警 戒 警 報
경 계 경 보
-헤르메포 X 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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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언제나 불공정하다.
두꺼운 유리가 끼워진 둥근 창 너머로 바다를 바라보며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렇게나 느릿하고 잔잔해만 보이는 풍경이지만, 해루석을 바닥에 엇대어 만든 전함은 빠른 속도로 캄벨트-무풍의 해류를 지나가고 있었다.
일부에겐 악몽으로 불리는 이 곳이지만 특별한 공포심은 들지 않았다. 가끔 상대를 잘못 알아본 눈먼 해왕류들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이 함대의 주인은 정권의 거프. 해군영웅인 그와 그 부하들이 있다 보니 사소한 사건 따위는 순식간에 처리되기 일쑤였다.
복도를 채운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해군들은 무언가 어수선하게 지나다니며 제각기의 일을 하고 있었다.
묵묵히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오직 창가의 남자뿐이다. 물론 그런 그도 바로 얼마 전 까지는 배의 바닥을 닦거나 빨래를 하는 등 잡일이라면 질릴 만큼 하곤 했었다.
‘예전엔 이렇게 쉬는 게 일이었는데 말이지.’
단 이틀의 휴가인데도 어째서 쉬는 게 이렇게 불안해진 걸까.
자신을 향해 씁쓸한 듯 웃으며 거칠게 자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꽤나 나이 파악이 힘든 외향이다. 언뜻 보기엔 이십대의 후반. 혹은 더 젊은 것 같기도 하지만 눈을 가린 검은 썬글라스로 인상이 가려져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다. 큰 키에 다부진 체격, 두 갈래로 갈라진 턱과 신경질적으로 뒤틀린 입술, 대충 묶은 레몬색 금발은 꽤나 양아치 같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 반면에 옷은 상당히 말쑥하게 다려 입어, 오히려 위화감을 만들어 낸다.
남자는 언젠가-그리 오래되지는 않은 지나간 날들을 담담하게 회상했다.
너무 바쁜 생활 때문에 잊어버린 화려했던, 하지만 외롭고 철없던 어린 날들. 문득 기억하기 전에는 그 날들을 그리워하는 느낌도 있었건만 막상 돌아보니 그렇게 미련이 생기지도 않는다. 2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 지났는데, 그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너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언제부터였던가.
바보 같다고 생각하던, 땀을 흘리거나 몸을 움직이는 그런 일들에 보람을 느끼고, 근면함이나 성실함 따위의 빈정거리던 단어들이 익숙해진 것은.
그리고, 그것들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느끼게 된 것은.
문득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것을 기억해내고 손을 뻗는다. 손가락에 닿는 얇고 가느다란 담배 한 개비. 진급을 축하한다며 동료가 몰래 넣어준 것이다. 잠깐 고민하다가 구석으로 걸어가 성냥불을 그어 불을 붙인다.
간만에 느끼는 씁쓸한 향기가 폐부에 깊숙하게 스며들어 정신은 나른하게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것으로도 허기는 채워지지 않는다. 다만-한순간 잊게 만들어 주는 것뿐이다.
메인디쉬가 빠진 디너처럼.
중요한 무언가를 먹지 못한 것 같은 이 기분을. 이 허기를.
“헤르메포군-거프중장님께 일러버린다.”
맑은 울림의 여자목소리가 복도에 낭랑하게 울렸다. 상냥함을 담은 목소리였지만 그 내용은 절대 상냥하지 않다.
거프중장. 그 뼛골까지 파고든 무시무시한 단어에 남자, 헤르메포는 재빨리 담배를 손으로 붙잡아 껐다. 타는 듯 아린 감촉이 순식간에 올라와 얼굴을 붉게 만들었지만 태연을 가장하며 뒤로 돌아 다른 손으로 경례한다.
“손, 괜찮아?”
해군제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여소위가 방긋 웃으며 그의 손바닥을 가리켜왔다. 아프지 않으냐고 물어보는 뉘앙스였지만 헤르메포는 고개를 저어서 부정할 뿐 손바닥을 다시 펴지는 않았다.
이대로 넘어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가능하긴 할까? 상대는 소위. 결국은 이 일이 거프중장님께 들어가겠지? 일단 증거를 없애볼까? 협박이라도 통하긴 할까?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들로 등에 식은땀이 맺힌다. 일단은 태연하게 행동하기로 결정하고 표정을 평범하게 만들지만 얼굴이 굳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괜찮아. 중사로 승진한 선물로 봐줄게.”
여소위는 귀엽다는 듯 손사래를 쳐 보였다. 키득키득 웃고는 있지만 그녀가 약속을 어긴 일은 없으니 이번 일은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아주 조금이지만 마음을 놓으며 늦은 인사를 건넸다.
“그래 나야 잘 지냈지 뭐. 흐응-근데 그냥 봐주기는 그러니까. 헤르메포군이 심부름 하나만 해주겠어?”
또 놀리는 것 같은 어조. 거기에 심부름이라는 어감과 군-이라는 칭호에서 어린애로 취급당하는 느낌을 받은 헤르메포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직 십대긴 하지만 지금에 와서 애취급이라니, 재밌지도 않다.
“헤르메포 중사입니다. 소위님.”
하지만 이제야 그렇게 행동해봤자 그녀에게는 통하지 않은 듯, 소위는 그저 그 얼굴에 키들키들, 작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로 말을 이어갔다.
“그래그래. 알았어. 아무튼 이거 코비군이 부탁한 건데 좀 전해줄래?”
그녀가 하얀 손가락을 움직여 내민 것은 몇 장의 접혀진 수배전단이었다. 얼핏 보기엔 상당히 깨끗하지만 손에 쥐자 새로 나온 전단 특유의 빳빳한 느낌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전단은 제일 새로 나온 것이 아니면 거의 취급하지 않는데 어째서 갑자기 이런 것을 가져온 것일까.
“응. 예전 전단이야.”
의아한 마음에 펼쳐보니 밀짚모자를 쓰고 커다란 입으로 웃고 있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뒷장으로 이어지는 종이들도 마찬가지로 눈에 익은 것들 뿐. 뽀득뽀득 짧은 마리모 머리의 남자와, 짧은 단발의 여자 등. 그녀에게 부탁했던 코비는 물론이고 헤르메포 자신에게도 너무나도 익숙한 그 이름이 입에서 빠져 나온다.
“몽키 D. 루피-”
그 목소리에는 낮은 탄식과 그 외의 수많은 복잡한 감정들이 섞여 있어서 스스로가 말하고 나서도 조금 의아할 정도였다. 하지만 소위는 그런 그의 감정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여전히 상냥한 미소를 띤 채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해왔다.
“코비군이 이 루키들을 꽤나 신경 쓰는 것 같더라고. 이전 수배전단을 잃어 버렸다면서 은근히 아쉬워 헤서 아는 사람을 통해서 얻어왔어. 헤르메포군이랑 코비군. 같은 방이지?”
마치 칭찬을 바라는 듯 한 어조로 애교 있게 단언하는 그 태도는 제법 귀여웠지만 헤르메포는 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묘한 침묵에 잠겼을 뿐이었다.
“아. 예.”
그녀가 다시 군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도 지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부탁을 수락한다. 소위는 무언가 그의 태도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지만 이내 웃으며 돌아갔다. 헤르메포는 침잠된 듯 묵묵한 표정으로 전단을 품에 넣고 뒤돌아섰다.
한때 그. 몽키 D. 루피에게 앙금 따위도 남아있지 않다고 코비에게 선언한 적이 있다.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쉽게 마음을 정리하기는 힘든 법이다.
실로 치졸하고 옹졸한 패배감. 복수심.
잊지 못한다면 차라리 발전의 계기로 삼아주겠다며, 해군장교가 되어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서, 그들을 군대의 힘으로 눌러버린다는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고, 노력했다. 그래서 그 짧은 기간에 중사라는 목표에 오르고-그 것으로 그들을 잊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감정은 어디에 남아있던 것일까.
그것은 패배감 과도, 복수심과도 명백하게 달랐다. 처음 인식한, 하지만 줄곧 느끼고 있던 그 것. 처음 탄 배에서 울렁이는 멀미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고, 열등감과는 비슷하지만 조금 뉘앙스가 달랐다. 이름 모를 그 감정으로 심장이 불쾌하게 일렁인다. 두근, 두근, 두근, 호흡이 조금 가빠져 온다.
거프중장 휘하는 물론, 대부분의 해군 부사관 들에게는 원래 개인실이 제공되지 않는다. 보통 거대한 방에서 남자 수십 명이 우글우글 들어차, 먹고 마시고 훈련하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다. 하지만 최근 승급한 헤르메포와 코비 두 사람은 지금 작은 개인실 하나를 특별히 허가받아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편애 따위가 통할 만큼 약해빠진 직장도 아니고, 거프중장이 그런 쪽의 배려를 해줄 리도 없으니 특별한 경로로 얻은 개인실은 아니다. 단지 한참 ‘체’를 연습하던 코비가 연습에 너무 심각하게 빠졌던 나머지 잠결에 침대 두개를 부셔먹어서 쪽방으로 쫓겨나고, 쫓겨나는 김에 헤르메포도 셋트로 쫓겨났을 뿐이다. 새삼스럽게 생각해도 참 스스로가 불쌍해지는 일이지만 어차피 사내냄새들이 그득그득 풍기는 돼지우리에서 탈출한 거니 어떤 관점으로는 감사한 마음까지 들었다. 뭐, 잠잘 때마다 희생된 침대의 매트리스가 그리워지지만, 그것만 뺀다면 그럭저럭 버틸 만 했다.
“들어간다-.”
몇 번의 노크를 끝내고 삐걱 이는 낡은 문을 연다. 노크에 인사라니, 자기가 생각해도 진짜 많이 변했구나 싶어 입가에 쓴웃음이 지어진다. 처음 이 방으로 짐을 옮기던 날. 뒤틀린 문을 수리하던 코비는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는 진짜 실력으로 멋진 개인실을 받아요.
