등학교 재학 전의 일이었다.

 

"음, 마에모리. 나한테 알바하면서 받은 케이크 기프티콘이 있는데."

"...... 케이크랑 먹을 커피 기프티콘이라도 사줄까?"

"너는 참...... 한 결 같아."

 

한숨을 푹 내쉰 후카는 말했다.

 

"케이크, 혼자서는 바꿔도 못 먹으니까... 너랑 내 생일 중간쯤에, 20일이나 21일에 바꿔서 같이 먹지 않을래?"

 

이타루는 전혀 맥락을 짚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같이 생일 축하하자고. 마에모리."

"...... 아."

"아는, 무슨 아야."

 

후카는 살짝 웃었다. 눈이 접히며 눈동자가 완전히 가려져, 웃을 때의 얼굴은 이따금 여우를 닮았다고 느껴지곤 했다.

 

"나, 오늘은 종례 전에 바로 나갈 거야."

"아르바이트?"

"응 별건 아니고 순찰 정도."

"...... 같이 가줄까?"

"아냐, 곧 시험 기간인데 마에모리 시간까지 빼앗을 수는 없지."

"그래도 네 알바는 가끔 위험하던데......"

"됐어, 대신-내 생일선물이나 고민하면 어때? 너 그런 거 소질 없잖아."

 

소질이 있는지 생각해 보면, 정말로 티끌만큼의 자신도 없어서 반박할 수 없다는 게 조금 서글펐다.

 

"내일 봐, 마에모리."

"응, 내일 보자, 나스노."

 

언제나와 같은 인사.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

 

<와블러>를 그만둔 뒤로 마에모리 이타루가 돌려받은 저녁과 밤은 아득하게 길었다.

아르바이트를 할까, 아니면 바이크라도 사볼까?  하고 고민하던 것에도 나스노 후카는 잠깐 휴식을 권유했다.

이타루는 권유를 받아들여서 오지 않는 잠을 청하며 긴 밤을 보냈다. 그 보통의 밤에는 보통 과거의 나쁜 기억들이 맴돌아 지나갔지만 그 밤에는 조금 달랐다.

친구에게 하면 좋은 선물, 십 대 선물 추천, 부담스럽지 않은 선물.

검색어를 바꿔가며 스마트폰을 만지작 거리던 마에모리 이타루는 꿈속에서도 선물을 고르느라 나쁜 기억이 스밀 틈이 없었다.

 

화요일, 후카의 결석으로 이타루는 조금 불안해졌다.

아르바이트가 뭔가 잘못된 건 아닐까?

나스노 후카의 아르바이트는 조금 정도가 아닌 위험함을 가지고 있었다.

-클럽 메이헴, 후카의 설명에 따르면 마에모리 이타루와 나스노 후카와 같은 이능력을 가진, 오버드의 집단이자, UGN의 위장 지부라고 하는 곳에서 이 도시를 위협하는 FH라는 집단을 견제하는 그곳이 후카의 아르바이트처였다.

임무라고 해도 후카의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본격적인 임무를 맡기기보단 보통 순찰이나 임무 전의  조사 정도를 맡긴다고 하고 이타루 본인이 몇 달 전까지 이 도시의 전설적인 자경단이었던 마당에 위험 어쩌고 하는 말을 하기도 영 타당치가 않았다.

 

하지만 고작 하루였다. 감기에 걸렸을 수도 있고 집에 뭔가 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

이타루는 메일로 안부를 물어볼까 하고 스마트폰을 한참 만지작거렸다가 멈췄다. 내일까지만 기다려보자.

욕심으로 보낸 메일이 후카에게 부담이 될까 무서웠다. 

 

수요일에도 후카는 결석을 했다. 이타루는 조금 더 불안해졌다.

결국 참지 못하고 점심시간에 보낸 메일은 답장이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 감기야?]

하지만 진짜 감기로 앓아누웠다면 메일에 답장이 오지 않는 게 당연할 터였다.

하루를 더 기다려야 할까? 아르바이트하는 곳에 찾아가야 할까? 위치라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보통 이틀 결석을 했다고 친구의 아르바이트처에 찾아가는 게 일반적인 일인가?

마에모리 이타루는 보통이나 일반이란 기준을 알지 못했다, 숨이 막혀왔다.

 

이미 한참이나 고민하고 있던 참이라, 불길함이 잔뜩 담긴 나기사의 말은 불안하던 이타루를 힘껏 흔들어놨다.

