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오다]
2014 12 13
-14회 또봇 전력 키워드 '목도리'
어쩐 일에서인지 잠에서 깨었다.
깨어낸 시야는 아직 어둑해서 아침이 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평소라면 눈을 감는 것 만으로 다시 잠에 빠져들 일인데 이상할 정도로 정신이 또렷하게 깨어나 졸음기 한 점 느껴지지 않는다. 어둠속 연두빛 형광으로 빛나는 시침과 분침은 숫자 1에 겹쳐져 있다.
긴 어둠속에서는 형광이 빛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스스로 빛나지 못하는 그 물질은 고작해야 한두시간 정도만 빛날 수 있을 뿐이다. 시야는 자연히 방의 한켠에 위치한 다른 침대로 향한다. 어렴풋한 형체와 규칙적으로 들리는 숨소리로 잠들어 있을 형제는 아마도 오늘 늦게 잠든 것 같다.
저녁 식사 후에 기말고사인데 공부 안하냐며 팔짱을 끼고 문제집을 말아 까닥이던 움직임과, 잔뜩 찌푸렸던 얼굴을 기억해 냈다. 공부를 할 맘은 없지만 늦게 잠들었던 제 형제, 차하나를 깨울 생각은 없어서 억지로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해본다. 솔직히 말해서 요즘 바짝 날카로워진 하나의 후환이 두려운 것도 사실이다.
시계소리, 하나의 숨소리, 그 위로 겹쳐지는 제 숨소리.
이불을 다시 덮어쓰고 숫자를 세어보기로 한다. 1부터 새어보지만 그 자릿수가 세자리수를 넘어도 잠은 찾아오지 않았다. 이대로 마냥 누워있는 것도 제 성정에는 맞지 않는 일이라 푹신한 이불을 조심스럽게 걷자 서늘한 공기가 몸에 휘어 감겨왔다. 인기척이 전해진 것인지 어둠에 제법 익숙해진 시야에서 하나가 자리를 뒤척이며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제 형제, 하나는 최근 자주 잠을 설치고는 했다. 그 모습을 본 적은 없고 아버지에게 들은 것이라 정확하지는 않다. 저는 베개에 머리만 닿으면 꿈도 꾸지 않고 잠들어버리는데 왜 너는 잠을 설치냐고 묻자, 저와 꼭 닮은 얼굴을 한 형제는 요즘 자주 짓는 어딘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너도 예전에는 잠을 설쳤잖아. 라고 대꾸했다.
이전에-그래 기억하기 싫은 이전의 날들, 우리 형제가 외따로 남겨졌던 그 날들에는 그런 일도 있었던 것 같지만 이제는 지난 일이다. 하나는 그렇게 깨어나는 일에 대해 어딘가 먼 시선으로 중얼거렸다.
'생각이 많으면 밤의 틈새에 끼어버리는 거야'
우리는 아직 어린데, 그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얼굴로 어른이나 쓸 법한 단어를 입에 담던 하나의 모습은 솔직히 말해 조금 낯설게 느껴졌더랬다.
그러면 지금의 나는 밤의 틈새에 끼어버렸나. 생각이 많지는 않았다. 요즘의 생각이래야 또봇과 도시와-그리고, 또 어떤-
-툭
멍하니 잠기던 생각을 깨어낸 낯선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창문가에서 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아니, 새벽한시에 이 외진 곳에 소리가 날 일이 뭐가 있다고-신경이 곤두선 탓에 착각한 것으로 치부해 넘기며, 이대로 부스럭 거려서 하나를 깨우느니 차라리 주방에라도 내려가 주전부리라도 물어야 겠다고 생각할 즘에 마치 그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다시 들리는 낯선 소리.
-툭
이번에는 처음의 소리보다 조금 크다. 어쩐지 오슬해지며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설마, 그럴리는 없지만 귀신이라던가 하는 단어가 머리 속을 스친다. 아니 그런 거 있을리가 없지만.