그렇게 말하던 그 눈빛이 무언가 부담스럽고 부끄럽게 느껴져서 결국 그날 썬글라스를 맞추었다. 하지만 그의 취향이 예사롭지는 않았는지 코비와 다른 사람들은 그와 눈을 마주치기를 거부했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거프만이 훌륭한 취향이로군! 이라며 큰 소리로 웃어재꼈다. 별로 기분 좋은 평가는 아니었다.
“나갔나?”
작은 방안은 그가 밖에 나가기 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침대 대용의 해먹이 나란히 두 개. 잡동사니와 책이 쌓인 낡은 책상, 잡다하게 얻어온 책들이 제법 늘어난 책꽂이가 하나, 옷장대용으로 쓰는 나무상자 두 개, 아무렇게나 던져진 티셔츠와 바지들. 연습용 목도며 훈련도구들이 한쪽 구석을 채우고 있다.
뭐. 가뜩이나 머릿속도 복잡한데 오히려 그가 없는 쪽이 낫겠다는 생각도 들어서 품속에서 전단지 뭉치를 꺼내 들었다. 그냥 책상에 올려두고 오늘은 혼자 바다나 보거나 갑판에서 낚시나 배우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불행히도 야트막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책상위에 수북이 쌓인 책더미 너머에서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고개를 든다. 크고 동그란 안경 너머로 마찬가지로 동그란 눈, 새까맣고 작은 눈동자가 잠에 취한채로 시선을 마주쳐왔다.
“다녀왔어요. 헤르메포씨?”
“으. 응.”
갑작스런 인사에 놀라 얼떨결에 전단뭉치를 뒤로 숨겨 버렸다. 코비는 피곤한 건지 커다랗게 기지개를 켜고는 약간 우물거리는 어조로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아. 마침 잘 오셨어요. 하암. 줄게 있었거든요.”
졸음이 가득한 웃음을 짓고는 잡다하게 어지러진 책상 위를 여기저기 뒤지더니 결국 자기 상의의 주머니에서 무언가 작은 봉투를 꺼낸다. 졸린 듯 눈을 몇 번 매만지다가 봉투를 헤르메포에게 던져 왔다. 가볍게 낚아챈 봉투에는 파란색 해군마크와 해군통판본부의 상점명이 적혀져 있었다.
“선물이요.”
베시시하고 웃는 코비의 얼굴에는 기분 좋은 노곤함에 묻어나왔다.
헤르메포에게 있어서도 휴일이었지만 그건 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그 피로는 그에게 더 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헤르메포가 쿠쿠리에 익숙해져 중사의 칭호를 따는 동안, 그는 해군에서도 꽤나 상급의 사람들만이 구사할 수 있다는 ‘체’를 습득했다. 이등병도 아닌 잡무병에서 시작해서 2년.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체득속도- 당연히 그 훈련은 상상을 초월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놀면서 보내는 것은 지금의 둘에게 낯선 것이 당연한 상황이었다.
“마음에 들까 모르겠어요.”
코비가 쑥스럽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분명 가벼운 봉투가 어째서인지 손안에서 묵직하게 느껴져 왔다.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자 머리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검고 광택 나는 재질에 황동으로 이리저리 모양을 낸 그것은 헤르메포가 최근 맞췄던 썬글라스와 마치 한 세트 마냥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이거-”
그에게 머리핀을 들어 보이며 설명을 요구하자, 그가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요즘 연습하는데 머리 때문에 곤란해보여서 지난 번 통판에 주문했어요. 그런데 전해주는 걸 잊어버려서요.”
개인에게서 선물을 받은 것이 언제였던가.
기억하는 한도를 짚어본 결과- 이 선물이 처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스트블루의 해군들에게서 그의 어머니가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다는 소리를 들었었지만 그에게 그런 어머니의 기억은 없었다, 기껏 선물이라고 받아 봐도 그의 아버지에게 아부하듯 전해지는 뇌물들, 아니면 아버지가 인심 쓰듯이 건네주는 돈주머니 정도였을까.
그는 난생 처음 맞이한 이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어떤 표정을 지어야하는지 고민했다. 그리고 막막한 느낌의 침묵이 조금 더 흐른 뒤, 떨떠름한 표정으로 겨우겨우 할 말을 찾아냈다.
“고마워.”
퉁명스럽게까지 들리는 형편없는 인사. 그런데도 코비는 별거 아니라며 웃어보였다. 따뜻한 분위기. 헤르메포는 손바닥에 머리핀을 매만지며 답지 않은 감동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잊어버린 것이다.
방문 앞에서까지 하던 고민의 정체도,
전달하기로 약속했던 수배전단도.
모두. 깨끗이.
- 2 -
코비는 깊은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술냄새를 지독하게 풍기는 그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잔뜩 남은 나무술통을 골치 아프다는 듯 쳐다본다. 이거. 혼자 어떻게 끝낸다지.
한참 간지러운 분위기를 만들던 두 사람에게 나타난 것은, 커다란 술통을 한손으로 거뜬하게 들고 온 거프중장이었다. 애송이들아! 선물이다! 라며 호탕하게 웃던 그는 니들이 사내새끼들이라면 한 방울도 남기지 말라는 말과 함께 술통을 하나 던져주었다. 그 사람 나름의 진급축하인사로 보였다.
“어이. 일어나보라고.”
쿡쿡하고 잠든 코비를 손가락으로 찔러본다, 하지만 맥주 한잔을 마시고 뒤로 곯아떨어진 녀석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없다.
거프중장의 명에 거역할 생각도 없거니와 어떻게 버리던 분명 들키고 말테니-결국, 혼자 다 마셔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헤르메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고작 한 잔에 뻗어놓고 무슨 해군장교가 되겠다는 거야.”
결국 한숨을 쉬곤 맥주를 한잔 크게 따랐다. 안주라고 해봐야 지난번에 거프가 잡은 해왕류를 재료로 코비와 둘이서 심심풀이삼아 만들었던 육포가 끝이다. 독이 들어있는 건 아닐 것이라 믿으며, 한입 조심스럽게 먹고는 맥주를 흘려보냈다.
간만에 마시는 두 잔째의 알콜이 목구멍으로 시원하게 넘어갔다. 뭐. 이걸 다 마시는 일은 큰일이라지만 적어도 지금의 몇 잔은 기분이 좋다.
“지금은 상사인가……”
지금 저렇게 형편없이 뻗어 있는 녀석은 내게 해군장교가 되겠다고 말했다.
삐걱이는 그 지붕위에서-지금보다도 형편없는 몰골로 녀석은 그렇게 말했다. 바로 방금 전까지 창문을 닦던 잡부주제에, 반짝이는 눈으로 꿈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며,
“바보 같은 놈.”
같은 잡부니까 친구라면서-
“얼간이.”
그래도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포를 막아섰다. 그리고 꼴사나웠지만-같이 싸워주었다. 위기의 순간에서도 친구라고, 말해주었다.
“머저리”
버리지 않았다.
“천치새끼.”
술 한 잔에 비꼬는 말을 붙이며 그 기억들을 안주로 술을 마신다. 하지만 조금 수상했던 해왕류육포도 떨어지고 더 이상은 부를 단어도 없어져서 결국엔 생술만 들이켜야 했다.
이 정도쯤이면 차라리 취하는 쪽이 좋을 텐데, 이상할 정도로 정신은 또렷했다. 혹시 체력이 늘면 주량도 느는 걸까, 하지만 자신보다도 강해진 주제에 바닥에 꼴사납게 엎드려 이불을 돌돌 말고 꼼지락거리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문득 아까 피다만 담배가 생각나 주머니를 뒤적였다. 고작해야 한 모금 밖에 빨지 않은 담배가 궁싯맞게 꼬부라져 있다. 그 모습이 마치 예전의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아서 웃는다.
“루피……”
이불을 끌어당기던 코비가 잠꼬대를 지껄였다. 예전, 해군본부에 오기도 한참 전-잡부로 지낼 무렵에도 녀석은 잠꼬대로 루피의 이름을 부르곤 했다.
그가 처음 사귄 친구면서 꿈을 인정해준 사람. 녀석이 루피라는 이름을 말할 때면 언제나 반짝이는, 살아있는 눈을 한다.
“첫 친구라.”
그 어감을 되살려 불러 보았다. 입안에 잔뜩 배인 지독한 술냄새가 목소리를 타고 올라온다. 그의 첫 친구가 루피라면, 나에겐 이 꼴사나운 녀석인가.
헤르메포는 그 일이 별로 우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킥킥킥 하고 밖으로 소리 내며 웃었다. 담배 불을 붙이려던 작은 성냥갑을 손으로 잡아 던져 받기를 반복한다. 성냥갑은 팔랑이며 제 자리에서 올라가고,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친구. 간질간질한 단어잖아.
그는 무의식중으로 아까 숨겼던 밀짚모자 일당의 전단지를 꺼냈다. 눈빛이 예전처럼 탁하게 가라앉는다. 웃음이 더 깊어졌다.
키들키들키들키들.
음침할 정도로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그대로 성냥불을 지피고는, 화르륵. 종이 속의 그 웃는 얼굴에 불을 붙인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던 그것은 이내 오징어를 굽는 냄새를 나며 빠르게 타들어갔다. 루피라는 이름도, 이빨도, 입술도, 커다란 눈도, 그 모든 것이 까맣게 그을리더니만 형체를 잃어간다. 헤르메포는 한참이나 그것을 쳐다보다가, 손가락이 데일 정도로 가깝게,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조각이 된 후에야 손을 놓았다. 나무로 만들어진 바닥이 혹시 타버릴까 한순간 당황했지만 바닥에 방염가공이라도 되어 있는 것인지 불은 쉽게 멎었다.
불을 끄려고 들어 올렸던 물통을 내려놓고는 한순간 멎었던 웃음을 다시 터트렸다. 나는 지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거지같기만 했다. 이 상황이. 자기 자신이.
차가운 바닥에서 잠든 코비를 바라본다. 뭐가 그리 좋은 건지 비실비실 웃으며 자고 있다. 너도 기분이 좋냐. 나도 지금 너무 기분이 좋아.
“감기 걸리겠다.”
술에 취했지만 일어나거나 걷지 못하는 정도는 아니어서 웃챠 하고 일어나 녀석을 이불 째로 들어올렸다. 한순간 휘청하긴 했지만 그래도 움직일 만은 하다.
