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일본은 봄인가."



 고우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얀 입김을 뿌렸다. 이번의 일만은 견디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하던 것도 바로 어제 같은데 지나간 날짜가 양손의 손가락 수를 훌쩍 넘겨 몇 개월을 더 지났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아래의 검정을 스쳐, 바로 어제의 일처럼 선명히 떠오르는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을 하나 둘 떠올리다가 눈을 뜬다.


 얼굴에 스치는 바람이 차다. 계절의 차이는 둘, 시간으로는 비행기로 10시간 조금 더, 그런데도 아이러니하게도 시차는 없는-그래, 지금 고우는 호주에 있었다. 그리운 사람들과 너무 가깝다고 말하기에는 멀고, 너무 멀다고 말하기에는 그렇게 멀지도 않은 거리에.


 생각이 난 김에 스마트폰을 꺼내 인터넷을 잡아보니 다행히 신청해뒀던 권역 안이다, 잠시 망설이다가 스마트폰으로 짧게 메일을 찍었다.



 [send 고우 : 일본에 벚꽃은 피었어? 두 시간 뒤 정도에 통화 가능할 것 같은데 괜찮다면 회신 줘.]


 [send 키리코 : Re : 그럼, 언제든지 가능해, 준비해 둘게.]



 그리운 이름이 새겨진 빠른 답장에 고우의 발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직접 만나러 갈 수는 없더라도-이어져 있으니까-그러니까 괜찮아. 가볍게 쥔 손안이 희미하게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것에 대한 위로인지도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로 습관처럼 웃으며 발을 딛는다. 고우에게는 몹시 익숙한 행위였다.




 [봄을 너에게]

 -for 세파론님


 2016 05 07








 그래, 고우는 지금 아이패드를 소유하고 있다.


 이 짧은 문장, 어찌 보아도 특이한 점이 없으며 심지어 흔한 광고 문구처럼 보이는 이 평범한 한 줄의 글은 고우라는 주어와, 아이패드 중에서 패드-라는 PAD, 납작한 형태의 전자기기라는 디자인적 특징을 합치는 순간 주어인 고우를 몹시 괴롭히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사실 고우는 정말, 정말 이 형태의 전자기기를 사고 싶지 않았다. 구태여 구질구질 길게 설명할 것도 없다. 지금 당신이 떠올린 그 이유다. 일본에 돌아가서 겪은 시간을 공유하는 고우의 지인들이라면 별다른 설명 없이도 쉽게 이해해 줄 듯한 명백한 개연성마저 존재하고 있는 납득할 수 있는 이유말이다. 아아-그 납작한 화면-액정 안에 떠다니던 그 존재로의 연상, 차마 이름을 부르는 것에도 사무치게 분노가 차오를 정도로 이 전자기기는 방심한 순간마다 고우를 고통스럽게 만들고는 했다. 아니, 이제 없으니까, 아니, 그래도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이 도구를 장만한 이유라고 하면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 속에서 흔들리던 친애하는 누이의 얼굴과 그 뒤로 보이던 그리운 사람의 얼굴들-거리는 멀어져 있음에도 그들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지 않을까?하던 충동의 결과였다. 시간이 오래 지난 것도 아니지만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날에는 이따금 사람은 납득하기 어려운 미친 짓을 저지를 수도 있는 법이니.


 처음에는 아예 사용하고 싶지 않았고, 겨우 사용한 것도 일주일 전, 플랫폼에서 제공되는 인터넷 프로그램을 통해 채팅하던 것이, 큐가 큰 화면으로 오히려 심하게 느껴지는 노이즈와 렉을 견디지 못하겠다며 자체적으로 소프트웨어를 만들어주어서, 인터넷이 기반 되는 환경이라면 조금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단지 한 번 통화했을 뿐인 큐에게 이 시점에서 존경을 담은 감사 인사를 한 번.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금방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일본인이나 한인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 심하지는 않은 교외에 잡은 2층 짜리 단층집은 동화책에서 삽화로 나올 법한 익숙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점심을 준비하던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네고 2층으로 계단을 오른다. 저녁을 안에서 먹겠냐는 질문에 먹겠다고 대답하고는 열쇠로 방문을 열었다. 이상하지, 카드키도 열쇠도 기능 상의 차이도 없는데 기묘하게 집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 다시 방문을 잠그고 가방을 침대에 던지고는 몸도 던졌다. 이전에 사용하던 누군가가 두고 갔다는 농구공이 굴러다니는 방안의 풍경은 어딘가 소년이 사용할 듯한 파란 톤이었다. 그러고 보면 처음 미국에 갔을 때 지내던 숙소도 꼭 이런 느낌이었고 그 다음에-


 아니, 방금 떠올린 시간은 절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 내리고 조급한 느낌으로 가방을 열어, 아직도 목격한 직후에는 복잡한 기분이 되고 마는 아이패드를 잠시 노려보다가 빠르게 부팅 한다.


 패스워드를 입력하고 나타난 것이 검은 화면이 아닌, 특상과의 모두가 밝게 웃는 모습이 들어가 있는 배경화면이라는 것에 새삼스럽게 안도하며, 누가 큐가 만든 것이 아니라고 부정이라도 했는지 [Q-시스템]이라고 기재되어 있는 아이콘을 클릭했다.