메일을 한 번 더 보냈지만 이번에도 반응은 없었다. 역시 클럽 메이헴에 직접 찾아가 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즘에-기다리던, 답장이 왔다.

 

[방과 후, 후문 옆 카페에서]

[괜찮은 거야, 나스노?]

 

하지만 그 짧은 답장 후로 또 묵묵부답이었다. 이타루는 타인보다 배는 빨리 돌아가는 머리로 온갖 나쁜 생각을 하며 방과 후를 기다렸다.

 

이타루는 교복을 입은 상태로는 능력을 거의 쓰지 않았지만 마음이 급했다. 3층 높이의 교실 창문에서 반동을 이용해 뛰어내려 착지하자, 이 학교에선 특이할 것 없는 일임에도 내려온 대상이 학교에서도 유명한 모범생이란 것에 경악한 학생들이 급기야 자신이 본 것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카페는 후나토 아츠시가 이타루를 이따금 불러내던 곳이었다. 적당히 점잖고 테이블마다 파티션이 있어 타인이 보이지 않았다.

 

"저기, 제  또래의 학생이 먼저......"

"아, 혹시 마에모리님이신가요? 4번 테이블로 가시면 됩니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4번 테이블로 달려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월요일부터 어떤 일을 겪은 건지 후카가  질릴  때까지 물어볼 작정이었다. 그리고 그  위험한 아르바이트는 성인이 될 때까지만이라도 멈출 생각이 없는 지도  한 번 더 물어봐야지.

 

하지만 분명히 4번으로 표기된 테이블에는 사람은 없고, 달랑 스마트폰과 봉투 두 개만이 있었다.

스마트폰은 전원이 꺼져 있는 상태로 작은 고양이 모양 키링이 달려 있다. 이타루는 보자마자 알았다. 후카의 스마트폰이다. 달려있는 키링은 며칠 전에 과자에 붙어있던 것으로, 귀엽긴 하지만 고등학생이 하고 다니기엔 좀 그렇지 않냐고 중얼거리기에 이타루가 몇 번이나 설득해서 겨우 달아둔 것이었다.

이타루는 의자에 앉아 스마트폰 아래의 봉투를 집었다.

 

마에모리 이타루 님에게 라고  쓰인 봉투는 PC로 작업해 출력한 듯 보였고, 다른 봉투에는 마에모리에게.라고 동글동글한 글씨가 살짝 삐뚤게 적혀 있었다. 알고 있는 글씨체다.

봉투를 찢듯이 뜯었다.

 

안녕, 마에모리.

이 편지가  필요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이 편지를  네가  보고 있다면 그건 아마 조금 슬픈 일이겠네.

말재주가 별로 없어서 바로  말할게.
이 편지는 내가 죽으면  너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내 동료에게 맡겼어.

솔직히 미리 써놓는 거라 내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이 편지를 쓰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죽었을 때 네가 불필요하게 자책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야.

사람은 언젠가는 죽고, 오버드는 더 쉽게 죽으니까.
그저 일어나야 하는 일어났을 뿐인데, 너는 아마 또 쓸데없이 땅을 파고 있겠지.

그러지마, 마에모리.
네가 뭔가 잘못한  건 아무 것도 없어.

사실 나는 아직도 우리가 친구가 된 게 신기해.
그  사건 때문인 건 알지만 사실 이유를 물어보는 게 무서웠어.
그래도 뭐, 친구로 본 너는 자꾸 모든 일에 자기 탓을 하고 죄책감을 가지고 마니까, 이제 널 말릴 수도 없는 상황일텐데 조금 걱정이야.

네가 슬퍼하지 않으면 좋겠어.
네가 울고 있지 않으면  좋겠어.

지난 번에 옥편을 찾다가 알았는데, 네 이름은 至라고 쓰잖아?
네 한자의 기원은 새가 하늘을 날다가 높은 곳에서부터 땅으로 내려앉는 모양이래.
와블러 때도 그렇고, 너는 아마 새였나봐.

나는 바람을 다루니까 내가 죽어도 나는 바람으로 마에모리를 만나러 올게.

조금 아쉬운 건. 이 이야기를 얼굴을 보고 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민망해서 할 수가 없다는 건가.
나 사실, 마에모리가 얼마 전 부터 내 이름을 부를까 망설였던 걸 알아.
하필 이 이야기가 떠오른 건 나는 아마 이 이야기를 하면서 네 이름을 부르고 싶었나봐. 결과적으로는  부르지 못했지만.