그나저나 어째서 이렇게 가벼운 거지? 하는 의문이 든다.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시간을 자고 같은 훈련을 했는데, 물론 전체적으로 키도 크고 외모도 달라졌지만 아직도 몸무게는 한참이나 가볍다. 열심히 함께 만든 근육도 빠르게 커진 키로 분산되어, 팔도 다리도 가늘다는 인상만이 강하게 남았다. 이래서 어디 장가라도 보내겠나.
혹시나 잠결에 안경이라도 깨질까 싶어 조심스럽게 벗겨내고, 자기 몫의 이불도 한 겹 더 덮어주고 나서야 조금 안심이 된다.
‘체’를 습득한 코비는 그보다 강했다. 요즘은 붙어보지 않았지만 그 사실을 착각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거프중장은 둘 다 고만고만한 애송이라고 했지만 일단 둘이 받은 계급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해군은 철저한 계급제와 실력제를 신봉한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헤르메포는 그보다 약했다.
하지만 이렇게 잠든 얼굴을 보고 있으니-이 녀석 정말 어리구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사실 이런 외모를 하고 있지만 헤르메포의 나이는 고작해야 17세에 불과했다. 친구라면서 그의 나이를 물어본 적은 없지만-코비는 그보다도 훨씬 작은 것 같다. 키도, 손목도, 발목도, 무엇보다 앳된 티가 남은 통통한 얼굴을 보면 확실히 어린 티가 난다.
문득 손을 조심스럽게 뻗어 녀석의 머리카락에 가져다 댔다. 군용 싸구려비누로 감은 분홍빛 머리카락은 부스러진 지푸라기처럼 폭신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머리카락을 만지던 손길은 자연스럽게 오렌지색 조명으로 비춰진 하얀 얼굴로 내려왔다. 조명의 탓인지, 아니면 딱 한잔 마셨던 술의 탓인지 얼굴은 열에 들뜬 듯 붉었다. 헤르메포는 애완동물을 만지는 아이 같은 호기심으로 여드름 하나 없는 볼을 쓰다듬어 보았다. 여리고 부드러운 피부는 생각처럼 뜨겁기 보다는 오히려 서늘한 느낌으로 손가락에 닿았다.
평소에도 손을 잡거나 등을 밀어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는 만져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그를 조금 흥분시켰다. 그래서 그는 용기를 내어-코비의 볼을 쭈욱하고 잡아 늘렸다.
“네녀석, 자는 척 하는 거 아냐?”
장난이라지만 힘을 주어 늘린 탓에 두 볼에 빨간 자국이 남겨졌건만, 그는 조금 웅얼거렸을 뿐 다시 꿈나라로 향했다. 평소에 훈련하자고 하면 재깍재깍 일어나더니만 오늘은 아무래도 마음먹고 깊이 자려는 모양이다.
애써 쳐다보지 않던 술통을 다시 바라보았다. 아직도 술은 잔뜩 남아있었고, 남은 밤 또한 아득히 길었다. 시간이 남았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절망해야 하는 것인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다음날 아침엔 결국 늦잠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식당에 갔지만 역시나 밥은 다 떨어져서 결국 쓰린 속을 부여잡고 갑판으로 향했다.
갈매기들은 어디서 온 것인지, 까악 까악 까마귀 같은 소리를 내며 제 정체성을 잃고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역시 술은 마실 게 아니다. 특히나 와인이나 마시던 그에게 싸구려 맥주는 숙취라는 더한 고통으로 남았다. 이렇게 괴로운 줄 알았다면 마시지 않을-리가 있나. 그래도 마셨어야 했겠지.
일어나서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올 때까지도 어제 밤의 자세 그대로 잠들어 있던 코비를 떠올리자 왠지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누구는 한 잔 마시고, 누구는 그 한 잔을 뺀 한 통을 마시는 세상이라니. 세상은 역시 불공평하다.
어제 볼을 잡아 늘리는 게 아니라 아예 그 상태로 갑판에서 굴려버릴 걸 그랬다고 후회하며 이빨을 갈았다.
그 때 뭔가 갑판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린지 싶어 내려다보니 해군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오글오글 떼를 지어 무언가 요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째 사람이 많은 가 싶더니 이 함뿐만 아니라 다른 함의 선원도 보인다. 그러고 보니 오늘 뭔가 한다고 했던 것 같기도-아 그래. 바자회를 한다고 했다.
군대 내에서 바자회라고 한다면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냐고 하겠지만, 한배에 타고 있는 선원이 20명에서 120명까지 워낙 많을 뿐만 아니라, 한 번 나오면 항해를 계속 하면서 쓸모 있는 상점이 있는 섬을 들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바자회는 심심찮게 열리는 법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쓸모 있는 것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술이나 책, 시계, 각 섬의 기념품이나 간식거리 따위라서 처음 구경한 이후로는 한 번도 간적이 없다.
하지만 그의 파트너는 이 바자회를 꽤 좋아했다. 어디 산골마을에서 처음으로 도시에 구경하러 나온 소년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이것저것 정보를 듣기도 하고, 별로 쓸모가 없어 보이는 해도며 책도 수집하곤 했다.
뭐 아무튼지 그렇게 쓸모없는 바자회지만, 그래도 어제 열렸었다면 안주라도 사고 좋았을 텐데 어째서 이런 날은 꼭 날짜가 맞지 않는 것인지 의문을 가져보다가 몸을 억지로 일으킨다.
손가락의 끝에 어제 선물 받은 머리핀이 걸려 있었다. 그래. 배도 출출하니까 뭐라도 먹는 길에 혹시라도 괜찮은 물건이 있다면. 딱히 보답이나 그런 걸 할 성격도 아니지만. 그래도 만약-좋은 물건이 있다면.
머리핀을 몇 번 열었다 닫는다. 금속의 이음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조금은 날카롭게 들렸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 헤르메포는 입을 헤 벌리고 썬글라스로도 감춰지지 않는 멍청한 표정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음식 핑계를 대더니만 결국 들고 온 것은 꽃무늬가 화려한 헤어밴드 하나였다.
노랑과 빨강. 거기에 꽃무늬. 남자에겐 조금 화려할까 싶지만-그래도 코비는 아무래도 화려한 문양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괜찮을 것 같다.
일전에도 꽃이나 줄무늬 같은 선명한 색상의 옷을 입은 여자만 보면 늘 놀란 얼굴로 되돌아보곤 했었으니까. 그러니까. 아마 이런 종류를 좋아할 것이라고-헤르메포는 나름대로 그렇게 완벽하게 어긋난 근거를 대며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은 것도 처음이었지만,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는 것도 처음.
처음이라는 울림이 그의 걸음을 빠르게 만들었다.
아니, 뭐. 특별한 선물 같은 건 아니다. 대단치도 않은 물건이고 원래 세상은 기브 & 테이크라고 아버지가 그러셨고-평소에 신세를 진 것도 있고 그러니까.
하지만 워낙 경험이 없다보니 작은 망설임도 함께 생겨난다.
만약에 싫어한다면 어떡할까.
솔직히 말해 남을 위한 물건을 골라본 적이 없었다. 받는 사람의 기분 같은 거 알게 뭐였을까.
일부러 특별히 주문했던 맞춤 머리핀.
그런 것과 이 헤어밴드가 동등한 가치를 가질 자격이 있을까. 아니 애당초 나 따위의 녀석이 고른 선물이니-
“아니. 괜찮아.”
그 녀석은 분명히 웃어줄 것이다.
기뻐해줄 것이다.
그 녀석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대책 없이 상냥하니까. 아마도 많이 좋아하고-아니면 뭐. 좋아하는 척이라도 해줄 것이다.
그렇게 근거 없는 결론이라도 내리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 져서 이내의 넋이 나간 듯 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남을 위한 일이란 멋진 일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란 말인가, 춤추듯 발을 딛는 그에게서 주변사람들이 피해갈 만큼의 행복의 오오라가 퍼져나갔다. 조금 기분 나쁜 광경이다.
그가 느낀 일생일대의 행복.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행복의 순간은 너무나 짧았다.
- 3 -
어째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날아가 바닥에 떨어진 썬글라스를 바라보며 헤르메포는 작은 질문을 던졌다.
방금 전까지의 즐거웠던 기억들이 기억의 저 편으로 날아가, 생각은 완전히 백지가 되었다. 화가 난다던가, 짜증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의문만이 백지가 된 머릿속을 차곡히 채워 나간다.
어째서?
소란스러운 복도의 소리들은 이제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방안은 더없이 고요했다. 침묵. 방금 전에 일어났던 날카로운 소리만이 울리듯 귀에 맺혀있었다.
왼뺨이 조금 늦지만 몹시 붉게 달아올랐다. 차게 식은 몸에서 얼굴만이 제 혼자 불타오르는 것 같다.
모든 것이, 지금 이 방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저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낯설다. 익숙한 기분, 그래. 지금의 이 풍경은 언젠가 아버지를 따라가서 본 연극을 닮았다. 등장인물들은 시나리오대로 연기를 하고 자신은 푹신한 좌석에 앉아 사건을 경청하며 머리에 질문을 던진다.
‘코비는 어째서 그를 때린 거지?’
한 번의 질문이 이루어지자 다음의 질문은 몹시 쉬웠다.
강제의 힘으로 반바퀴 돌려졌던 시야가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오며 방을 관찰한다. 맞은 사람은 그인데 정작 울 듯 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가해자 쪽인 코비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등장인물을 제외한 모든 무대는 어제와도, 오늘과도 같았다. 아니, 오늘 새로 사온 헤어밴드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본다.
‘선물은 어째서 바닥에 떨어져있지?’
둔한 정신으로 주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뜬금없이 그 것을 위해 지불했던 지폐의 개수를 떠올렸다. 이어서 판매를 하던 군인이 낄낄 웃으며 팔꿈치로 찔러오던 것도 생각해낸다. 여자친구에게 선물이라도 하려는 거야? 그 저속한 웃음과 질문에 자신은 어떻게 대답을 했던가.
“변명도, 하지 않는 겁니까?”