-툭
망설이는 사이에 다시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더 크다. 젠장, 귀신이고 뭐고 간에 이러다간 하나가 깨서 제게 고스란히 잔소리를 퍼부을 판이라 무서운 것도 뒤로 하고 창에 다가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로 귀신이면 어떡하지, 아니 뭘 어쩌긴 어쩌겠냐. 그대로 기절이라도 하면 끝일텐데. 입술을 질끈하고 깨물었다가 용기를 내어 커텐을 걷었다. 김서린 유리에는 분명 무언가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어차피 잠도 날아간 판국에 정체라도 알아보자 싶어 잠금쇠를 열고는 창문을 밀어 연다.
"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뱉고 만다.
밤 사이에는 눈이 내려 있었다. 소리도 없이 수북히 쌓여 밖으로 보이는 들과 건물이 온통 하얀 것에 뒤덮여 가로등에 물들어 연한 주황색으로 밝혀져 낯선 모습이다. 고요하고 조용한, 제가 알지 못하는 제 마을의 풍경에 찬바람이 들어오는 것도 잊고 입을 벌리고 섰다.
그 즘에, 무언가가 제게 날아든다 싶더니 낯익은 툭-하는 소리를 내며 닫힌 창문에 닿아 뭉게졌다. 하얀 덩어리, 눈일까. 시선을 내리자 그 곳에-어떤 그림자가 있었다. 어른 치고는 작아서 성인이 아닌 것은 알았지만 명확한 형체는 보이지 않음에도 어쩐지 그 모습은 꼭 제가 아는 사람을 닮았다.
"일수?"
이 거리에서 제 중얼거림이 들릴리도 없을 텐데 소년이 한걸음 걸어 빛 아래에 섰다. 모자를 눌러쓰고 촌스러운 노란 머플러를 맨, 점퍼 차림의 소년- 방금 전까지 창문에서 들렸던 소리의 도구인 것으로 보이는 하얀 눈뭉치를 들고 있는 그는 고개를 들어 열린 창문을 향했다. 시선이 곧게 겹쳐진다. 그의 입모양이 무언가 말하는 것 같더니 검지 손가락으로 제가 딛고선 눈을 가리킨다. 감으로 알았다. 내려오라는 뜻이다.
이 새벽에 무슨 일인지. 영문은 모를 일이었지만 이대로 마냥 창문을 열어둘 수도 없으니 창문을 닫고 의자 위에 걸쳐둔 점퍼에를 집어 팔을 꿰었다. 제가 내려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다시 한번 창문에 소리가 들렸다. 툭, 그 재촉에 두리는 얕에 한숨을 뱉고는 그래도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집 밖은 생각보다 몹시 추웠다.
"너 이 시간에 무슨-"
볼이 발갛게 물든 일수의 시선이 내 위아래를 지나가는가 싶더니, 일수는 하얗게 입김을 뱉으며 제 목에 걸쳐있던 목도리를 풀었다. 걸음을 좁혀 그의 손에 있던 목도리가 내 목에 감싸인다. 언뜻 스친 일수의 손가락이 몹시 차가웠다.
"칠칠맞게 이게 무슨 차림이고."
퉁명한 목소리에 짜증이 훅하고 올라온다.
"그런 녀석이 계속 눈을 던지냐."
"니가 안올까봐 그랬지."
가까운 거리인지라 목소리를 뱉어낼 때마다 입김이 번져서, 우리의 입김이 하나로 겹쳐졌다가 흩어졌다. 습한 공기가 코끝에 닿았다 흩어지는 감각은 어딘가 낯설다. 오늘은 그러니 참 낯선 밤이다. 익숙한 공간인데도 이 시간에, 그와 내가, 눈을 밟으며 이 곳에 있다.
그 생경함에 목소리가 멎었다. 내가 아무 말도 없는데도 그는 가만히-잠자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빛으로 희미하게 물든, 혹은 추위에 터진 붉은 볼 위로 자리한 곧고 까만 눈동자는 빛 한점 비치지 않는데도 까맣고 깊숙하게 비치고 있어서 그 색에 홀리듯 나도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섰다.
"왜 여기 왔는데?"
시선을 그대로 하고 그처럼 퉁명하게 뱉어낸 말에 일수가 픽하니 웃었다.
"다섯개만 던지고 가려고 그랬다."