그래서 편지에서라도 부를게......이타루, 죄책감을 느끼지 말고 내 몫까지 행복해줘.

-나스노 후카로부터, 이타루에게.

 

마에모리 이타루는 자신의 이름을 싫어했다.

이타루의 부모는 이타루를 낳았지만 책임질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지은 이름이 이타루(至)였다.

혼자서도 어느 정도에 도달해라, 각자도생을 태어나자마자 강요받은 이타루는 아주 어릴 때부터 해야 할 일을 하고, 부탁을 받으면 수긍하며 자랐다. 

 

완간지구에서 이틀 만에 린치를 당하던 마에모리 이타루를 구해준 사람이 있었다.

그때 그 남자가 말했다. <이타루>는 좋은 이름이라고. 새처럼 살아가라고.

그럼에도 이타루는 자신의 이름을 싫어했다.

 

하지만 이타루는 최근 생각했었다.

또래의 학교 아이들 처럼, 친구인 후카가 자신을 이타루라고 부른다면 어떤 기분일까 하고.

하지만 그러려면 자신부터 후카를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데 그게 도무지 되질 않았다. 몇 번인 가는 사실 부르기도 했는데 타이밍이 안 좋아 번번이 실패하고 나니 의욕을 완전히 잃었었다.

네가 그걸 알고 있었나보다.

 

"...... 이런 건 직접 불러줘야지, 나스노."

 

어딘가 멍한 정신으로 두 번째 봉투를 열었다.

자신을 키리타니 유고라고 이름을 밝힌 남자는 덤덤히, 하지만 정중한 어투로 나스노 후카의 사망과 사체의 화재로 인한 소실을 밝히며 유감을 표했다. 본래는 UGN에 관련된 일은 외부의 오버드에게 전달되지 않는 게 보통이지만, 후카의 사전 당부로 사망을 전달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후카를 죽게 한 졈이, 아직  이 도시에서 도주 중이라는 사실 또한.

 

마에모리 이타루는 알았다.

UGN은 언제나 인력난이라고 후카가 자주 말하고는 했다. 나스노 후카의 죽음을 이용하려는 의도만은 아니겠으나, 후카를 죽게 만든 원흉이 도시에 남아있다면 마에모리 이타루가 그 졈이란 존재를 제거하기 위해 움직일 것조차 계산한 게 분명했다.

뭔가가 치밀어 조금 역겨웠다. 레니게이드 바이러스가 부글부글, 잘게 끓었다.

생각할 필요도 없고, 어차피 선택권도 없다.

 

"그래, 네 부탁이니까 나는 울지도, 슬퍼하지도 않을 거야."

 

이타루는 후카의 편지, 아니 유서라고 불러야 할 종이를 단정하게 접어 봉투로 되돌려 재킷 안에 넣었다. 울지 않기로 했기에 안으로 밀어 넣은 온갖 감정이 꾹꾹 눌러 밟혔다. 그래도 전부 누르지 못한 것들은 파편이 되어 내뱉어졌다.

 

"네 이름을 부르며 생일선물을 주고 싶었어."

 

이제 남겨진 UGN이 보낸 편지를 내려다보는 시선은 차고 서늘히 식어 있었다. 

 

"하지만 네가 바람이 되었다면 이제 나를 이타루라고 불러줬으면 하는 사람이 없잖아."

 

마에모리 이타루는 가방을 열었다. 두 달 전의 그 사건에서 언젠가 사라진 존재에게 씌워주었던 방독면과 꼭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사실 후카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한 번도 방독면이 가방에서 없었던 날은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쓸 생각은 아니었지만 이타루 나름의 추모기도 했다. 그 존재 또한 자신에게 살라고 했으니까, 그래서.

 

"다시 새가 될  수밖에 없잖아, 나스노."

 

마에모리 이타루는 검은 방독면을 쥐었다. 

자, 자책도 허가받지 못했고  슬퍼하지 않아야 한다면 이 감정에는 어떤 이름을 붙어야 할까? 마에모리 이타루는 알았다.

투쟁만이 남았다. 자신은 고작 그것밖에 할 줄 모르니까.

 

 

 

-그날, 완간지구에 와블러가 돌아왔다.

 

 

DX3 「이코미키의 마에스티티아」 After talk END

 

Thanks to 강산님, NIO님!

 

Posted by 현재(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