기억해냈다. 친구에게, 내게 단 하나뿐이었던 멍청한 녀석에게 주겠다고, 녀석이나 할법한 부끄러운 대사를 그렇게 입에 담았었다. 그래, 그때는 그렇게 입이 잘 떨어졌는데 왜 지금은 이렇게 입이 열리지 않는 것인가.
“알고 있었잖아요, 헤르메포씨, 제게 그가 어떤 존재였는지……당신은 전단이 아니라, 제 꿈을 태운 거에요.”
코비는 왜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 걸까. 그가 화내는 모습은 보기 싫은데, 내 단하나 뿐인-친구인데. 그래서 웃게 만들어주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 사실은 알고 있지만 모른 척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어제의 저녁과 달라진 것이라면 손바닥에서 던져진 헤어밴드와 날아간 썬글라스 말고도 하나가 더 있지 않은가. 해먹의 곁에 남겨진 루피일당의 수배전단. 그리고 이제 불타버린 한 장.
“그 때의 일도, 당신이 한 거였죠?”
멀리 떠났던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이럴 때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는 건지 몰라서 일단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말을 꺼낸다. 그래. 변명을-아니, 설명을 하면 되겠다.
그래. 코비는 착하니까 아마 잘 설명하면 납득할 것이다. 술 때문이었다고 너무 취해서 실수로 태워버렸다고 그렇게 설명하면, 들어 올렸던 네 몸무게가 예전보다 훨씬 늘어서 이젠 해먹에 얹어주기도 힘드니까, 앞으로는 절대 술 마시면 안 되겠다고 그렇게 농담을 곁들이면, 훌륭한 대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당신, 최악이네요.”
방긋, 하고 코비가 웃었다.
어제와 너무나 똑같은 웃음, 순박하고 행복한 듯 보이는 그 표정에 헤르메포는 오히려 한순간 할 말을 잊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거지?
나는-하고 설명을 하러 입술을 떼기도 전에 쾅쾅거리는 발소리가 밖으로 이어졌다. 짓다만 웃음이 어색하게 매달려 있다가 끝내 이상한 표정으로 일그러졌다.
짙은 패배감. 뺨을 만지자 뜨겁고 울컥하는 무언가가 만져졌다. 입 안이 찢어진 건지 미처 느끼지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로 입 안 가득히 쇠맛이 강하게 돈다.
어제는 술이더니, 오늘은 피, 정말-오라지게 기분 나쁜 휴일이다.
“둘이 싸운 거야?”
난장판이 되어있는 바닥을 하이힐로 피해 밟으며, 여소위가 나지막하게 물음을 던졌다. 쓸데없이 오지랖이라며 당장 지랄이라도 떨면서 쫓아내고 싶지만 상대는 소위님, 게다가 여자다. 굳이 상대해봐야 결국 거프중장에게 자기만 쪼일 뿐이다. 그래서 결국은 말을 흐리며 알아서 생각하기를 바라고 청소를 계속했다.
방은 아까 둘이 말다툼, 아니 한쪽이 일방적으로 화를 내던 상황에서 끔찍할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평소에도 지저분한 방이었지만 이쪽은 파괴되었다는 인상이 확실히 어울린다. 쓰러진 책장, 흩어진 책들과 흩날리는 종잇장.
“책장을 완전히 들어 엎었네. 그것도 위쪽 칸까지, 이거 헤르메포군이 한 짓?”
해군이란, 게다가 여자의 나이로 해군소위까지 오른 사람이란 정말 대단하고 새삼스럽게 까달았다. 물론 자기가 한 짓이 맞지만 한 번 슬쩍 본 것만으로 알아내다니. 이 여자 앞에서는 완전범죄는 조금 힘들어 보인다.
“책상이 완전히 동강이 났네. 랄까, 이거 칼로 자른 느낌인데?”
이제는 사인까지 분석해내고 있는 건가.
조금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한편, 조금은 잘되었다는 판단도 같이 들었다. 둘이 싸웠다는 것과 한 쪽이 일방적으로 기물을 파손했다는 쪽, 둘 다 들키면 징계감이지만 그래도 이 일의 원인이 된 쪽은 자신이었고, 결정적으로 그가 나가고 홧김에 물건들을 집어던지고 쪼갠 것도 자신이었다.
“제가 어제 술을 마셔서 홧김에 부셨습니다. 소위님.”
‘술을 마셔서’와 ‘홧김에 부셨습니다.’사이에 뭔가 굉장히 많은 말들이 생략된 것도 같지만 거짓말은 아니다보니 자연스럽게 진실성이 부여되어, 강한 설득력을 보였다. 성질은 고약한 주제에 워낙 거짓말을 하지 못해서 사람들에게 유난히 굴림 당하던 헤르메포의 모습을 아는 소위이다 보니, 이 말에는 납득한 모양이다.
그녀의 눈썹이 좁혀 들었다. 얕게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끼더니 설교하듯 씁쓸한 목소리를 뱉어낸다.
“기물은 내가 적당히 구해서 넣어줄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네. 죄송합니다.”
그래. 이쪽이 나은 선택이다.
자기희생이란 이미지는 자신과 끔찍하게 어울리지도 않지만-어차피 자신이 저지른 일에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이전의 아버지 일로 끔찍하게 깨달았으니까.
“그리고……”
그녀가 얼굴에 고양이 같은 미소를 띠고, 살짝 손을 움직여 헤르메포를 불렀다. 살랑이는 머리카락 사이에서 달콤한 향기가 배어 나와서 무심결에 움츠려 들었다.
향수냄새와 함께 숨소리마저 들려오는, 그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해 왔다.
“화해. 하지 그래?”
헤르메포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녀가 방금 들어왔던 문을 가리켰다. 반쯤 열려진 문의 틈사이로, 익숙한 색의 머리카락이 비쳐보였다.
사과의 말은 어렵다.
게다가 자신이 실수한 일일수록, 벌어진 일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미안해. 라는 단어는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헤르메포는 정작 해야할 단어는 잊은 상태로 머뭇거리며 변명을 내뱉었다.
“술기운이었어.”
뱉고 나서야 이 말을 할 시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터져나간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차. 싶은 마음에 다시 머릿속을 뒤져서 할 말을 찾는다.
“술, 많이 마셨어요?”
뜻밖에도 말을 다시 꺼낸 쪽은 코비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아 그 심정은 알 수 없지만 목소리만은 아까보다 훨씬 안정된 듯 잠잠한 어조였다.
“너, 술 진짜 약하더라.”
어쩐지 웃으면서 말을 꺼낼 수 있어서 키득하고 웃으며 생각하던 말을 꺼냈다. 밤사이 내내 생각한 부분이라 이야기는 막히지 않았다.
“한잔 마시고 꿈나라로 가다니.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잠깐의 침묵, 이어지는 코비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조금 빠른 어조였다.
“이 나이에 음주에 능숙한 쪽이 이상하잖아요?”
무심코 웃으며 한걸음, 그를 향해 내딛었다가 다시 한 발 물러섰다.
어렵다. 사과의 말보다도 지금의 말이 그에게 닫고 있기는 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단지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가벼운 말장난 뿐,
“내가 좀 방탕하긴 하지만 말이야.”
작게 웃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다시 대화는 멎었지만 아까의 침묵보다는 견딜 수 있을 만큼 한결 공기가 가벼워져 있다는 것을 둘 모두 알고 있었다.
“헤르메포씨. 많이 아팠어요?”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조금 망설이다가, 겨우 질문을 돌렸다.
“……너도 많이 아팠지?”
이번의 대답에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진지한 목소리.
“……한마디면 괜찮아 질 겁니다.”
결국 직구를 던지게 하는 건가. 끝까지 청춘을 추구하는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헤르메포는 허탈한 웃음을 지어버렸다. 하긴, 그랬었다. 너는 처음부터-
“미안해.”
생각보다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말은 짧았지만, 그걸로 충분한 단어였다. 문을 밀며 조용히 걸어들어온 코비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저도 어린애같이 굴어서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실꺼죠?”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언저리가 어쩐지 붉어 보였다. 하지만 그보다도, 언제 가져갔는지 모를 알록달록한 무늬의 머리띠가 이마에 채워져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어쩐지 울컥이는 기분이 들어서 무언가 목으로 새어나오는 울음을 참는다.
“하지만, 이 머리띠 좀 센스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유행을 모르는 녀석이로구만.”
헤르메포는 주머니에서 머리핀을 꺼내서 머리를 묶어 올렸다.
잠시 그대로 마주보고 있다가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었다. 헤르메포가 커다란 손으로 코비를 끌어안았다.
다시 찾은 친구를 끌어안고는 온기를 느끼며 눈을 감는다. 헤르메포는 지금, 친구의 웃는 얼굴을 위해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거짓말을 하자]고 결심했다.
‘그래, 코비, 지난 번 전단을 태운 것도 나야.’
말하지 않고 생각을 삼키며 그는 연하게 웃었다. 말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니까-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성의 어딘가에서 지금의 자신이 망가진 것도 같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세상은 정말로 불공정하지 않은가. 밀짚모자 루피에게는 모든 것이 있다. 해적으로써의 명예도-친구도-동료도-돈도-. 헤르메포가 가지고 싶어 하던 모든 것들을 그는 이미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이 건, 내가 가져도 된다.
뒤틀리고 잘못된 그 자신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올곧고 바른 눈빛을-반짝이는 이 햇빛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주지 않을 것이다
.
警 戒 警 報
경 계 경 보
-헤르메포 X 코비-
- 1 -
세상은 언제나 불공정하다.
두꺼운 유리가 끼워진 둥근 창 너머로 바다를 바라보며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렇게나 느릿하고 잔잔해만 보이는 풍경이지만, 해루석을 바닥에 엇대어 만든 전함은 빠른 속도로 캄벨트-무풍의 해류를 지나가고 있었다.
일부에겐 악몽으로 불리는 이 곳이지만 특별한 공포심은 들지 않았다. 가끔 상대를 잘못 알아본 눈먼 해왕류들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이 함대의 주인은 정권의 거프. 해군영웅인 그와 그 부하들이 있다 보니 사소한 사건 따위는 순식간에 처리되기 일쑤였다.