"대답이 아닌데?"
일수는 고개를 기울였다. 목도리를 내게 벗어줬기에 요즘 부쩍 굵어진 목덜미가 드러나 추워보였다. 그렇게 손가락이 얼음장이 되도록 여기까지 와서는 왜 목도리를 제게 주고 그럴까. 그는.
"오면 안되나."
"그것도 대답이 안돼."
일수는 고개를 빗겨 숙이며 눈이 잔뜩 묻은 낡은 운동화로 발 아래를 짓이겼다. 뭉개지는 눈 위에 흙이 겹쳐지며 얼룩으로 남았다.
"느가."
"뭐?"
"느가 보고 싶어서."
웅얼거리는 목소리, 기분 탓인지 일수의 얼굴이 아까보다도 붉어진 것을 알았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의 내 얼굴도 그와 같은 색을 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젠장. 이유를 묻는 게 아니었다고 생각하며 간질거리는 볼을 긁었다.
"...못볼 수도 있었잖아."
"그러니까 다섯개만 던지고 가려고 했지."
"멍청하긴."
일수가 웃었다. 킥킥. 소리내어 웃더니 제가 생각해도 제가 멍청하긴 했다며 중얼거리는 입술은 일어나 하얗게 말라 붙어 있었다. 안쓰럽다고 생각하며 그 모양을 쫓고 있자니 그 입술이 호선을 그린다.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웃는 얼굴.
"네가 왔으니까."
짤막한 말을 내뱉은 일수가 손을 뻗는다 싶더니 얼어붙은 것 같은 손가락이 내 볼을 감싸온다. 당연히 차가워져야 마땅한 일인데 손가락이 닿는 곳에서 화들짝 올라오는 것은 살갗에 파고드는 열기였다. 맞닿은 피부에서 시작해 몸 속으로 아지랑이처럼 번지는 열기에 머리가 어질하게 울린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아니 지금부터가 아니라-어쩌면 창 밖에서 그를 발견한 순간부터 박동이 기묘하게 빨라졌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것도 같다.
"차두리, 네가 왔잖냐."
이번에 겹쳐진 것은 입김이 아니라, 까칠하고 거친 감촉의 입술이었다. 코끝이 겹쳐지고, 그의 감은 눈 위를 덮은 짧은 속눈썹이 파르르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건조하게 닿았다가 짧게 떨어진 입술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 지에 대해 멍하니 생각하고 있자니 얼굴에서 그의 손가락이 떨어져 나갔다.
"그거면 충분해."
일수는 내 목에 감았던 목도리의 끝을 모아 질끈 묶었다. 귓가에 그의 숨소리가 번졌다. 온기가 느껴지는 숨소리는 무뚝뚝하게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로 변한다.
"잘자, 차두리."
허전한 목으로, 빨개진 얼굴로, 웃는 것도 같고 우는 것도 같은 표정으로-일수는 그렇게 한 걸음 물러났다가 천천히 뒤돌아섰다.
목도리 탓인지, 아니면 오늘이 무언가 이상한 날이기 때문인지 추위는 느껴지지 않아서 나는 그가 등을 돌려 눈 쌓인 거리를 되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눈 때문에 발소리조차 얼마 내지 않으며 조금씩 작아지던 그는 결국 그 자취를 완전히 감췄고, 나는 그가 사라진 자리에서 한참을 더 서있다가 뻐근해진 고개를 뒤로 눌렀다. 보이는 것은, 아직도 까만 밤하늘
"망할 녀석, 어떻게 자라는 거야."
결국 생각이 깊어져, 정말로 끼어버린 밤이다.
-
◇또봇 전력 60분◇ @_got_the_power 14회 참여, 소모시간 45분
'또봇 > nov' 카테고리의 다른 글
[셈한] 무해소년 (0) | 2015.02.05 |
---|---|
[셈한] Closed world -上 (2) | 2015.01.07 |
[셈한] +2°C의 체온 (0) | 2014.11.14 |
[공림] Days-1,520 (0) | 2014.11.02 |
[권부자] 10분 -for 생강맛과자님 (0) | 2014.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