복도를 채운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해군들은 무언가 어수선하게 지나다니며 제각기의 일을 하고 있었다.
묵묵히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오직 창가의 남자뿐이다. 물론 그런 그도 바로 얼마 전 까지는 배의 바닥을 닦거나 빨래를 하는 등 잡일이라면 질릴 만큼 하곤 했었다.
‘예전엔 이렇게 쉬는 게 일이었는데 말이지.’
단 이틀의 휴가인데도 어째서 쉬는 게 이렇게 불안해진 걸까.
자신을 향해 씁쓸한 듯 웃으며 거칠게 자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꽤나 나이 파악이 힘든 외향이다. 언뜻 보기엔 이십대의 후반. 혹은 더 젊은 것 같기도 하지만 눈을 가린 검은 썬글라스로 인상이 가려져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다. 큰 키에 다부진 체격, 두 갈래로 갈라진 턱과 신경질적으로 뒤틀린 입술, 대충 묶은 레몬색 금발은 꽤나 양아치 같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 반면에 옷은 상당히 말쑥하게 다려 입어, 오히려 위화감을 만들어 낸다.
남자는 언젠가-그리 오래되지는 않은 지나간 날들을 담담하게 회상했다.
너무 바쁜 생활 때문에 잊어버린 화려했던, 하지만 외롭고 철없던 어린 날들. 문득 기억하기 전에는 그 날들을 그리워하는 느낌도 있었건만 막상 돌아보니 그렇게 미련이 생기지도 않는다. 2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 지났는데, 그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너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언제부터였던가.
바보 같다고 생각하던, 땀을 흘리거나 몸을 움직이는 그런 일들에 보람을 느끼고, 근면함이나 성실함 따위의 빈정거리던 단어들이 익숙해진 것은.
그리고, 그것들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느끼게 된 것은.
문득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것을 기억해내고 손을 뻗는다. 손가락에 닿는 얇고 가느다란 담배 한 개비. 진급을 축하한다며 동료가 몰래 넣어준 것이다. 잠깐 고민하다가 구석으로 걸어가 성냥불을 그어 불을 붙인다.
간만에 느끼는 씁쓸한 향기가 폐부에 깊숙하게 스며들어 정신은 나른하게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것으로도 허기는 채워지지 않는다. 다만-한순간 잊게 만들어 주는 것뿐이다.
메인디쉬가 빠진 디너처럼.
중요한 무언가를 먹지 못한 것 같은 이 기분을. 이 허기를.
“헤르메포군-거프중장님께 일러버린다.”
맑은 울림의 여자목소리가 복도에 낭랑하게 울렸다. 상냥함을 담은 목소리였지만 그 내용은 절대 상냥하지 않다.
거프중장. 그 뼛골까지 파고든 무시무시한 단어에 남자, 헤르메포는 재빨리 담배를 손으로 붙잡아 껐다. 타는 듯 아린 감촉이 순식간에 올라와 얼굴을 붉게 만들었지만 태연을 가장하며 뒤로 돌아 다른 손으로 경례한다.
“손, 괜찮아?”
해군제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여소위가 방긋 웃으며 그의 손바닥을 가리켜왔다. 아프지 않으냐고 물어보는 뉘앙스였지만 헤르메포는 고개를 저어서 부정할 뿐 손바닥을 다시 펴지는 않았다.
이대로 넘어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가능하긴 할까? 상대는 소위. 결국은 이 일이 거프중장님께 들어가겠지? 일단 증거를 없애볼까? 협박이라도 통하긴 할까?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들로 등에 식은땀이 맺힌다. 일단은 태연하게 행동하기로 결정하고 표정을 평범하게 만들지만 얼굴이 굳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괜찮아. 중사로 승진한 선물로 봐줄게.”
여소위는 귀엽다는 듯 손사래를 쳐 보였다. 키득키득 웃고는 있지만 그녀가 약속을 어긴 일은 없으니 이번 일은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아주 조금이지만 마음을 놓으며 늦은 인사를 건넸다.
“그래 나야 잘 지냈지 뭐. 흐응-근데 그냥 봐주기는 그러니까. 헤르메포군이 심부름 하나만 해주겠어?”
또 놀리는 것 같은 어조. 거기에 심부름이라는 어감과 군-이라는 칭호에서 어린애로 취급당하는 느낌을 받은 헤르메포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직 십대긴 하지만 지금에 와서 애취급이라니, 재밌지도 않다.
“헤르메포 중사입니다. 소위님.”
하지만 이제야 그렇게 행동해봤자 그녀에게는 통하지 않은 듯, 소위는 그저 그 얼굴에 키들키들, 작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로 말을 이어갔다.
“그래그래. 알았어. 아무튼 이거 코비군이 부탁한 건데 좀 전해줄래?”
그녀가 하얀 손가락을 움직여 내민 것은 몇 장의 접혀진 수배전단이었다. 얼핏 보기엔 상당히 깨끗하지만 손에 쥐자 새로 나온 전단 특유의 빳빳한 느낌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전단은 제일 새로 나온 것이 아니면 거의 취급하지 않는데 어째서 갑자기 이런 것을 가져온 것일까.
“응. 예전 전단이야.”
의아한 마음에 펼쳐보니 밀짚모자를 쓰고 커다란 입으로 웃고 있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뒷장으로 이어지는 종이들도 마찬가지로 눈에 익은 것들 뿐. 뽀득뽀득 짧은 마리모 머리의 남자와, 짧은 단발의 여자 등. 그녀에게 부탁했던 코비는 물론이고 헤르메포 자신에게도 너무나도 익숙한 그 이름이 입에서 빠져 나온다.
“몽키 D. 루피-”
그 목소리에는 낮은 탄식과 그 외의 수많은 복잡한 감정들이 섞여 있어서 스스로가 말하고 나서도 조금 의아할 정도였다. 하지만 소위는 그런 그의 감정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여전히 상냥한 미소를 띤 채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해왔다.
“코비군이 이 루키들을 꽤나 신경 쓰는 것 같더라고. 이전 수배전단을 잃어 버렸다면서 은근히 아쉬워 헤서 아는 사람을 통해서 얻어왔어. 헤르메포군이랑 코비군. 같은 방이지?”
마치 칭찬을 바라는 듯 한 어조로 애교 있게 단언하는 그 태도는 제법 귀여웠지만 헤르메포는 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묘한 침묵에 잠겼을 뿐이었다.
“아. 예.”
그녀가 다시 군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도 지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부탁을 수락한다. 소위는 무언가 그의 태도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지만 이내 웃으며 돌아갔다. 헤르메포는 침잠된 듯 묵묵한 표정으로 전단을 품에 넣고 뒤돌아섰다.
한때 그. 몽키 D. 루피에게 앙금 따위도 남아있지 않다고 코비에게 선언한 적이 있다.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쉽게 마음을 정리하기는 힘든 법이다.
실로 치졸하고 옹졸한 패배감. 복수심.
잊지 못한다면 차라리 발전의 계기로 삼아주겠다며, 해군장교가 되어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서, 그들을 군대의 힘으로 눌러버린다는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고, 노력했다. 그래서 그 짧은 기간에 중사라는 목표에 오르고-그 것으로 그들을 잊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감정은 어디에 남아있던 것일까.
그것은 패배감 과도, 복수심과도 명백하게 달랐다. 처음 인식한, 하지만 줄곧 느끼고 있던 그 것. 처음 탄 배에서 울렁이는 멀미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고, 열등감과는 비슷하지만 조금 뉘앙스가 달랐다. 이름 모를 그 감정으로 심장이 불쾌하게 일렁인다. 두근, 두근, 두근, 호흡이 조금 가빠져 온다.
거프중장 휘하는 물론, 대부분의 해군 부사관 들에게는 원래 개인실이 제공되지 않는다. 보통 거대한 방에서 남자 수십 명이 우글우글 들어차, 먹고 마시고 훈련하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다. 하지만 최근 승급한 헤르메포와 코비 두 사람은 지금 작은 개인실 하나를 특별히 허가받아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편애 따위가 통할 만큼 약해빠진 직장도 아니고, 거프중장이 그런 쪽의 배려를 해줄 리도 없으니 특별한 경로로 얻은 개인실은 아니다. 단지 한참 ‘체’를 연습하던 코비가 연습에 너무 심각하게 빠졌던 나머지 잠결에 침대 두개를 부셔먹어서 쪽방으로 쫓겨나고, 쫓겨나는 김에 헤르메포도 셋트로 쫓겨났을 뿐이다. 새삼스럽게 생각해도 참 스스로가 불쌍해지는 일이지만 어차피 사내냄새들이 그득그득 풍기는 돼지우리에서 탈출한 거니 어떤 관점으로는 감사한 마음까지 들었다. 뭐, 잠잘 때마다 희생된 침대의 매트리스가 그리워지지만, 그것만 뺀다면 그럭저럭 버틸 만 했다.
“들어간다-.”
몇 번의 노크를 끝내고 삐걱 이는 낡은 문을 연다. 노크에 인사라니, 자기가 생각해도 진짜 많이 변했구나 싶어 입가에 쓴웃음이 지어진다. 처음 이 방으로 짐을 옮기던 날. 뒤틀린 문을 수리하던 코비는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는 진짜 실력으로 멋진 개인실을 받아요.
그렇게 말하던 그 눈빛이 무언가 부담스럽고 부끄럽게 느껴져서 결국 그날 썬글라스를 맞추었다. 하지만 그의 취향이 예사롭지는 않았는지 코비와 다른 사람들은 그와 눈을 마주치기를 거부했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거프만이 훌륭한 취향이로군! 이라며 큰 소리로 웃어재꼈다. 별로 기분 좋은 평가는 아니었다.
“나갔나?”
작은 방안은 그가 밖에 나가기 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침대 대용의 해먹이 나란히 두 개. 잡동사니와 책이 쌓인 낡은 책상, 잡다하게 얻어온 책들이 제법 늘어난 책꽂이가 하나, 옷장대용으로 쓰는 나무상자 두 개, 아무렇게나 던져진 티셔츠와 바지들. 연습용 목도며 훈련도구들이 한쪽 구석을 채우고 있다.
뭐. 가뜩이나 머릿속도 복잡한데 오히려 그가 없는 쪽이 낫겠다는 생각도 들어서 품속에서 전단지 뭉치를 꺼내 들었다. 그냥 책상에 올려두고 오늘은 혼자 바다나 보거나 갑판에서 낚시나 배우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불행히도 야트막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책상위에 수북이 쌓인 책더미 너머에서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고개를 든다. 크고 동그란 안경 너머로 마찬가지로 동그란 눈, 새까맣고 작은 눈동자가 잠에 취한채로 시선을 마주쳐왔다.
“다녀왔어요. 헤르메포씨?”
“으. 응.”
갑작스런 인사에 놀라 얼떨결에 전단뭉치를 뒤로 숨겨 버렸다. 코비는 피곤한 건지 커다랗게 기지개를 켜고는 약간 우물거리는 어조로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아. 마침 잘 오셨어요. 하암. 줄게 있었거든요.”
졸음이 가득한 웃음을 짓고는 잡다하게 어지러진 책상 위를 여기저기 뒤지더니 결국 자기 상의의 주머니에서 무언가 작은 봉투를 꺼낸다. 졸린 듯 눈을 몇 번 매만지다가 봉투를 헤르메포에게 던져 왔다. 가볍게 낚아챈 봉투에는 파란색 해군마크와 해군통판본부의 상점명이 적혀져 있었다.
“선물이요.”
베시시하고 웃는 코비의 얼굴에는 기분 좋은 노곤함에 묻어나왔다.
헤르메포에게 있어서도 휴일이었지만 그건 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그 피로는 그에게 더 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헤르메포가 쿠쿠리에 익숙해져 중사의 칭호를 따는 동안, 그는 해군에서도 꽤나 상급의 사람들만이 구사할 수 있다는 ‘체’를 습득했다. 이등병도 아닌 잡무병에서 시작해서 2년.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체득속도- 당연히 그 훈련은 상상을 초월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놀면서 보내는 것은 지금의 둘에게 낯선 것이 당연한 상황이었다.
“마음에 들까 모르겠어요.”
코비가 쑥스럽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분명 가벼운 봉투가 어째서인지 손안에서 묵직하게 느껴져 왔다.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자 머리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검고 광택 나는 재질에 황동으로 이리저리 모양을 낸 그것은 헤르메포가 최근 맞췄던 썬글라스와 마치 한 세트 마냥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이거-”
그에게 머리핀을 들어 보이며 설명을 요구하자, 그가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요즘 연습하는데 머리 때문에 곤란해보여서 지난 번 통판에 주문했어요. 그런데 전해주는 걸 잊어버려서요.”
개인에게서 선물을 받은 것이 언제였던가.
기억하는 한도를 짚어본 결과- 이 선물이 처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스트블루의 해군들에게서 그의 어머니가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다는 소리를 들었었지만 그에게 그런 어머니의 기억은 없었다, 기껏 선물이라고 받아 봐도 그의 아버지에게 아부하듯 전해지는 뇌물들, 아니면 아버지가 인심 쓰듯이 건네주는 돈주머니 정도였을까.
그는 난생 처음 맞이한 이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어떤 표정을 지어야하는지 고민했다. 그리고 막막한 느낌의 침묵이 조금 더 흐른 뒤, 떨떠름한 표정으로 겨우겨우 할 말을 찾아냈다.
“고마워.”
퉁명스럽게까지 들리는 형편없는 인사. 그런데도 코비는 별거 아니라며 웃어보였다. 따뜻한 분위기. 헤르메포는 손바닥에 머리핀을 매만지며 답지 않은 감동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잊어버린 것이다.
방문 앞에서까지 하던 고민의 정체도,
전달하기로 약속했던 수배전단도.
모두. 깨끗이.
- 2 -
코비는 깊은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술냄새를 지독하게 풍기는 그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잔뜩 남은 나무술통을 골치 아프다는 듯 쳐다본다. 이거. 혼자 어떻게 끝낸다지.
한참 간지러운 분위기를 만들던 두 사람에게 나타난 것은, 커다란 술통을 한손으로 거뜬하게 들고 온 거프중장이었다. 애송이들아! 선물이다! 라며 호탕하게 웃던 그는 니들이 사내새끼들이라면 한 방울도 남기지 말라는 말과 함께 술통을 하나 던져주었다. 그 사람 나름의 진급축하인사로 보였다.
“어이. 일어나보라고.”
쿡쿡하고 잠든 코비를 손가락으로 찔러본다, 하지만 맥주 한잔을 마시고 뒤로 곯아떨어진 녀석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없다.
거프중장의 명에 거역할 생각도 없거니와 어떻게 버리던 분명 들키고 말테니-결국, 혼자 다 마셔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헤르메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고작 한 잔에 뻗어놓고 무슨 해군장교가 되겠다는 거야.”
결국 한숨을 쉬곤 맥주를 한잔 크게 따랐다. 안주라고 해봐야 지난번에 거프가 잡은 해왕류를 재료로 코비와 둘이서 심심풀이삼아 만들었던 육포가 끝이다. 독이 들어있는 건 아닐 것이라 믿으며, 한입 조심스럽게 먹고는 맥주를 흘려보냈다.
간만에 마시는 두 잔째의 알콜이 목구멍으로 시원하게 넘어갔다. 뭐. 이걸 다 마시는 일은 큰일이라지만 적어도 지금의 몇 잔은 기분이 좋다.
“지금은 상사인가……”
지금 저렇게 형편없이 뻗어 있는 녀석은 내게 해군장교가 되겠다고 말했다.
삐걱이는 그 지붕위에서-지금보다도 형편없는 몰골로 녀석은 그렇게 말했다. 바로 방금 전까지 창문을 닦던 잡부주제에, 반짝이는 눈으로 꿈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며,
“바보 같은 놈.”
같은 잡부니까 친구라면서-
“얼간이.”
그래도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포를 막아섰다. 그리고 꼴사나웠지만-같이 싸워주었다. 위기의 순간에서도 친구라고, 말해주었다.
“머저리”
버리지 않았다.
“천치새끼.”
술 한 잔에 비꼬는 말을 붙이며 그 기억들을 안주로 술을 마신다. 하지만 조금 수상했던 해왕류육포도 떨어지고 더 이상은 부를 단어도 없어져서 결국엔 생술만 들이켜야 했다.
이 정도쯤이면 차라리 취하는 쪽이 좋을 텐데, 이상할 정도로 정신은 또렷했다. 혹시 체력이 늘면 주량도 느는 걸까, 하지만 자신보다도 강해진 주제에 바닥에 꼴사납게 엎드려 이불을 돌돌 말고 꼼지락거리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문득 아까 피다만 담배가 생각나 주머니를 뒤적였다. 고작해야 한 모금 밖에 빨지 않은 담배가 궁싯맞게 꼬부라져 있다. 그 모습이 마치 예전의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아서 웃는다.
“루피……”
이불을 끌어당기던 코비가 잠꼬대를 지껄였다. 예전, 해군본부에 오기도 한참 전-잡부로 지낼 무렵에도 녀석은 잠꼬대로 루피의 이름을 부르곤 했다.
그가 처음 사귄 친구면서 꿈을 인정해준 사람. 녀석이 루피라는 이름을 말할 때면 언제나 반짝이는, 살아있는 눈을 한다.
“첫 친구라.”
그 어감을 되살려 불러 보았다. 입안에 잔뜩 배인 지독한 술냄새가 목소리를 타고 올라온다. 그의 첫 친구가 루피라면, 나에겐 이 꼴사나운 녀석인가.
헤르메포는 그 일이 별로 우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킥킥킥 하고 밖으로 소리 내며 웃었다. 담배 불을 붙이려던 작은 성냥갑을 손으로 잡아 던져 받기를 반복한다. 성냥갑은 팔랑이며 제 자리에서 올라가고,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친구. 간질간질한 단어잖아.
그는 무의식중으로 아까 숨겼던 밀짚모자 일당의 전단지를 꺼냈다. 눈빛이 예전처럼 탁하게 가라앉는다. 웃음이 더 깊어졌다.
키들키들키들키들.
음침할 정도로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그대로 성냥불을 지피고는, 화르륵. 종이 속의 그 웃는 얼굴에 불을 붙인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던 그것은 이내 오징어를 굽는 냄새를 나며 빠르게 타들어갔다. 루피라는 이름도, 이빨도, 입술도, 커다란 눈도, 그 모든 것이 까맣게 그을리더니만 형체를 잃어간다. 헤르메포는 한참이나 그것을 쳐다보다가, 손가락이 데일 정도로 가깝게,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조각이 된 후에야 손을 놓았다. 나무로 만들어진 바닥이 혹시 타버릴까 한순간 당황했지만 바닥에 방염가공이라도 되어 있는 것인지 불은 쉽게 멎었다.
불을 끄려고 들어 올렸던 물통을 내려놓고는 한순간 멎었던 웃음을 다시 터트렸다. 나는 지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거지같기만 했다. 이 상황이. 자기 자신이.
차가운 바닥에서 잠든 코비를 바라본다. 뭐가 그리 좋은 건지 비실비실 웃으며 자고 있다. 너도 기분이 좋냐. 나도 지금 너무 기분이 좋아.
“감기 걸리겠다.”
술에 취했지만 일어나거나 걷지 못하는 정도는 아니어서 웃챠 하고 일어나 녀석을 이불 째로 들어올렸다. 한순간 휘청하긴 했지만 그래도 움직일 만은 하다.
그나저나 어째서 이렇게 가벼운 거지? 하는 의문이 든다.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시간을 자고 같은 훈련을 했는데, 물론 전체적으로 키도 크고 외모도 달라졌지만 아직도 몸무게는 한참이나 가볍다. 열심히 함께 만든 근육도 빠르게 커진 키로 분산되어, 팔도 다리도 가늘다는 인상만이 강하게 남았다. 이래서 어디 장가라도 보내겠나.
혹시나 잠결에 안경이라도 깨질까 싶어 조심스럽게 벗겨내고, 자기 몫의 이불도 한 겹 더 덮어주고 나서야 조금 안심이 된다.
‘체’를 습득한 코비는 그보다 강했다. 요즘은 붙어보지 않았지만 그 사실을 착각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거프중장은 둘 다 고만고만한 애송이라고 했지만 일단 둘이 받은 계급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해군은 철저한 계급제와 실력제를 신봉한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헤르메포는 그보다 약했다.
하지만 이렇게 잠든 얼굴을 보고 있으니-이 녀석 정말 어리구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사실 이런 외모를 하고 있지만 헤르메포의 나이는 고작해야 17세에 불과했다. 친구라면서 그의 나이를 물어본 적은 없지만-코비는 그보다도 훨씬 작은 것 같다. 키도, 손목도, 발목도, 무엇보다 앳된 티가 남은 통통한 얼굴을 보면 확실히 어린 티가 난다.
문득 손을 조심스럽게 뻗어 녀석의 머리카락에 가져다 댔다. 군용 싸구려비누로 감은 분홍빛 머리카락은 부스러진 지푸라기처럼 폭신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머리카락을 만지던 손길은 자연스럽게 오렌지색 조명으로 비춰진 하얀 얼굴로 내려왔다. 조명의 탓인지, 아니면 딱 한잔 마셨던 술의 탓인지 얼굴은 열에 들뜬 듯 붉었다. 헤르메포는 애완동물을 만지는 아이 같은 호기심으로 여드름 하나 없는 볼을 쓰다듬어 보았다. 여리고 부드러운 피부는 생각처럼 뜨겁기 보다는 오히려 서늘한 느낌으로 손가락에 닿았다.
평소에도 손을 잡거나 등을 밀어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는 만져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그를 조금 흥분시켰다. 그래서 그는 용기를 내어-코비의 볼을 쭈욱하고 잡아 늘렸다.
“네녀석, 자는 척 하는 거 아냐?”
장난이라지만 힘을 주어 늘린 탓에 두 볼에 빨간 자국이 남겨졌건만, 그는 조금 웅얼거렸을 뿐 다시 꿈나라로 향했다. 평소에 훈련하자고 하면 재깍재깍 일어나더니만 오늘은 아무래도 마음먹고 깊이 자려는 모양이다.
애써 쳐다보지 않던 술통을 다시 바라보았다. 아직도 술은 잔뜩 남아있었고, 남은 밤 또한 아득히 길었다. 시간이 남았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절망해야 하는 것인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다음날 아침엔 결국 늦잠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식당에 갔지만 역시나 밥은 다 떨어져서 결국 쓰린 속을 부여잡고 갑판으로 향했다.
갈매기들은 어디서 온 것인지, 까악 까악 까마귀 같은 소리를 내며 제 정체성을 잃고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역시 술은 마실 게 아니다. 특히나 와인이나 마시던 그에게 싸구려 맥주는 숙취라는 더한 고통으로 남았다. 이렇게 괴로운 줄 알았다면 마시지 않을-리가 있나. 그래도 마셨어야 했겠지.
일어나서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올 때까지도 어제 밤의 자세 그대로 잠들어 있던 코비를 떠올리자 왠지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누구는 한 잔 마시고, 누구는 그 한 잔을 뺀 한 통을 마시는 세상이라니. 세상은 역시 불공평하다.
어제 볼을 잡아 늘리는 게 아니라 아예 그 상태로 갑판에서 굴려버릴 걸 그랬다고 후회하며 이빨을 갈았다.
그 때 뭔가 갑판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린지 싶어 내려다보니 해군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오글오글 떼를 지어 무언가 요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째 사람이 많은 가 싶더니 이 함뿐만 아니라 다른 함의 선원도 보인다. 그러고 보니 오늘 뭔가 한다고 했던 것 같기도-아 그래. 바자회를 한다고 했다.
군대 내에서 바자회라고 한다면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냐고 하겠지만, 한배에 타고 있는 선원이 20명에서 120명까지 워낙 많을 뿐만 아니라, 한 번 나오면 항해를 계속 하면서 쓸모 있는 상점이 있는 섬을 들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바자회는 심심찮게 열리는 법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쓸모 있는 것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술이나 책, 시계, 각 섬의 기념품이나 간식거리 따위라서 처음 구경한 이후로는 한 번도 간적이 없다.
하지만 그의 파트너는 이 바자회를 꽤 좋아했다. 어디 산골마을에서 처음으로 도시에 구경하러 나온 소년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이것저것 정보를 듣기도 하고, 별로 쓸모가 없어 보이는 해도며 책도 수집하곤 했다.
뭐 아무튼지 그렇게 쓸모없는 바자회지만, 그래도 어제 열렸었다면 안주라도 사고 좋았을 텐데 어째서 이런 날은 꼭 날짜가 맞지 않는 것인지 의문을 가져보다가 몸을 억지로 일으킨다.
손가락의 끝에 어제 선물 받은 머리핀이 걸려 있었다. 그래. 배도 출출하니까 뭐라도 먹는 길에 혹시라도 괜찮은 물건이 있다면. 딱히 보답이나 그런 걸 할 성격도 아니지만. 그래도 만약-좋은 물건이 있다면.
머리핀을 몇 번 열었다 닫는다. 금속의 이음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조금은 날카롭게 들렸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 헤르메포는 입을 헤 벌리고 썬글라스로도 감춰지지 않는 멍청한 표정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음식 핑계를 대더니만 결국 들고 온 것은 꽃무늬가 화려한 헤어밴드 하나였다.
노랑과 빨강. 거기에 꽃무늬. 남자에겐 조금 화려할까 싶지만-그래도 코비는 아무래도 화려한 문양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괜찮을 것 같다.
일전에도 꽃이나 줄무늬 같은 선명한 색상의 옷을 입은 여자만 보면 늘 놀란 얼굴로 되돌아보곤 했었으니까. 그러니까. 아마 이런 종류를 좋아할 것이라고-헤르메포는 나름대로 그렇게 완벽하게 어긋난 근거를 대며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은 것도 처음이었지만,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는 것도 처음.
처음이라는 울림이 그의 걸음을 빠르게 만들었다.
아니, 뭐. 특별한 선물 같은 건 아니다. 대단치도 않은 물건이고 원래 세상은 기브 & 테이크라고 아버지가 그러셨고-평소에 신세를 진 것도 있고 그러니까.
하지만 워낙 경험이 없다보니 작은 망설임도 함께 생겨난다.
만약에 싫어한다면 어떡할까.
솔직히 말해 남을 위한 물건을 골라본 적이 없었다. 받는 사람의 기분 같은 거 알게 뭐였을까.
일부러 특별히 주문했던 맞춤 머리핀.
그런 것과 이 헤어밴드가 동등한 가치를 가질 자격이 있을까. 아니 애당초 나 따위의 녀석이 고른 선물이니-
“아니. 괜찮아.”
그 녀석은 분명히 웃어줄 것이다.
기뻐해줄 것이다.
그 녀석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대책 없이 상냥하니까. 아마도 많이 좋아하고-아니면 뭐. 좋아하는 척이라도 해줄 것이다.
그렇게 근거 없는 결론이라도 내리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 져서 이내의 넋이 나간 듯 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남을 위한 일이란 멋진 일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란 말인가, 춤추듯 발을 딛는 그에게서 주변사람들이 피해갈 만큼의 행복의 오오라가 퍼져나갔다. 조금 기분 나쁜 광경이다.
그가 느낀 일생일대의 행복.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행복의 순간은 너무나 짧았다.
- 3 -
어째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날아가 바닥에 떨어진 썬글라스를 바라보며 헤르메포는 작은 질문을 던졌다.
방금 전까지의 즐거웠던 기억들이 기억의 저 편으로 날아가, 생각은 완전히 백지가 되었다. 화가 난다던가, 짜증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의문만이 백지가 된 머릿속을 차곡히 채워 나간다.
어째서?
소란스러운 복도의 소리들은 이제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방안은 더없이 고요했다. 침묵. 방금 전에 일어났던 날카로운 소리만이 울리듯 귀에 맺혀있었다.
왼뺨이 조금 늦지만 몹시 붉게 달아올랐다. 차게 식은 몸에서 얼굴만이 제 혼자 불타오르는 것 같다.
모든 것이, 지금 이 방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저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낯설다. 익숙한 기분, 그래. 지금의 이 풍경은 언젠가 아버지를 따라가서 본 연극을 닮았다. 등장인물들은 시나리오대로 연기를 하고 자신은 푹신한 좌석에 앉아 사건을 경청하며 머리에 질문을 던진다.
‘코비는 어째서 그를 때린 거지?’
한 번의 질문이 이루어지자 다음의 질문은 몹시 쉬웠다.
강제의 힘으로 반바퀴 돌려졌던 시야가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오며 방을 관찰한다. 맞은 사람은 그인데 정작 울 듯 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가해자 쪽인 코비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등장인물을 제외한 모든 무대는 어제와도, 오늘과도 같았다. 아니, 오늘 새로 사온 헤어밴드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본다.
‘선물은 어째서 바닥에 떨어져있지?’
둔한 정신으로 주워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뜬금없이 그 것을 위해 지불했던 지폐의 개수를 떠올렸다. 이어서 판매를 하던 군인이 낄낄 웃으며 팔꿈치로 찔러오던 것도 생각해낸다. 여자친구에게 선물이라도 하려는 거야? 그 저속한 웃음과 질문에 자신은 어떻게 대답을 했던가.
“변명도, 하지 않는 겁니까?”
기억해냈다. 친구에게, 내게 단 하나뿐이었던 멍청한 녀석에게 주겠다고, 녀석이나 할법한 부끄러운 대사를 그렇게 입에 담았었다. 그래, 그때는 그렇게 입이 잘 떨어졌는데 왜 지금은 이렇게 입이 열리지 않는 것인가.
“알고 있었잖아요, 헤르메포씨, 제게 그가 어떤 존재였는지……당신은 전단이 아니라, 제 꿈을 태운 거에요.”
코비는 왜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 걸까. 그가 화내는 모습은 보기 싫은데, 내 단하나 뿐인-친구인데. 그래서 웃게 만들어주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 사실은 알고 있지만 모른 척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어제의 저녁과 달라진 것이라면 손바닥에서 던져진 헤어밴드와 날아간 썬글라스 말고도 하나가 더 있지 않은가. 해먹의 곁에 남겨진 루피일당의 수배전단. 그리고 이제 불타버린 한 장.
“그 때의 일도, 당신이 한 거였죠?”
멀리 떠났던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이럴 때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는 건지 몰라서 일단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말을 꺼낸다. 그래. 변명을-아니, 설명을 하면 되겠다.
그래. 코비는 착하니까 아마 잘 설명하면 납득할 것이다. 술 때문이었다고 너무 취해서 실수로 태워버렸다고 그렇게 설명하면, 들어 올렸던 네 몸무게가 예전보다 훨씬 늘어서 이젠 해먹에 얹어주기도 힘드니까, 앞으로는 절대 술 마시면 안 되겠다고 그렇게 농담을 곁들이면, 훌륭한 대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당신, 최악이네요.”
방긋, 하고 코비가 웃었다.
어제와 너무나 똑같은 웃음, 순박하고 행복한 듯 보이는 그 표정에 헤르메포는 오히려 한순간 할 말을 잊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거지?
나는-하고 설명을 하러 입술을 떼기도 전에 쾅쾅거리는 발소리가 밖으로 이어졌다. 짓다만 웃음이 어색하게 매달려 있다가 끝내 이상한 표정으로 일그러졌다.
짙은 패배감. 뺨을 만지자 뜨겁고 울컥하는 무언가가 만져졌다. 입 안이 찢어진 건지 미처 느끼지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로 입 안 가득히 쇠맛이 강하게 돈다.
어제는 술이더니, 오늘은 피, 정말-오라지게 기분 나쁜 휴일이다.
“둘이 싸운 거야?”
난장판이 되어있는 바닥을 하이힐로 피해 밟으며, 여소위가 나지막하게 물음을 던졌다. 쓸데없이 오지랖이라며 당장 지랄이라도 떨면서 쫓아내고 싶지만 상대는 소위님, 게다가 여자다. 굳이 상대해봐야 결국 거프중장에게 자기만 쪼일 뿐이다. 그래서 결국은 말을 흐리며 알아서 생각하기를 바라고 청소를 계속했다.
방은 아까 둘이 말다툼, 아니 한쪽이 일방적으로 화를 내던 상황에서 끔찍할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평소에도 지저분한 방이었지만 이쪽은 파괴되었다는 인상이 확실히 어울린다. 쓰러진 책장, 흩어진 책들과 흩날리는 종잇장.
“책장을 완전히 들어 엎었네. 그것도 위쪽 칸까지, 이거 헤르메포군이 한 짓?”
해군이란, 게다가 여자의 나이로 해군소위까지 오른 사람이란 정말 대단하고 새삼스럽게 까달았다. 물론 자기가 한 짓이 맞지만 한 번 슬쩍 본 것만으로 알아내다니. 이 여자 앞에서는 완전범죄는 조금 힘들어 보인다.
“책상이 완전히 동강이 났네. 랄까, 이거 칼로 자른 느낌인데?”
이제는 사인까지 분석해내고 있는 건가.
조금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한편, 조금은 잘되었다는 판단도 같이 들었다. 둘이 싸웠다는 것과 한 쪽이 일방적으로 기물을 파손했다는 쪽, 둘 다 들키면 징계감이지만 그래도 이 일의 원인이 된 쪽은 자신이었고, 결정적으로 그가 나가고 홧김에 물건들을 집어던지고 쪼갠 것도 자신이었다.
“제가 어제 술을 마셔서 홧김에 부셨습니다. 소위님.”
‘술을 마셔서’와 ‘홧김에 부셨습니다.’사이에 뭔가 굉장히 많은 말들이 생략된 것도 같지만 거짓말은 아니다보니 자연스럽게 진실성이 부여되어, 강한 설득력을 보였다. 성질은 고약한 주제에 워낙 거짓말을 하지 못해서 사람들에게 유난히 굴림 당하던 헤르메포의 모습을 아는 소위이다 보니, 이 말에는 납득한 모양이다.
그녀의 눈썹이 좁혀 들었다. 얕게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끼더니 설교하듯 씁쓸한 목소리를 뱉어낸다.
“기물은 내가 적당히 구해서 넣어줄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네. 죄송합니다.”
그래. 이쪽이 나은 선택이다.
자기희생이란 이미지는 자신과 끔찍하게 어울리지도 않지만-어차피 자신이 저지른 일에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이전의 아버지 일로 끔찍하게 깨달았으니까.
“그리고……”
그녀가 얼굴에 고양이 같은 미소를 띠고, 살짝 손을 움직여 헤르메포를 불렀다. 살랑이는 머리카락 사이에서 달콤한 향기가 배어 나와서 무심결에 움츠려 들었다.
향수냄새와 함께 숨소리마저 들려오는, 그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해 왔다.
“화해. 하지 그래?”
헤르메포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녀가 방금 들어왔던 문을 가리켰다. 반쯤 열려진 문의 틈사이로, 익숙한 색의 머리카락이 비쳐보였다.
사과의 말은 어렵다.
게다가 자신이 실수한 일일수록, 벌어진 일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미안해. 라는 단어는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헤르메포는 정작 해야할 단어는 잊은 상태로 머뭇거리며 변명을 내뱉었다.
“술기운이었어.”
뱉고 나서야 이 말을 할 시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터져나간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차. 싶은 마음에 다시 머릿속을 뒤져서 할 말을 찾는다.
“술, 많이 마셨어요?”
뜻밖에도 말을 다시 꺼낸 쪽은 코비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아 그 심정은 알 수 없지만 목소리만은 아까보다 훨씬 안정된 듯 잠잠한 어조였다.
“너, 술 진짜 약하더라.”
어쩐지 웃으면서 말을 꺼낼 수 있어서 키득하고 웃으며 생각하던 말을 꺼냈다. 밤사이 내내 생각한 부분이라 이야기는 막히지 않았다.
“한잔 마시고 꿈나라로 가다니.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잠깐의 침묵, 이어지는 코비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조금 빠른 어조였다.
“이 나이에 음주에 능숙한 쪽이 이상하잖아요?”
무심코 웃으며 한걸음, 그를 향해 내딛었다가 다시 한 발 물러섰다.
어렵다. 사과의 말보다도 지금의 말이 그에게 닫고 있기는 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단지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가벼운 말장난 뿐,
“내가 좀 방탕하긴 하지만 말이야.”
작게 웃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다시 대화는 멎었지만 아까의 침묵보다는 견딜 수 있을 만큼 한결 공기가 가벼워져 있다는 것을 둘 모두 알고 있었다.
“헤르메포씨. 많이 아팠어요?”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조금 망설이다가, 겨우 질문을 돌렸다.
“……너도 많이 아팠지?”
이번의 대답에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진지한 목소리.
“……한마디면 괜찮아 질 겁니다.”
결국 직구를 던지게 하는 건가. 끝까지 청춘을 추구하는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헤르메포는 허탈한 웃음을 지어버렸다. 하긴, 그랬었다. 너는 처음부터-
“미안해.”
생각보다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말은 짧았지만, 그걸로 충분한 단어였다. 문을 밀며 조용히 걸어들어온 코비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저도 어린애같이 굴어서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실꺼죠?”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언저리가 어쩐지 붉어 보였다. 하지만 그보다도, 언제 가져갔는지 모를 알록달록한 무늬의 머리띠가 이마에 채워져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어쩐지 울컥이는 기분이 들어서 무언가 목으로 새어나오는 울음을 참는다.
“하지만, 이 머리띠 좀 센스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유행을 모르는 녀석이로구만.”
헤르메포는 주머니에서 머리핀을 꺼내서 머리를 묶어 올렸다.
잠시 그대로 마주보고 있다가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었다. 헤르메포가 커다란 손으로 코비를 끌어안았다.
다시 찾은 친구를 끌어안고는 온기를 느끼며 눈을 감는다. 헤르메포는 지금, 친구의 웃는 얼굴을 위해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거짓말을 하자]고 결심했다.
‘그래, 코비, 지난 번 전단을 태운 것도 나야.’
말하지 않고 생각을 삼키며 그는 연하게 웃었다. 말하지 않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니까-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성의 어딘가에서 지금의 자신이 망가진 것도 같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세상은 정말로 불공정하지 않은가. 밀짚모자 루피에게는 모든 것이 있다. 해적으로써의 명예도-친구도-동료도-돈도-. 헤르메포가 가지고 싶어 하던 모든 것들을 그는 이미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이 건, 내가 가져도 된다.
뒤틀리고 잘못된 그 자신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올곧고 바른 눈빛을-반짝이는 이 햇빛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주지 않을 것이다.
동의도 구하지 않고, 친구도 연인도 눈앞의 사람에게 필요 없다고 단정한다. 그래, 정 살아가면서 그게 필요하다면 내가 그 모든 것이 되어주면 된다. 그러면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고 결국 우리는 행복해질 것이다. 그렇게 결론내리고 그는 친구를 더 깊게 끌어안는다.
한순간 잃어버린 것의 아득함을 기억하기에 지금의 행복에 감사한다.
색을 입힌다면 분명히 검은색일 불쾌한 감정이 기쁨이 되어 그의 뇌리를 잠식해 들어갔다. 끝없이, 아득하게.
문득, 방청소가 큰일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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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 4년지났으니 풀어보는 글, 지금도 좋아하는 글이에요. 코비는 지금도 귀엽다...
동의도 구하지 않고, 친구도 연인도 눈앞의 사람에게 필요 없다고 단정한다. 그래, 정 살아가면서 그게 필요하다면 내가 그 모든 것이 되어주면 된다. 그러면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고 결국 우리는 행복해질 것이다. 그렇게 결론내리고 그는 친구를 더 깊게 끌어안는다.
한순간 잃어버린 것의 아득함을 기억하기에 지금의 행복에 감사한다.
색을 입힌다면 분명히 검은색일 불쾌한 감정이 기쁨이 되어 그의 뇌리를 잠식해 들어갔다. 끝없이, 아득하게.
문득, 방청소가 큰일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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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 4년지났으니 풀어보는 글, 지금도 좋아하는 글이에요. 코비는 지금도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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