 단순한 화면이 켜지고 잠시, 익숙한 이름의 리스트에서 통화가 가능하다는 초록 불이 들어와 있는 키리코의 이름을 누르자, 곧 화면이 큐가 들고 다니던 인형의 원본이라는 일러스트와 함께 연결하는 중이라는 글자로 변했다. 큐가 이 임시 프로그램을 위해 애니메이션 회사에 사용료를 지불했다고 린나씨가 말했던 것도 같지만, 고우는 그냥 듣지 않은 것으로 해두기로 했다. 솔직히 말해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글자가 사그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한번 더 웃는 것을 시험하며 공기를 볼안에 넣어 부풀렸다 오무리며 아에이오우- 그리고-보이는 여성의 얼굴을 향해, 가능한 활짝 웃어 보였다.



 "여-! 오랜만!"


 [고우, 좀 자주 연락하라니까, 메일에 답변도 안보내고!]


 "아하하, 전파가 잘 닿지 않는 곳에 있어서."


 [메이씨가 사진칼럼은 매일매일 꼬박꼬박 도착하고 있다고 하던데?]



 거참, 메이씨, 그런 사람인지 몰랐는데. 고우는 큐의 소개로 며칠 전부터 일하기 시작한 작은 잡지의 편집장을 떠올리고는 그녀가 아무래도 정보 보안의 심각함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좌절하며 제 얼굴을 긁었다. 하지만 아예 통신 너머에서 처음 본 편집장과는 달리, 어쩐지 이미 알고 있던 사람과 이 화면으로 대화하는 것은 조금 어렵고, 내뱉는 말도 들려오는 목소리도 어딘지 낯이 선 느낌이 들어서. 그래서.


 고우는 아직 이런 소통이 불편했다.



 "아직 사무실이네."


 [퇴근시간 멀었으니까, 그래도 너와 통화하는 시간 정도는 비워뒀어]


 "책상, 지저분~"


 [오랜만에 할 소리니! 정말.]



 다행히 새로 옮긴 부서에서도 에이스 취급을 받고 있는 모양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특상과라는 특이한 부서의 소속이라 온전하게 자리를 잡는 것은 조금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키리코 본인이 아닌, 린나에게서 전해 들었다. 어쩌면 대화를 피하고 싶은 이유 중에는 소중한 키리코가 새로운 장소에서 노력하고 있는 시점에 제가 이렇게 먼 곳에 있다는 죄책감 때문인지도 모르지. 짐작이 가는 이유가 그것 밖에 없는 것이 아닌- 오히려 이유가 너무 많다는 것에 대한 씁쓸함으로 키리코의 시선을 피했다.



 "많이 따뜻해졌어? 봄이 그립다."



 지금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혹시라도 담길까. 큐가 만들어준 화면은 지나치게 선명해서 전해지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들조차 전해질까 두려울 때가 있다.



 [응-아, 잠깐 기다려 볼래, 고우?]


 "응?"



 화면이 갑자기 컴컴해졌다. 무언가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혹시 다른 동료에게라도 방해받는 건가 했다가-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조금 톤이 높아진 기색의 키리코의 목소리가 맑게 울렸다.



 [자, 봄이야!]



 화면을 채운 것은 벚꽃이었다.


 비록 한 그루 뿐인 벚나무, 그것도 주차장에 있는 것을 찍은 것이라 구도도 형편없고 화질도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운, 그럼에도 꽃인, 그럼에도 흩날리는 것들. 속에서 치미는 따뜻한 것을 꾹 눌러 삼키고는 가능한 익숙해진 웃는 얼굴이 이 순간에 어색하지 않기 만을 바라며, 고우는 되도록 활짝-다시금 키리코로 바뀐 화면을 향해 웃었다.



 "고마워, 누나. 여긴 절대로 봄이 아니지만 그래도 충분히, 기뻐. 잠시라도 봄을 봐서 좋았어."


 [속단은 일러, 고우.]


 "응?"



 키리코는 어릴 적의 고우를 타이를 때 사용하던, 단호하지만 상냥한 얼굴을 하고는 확신어린 말투로 입을 열었다.



 [고우, 절대 같은 단어를 너무 좋아하지 마. 가끔은 바라는 것도 좋지 않을까, 봄이 그 곳에 올지도 모르잖아? 믿어, 어쩌면 정말 기적은 일어나니까.]


 "동화 같은 이야기네."


 [응, 나는 동화를 믿기로 결심했으니까.]



 키리코의 말에 언제부터 그 믿음이 시작되었는지 따위는 없었음에도 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키리코도 변했고, 고우도 변했다. 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감히 성장이라는 단어를 고우 자신이 사용해도 될지는 알 수 없음에도 그 계절에는 많은 일이 일어났고, 고우와 키리코 두 사람은 강한 확신으로, 그 계절을 잊지 못할 것임을 다시금 되새기고는 하는 것이다.



 "건강하게 잘 지내. 누나."


 [너도, 고우, 이 곳에서 너를 그리워 하고 있어, 나도-그리고 다들.]



 사랑을 담은 눈빛에 고우는 그저 웃는 것 외에는 할 것이 없었다.


 화면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고 키리코와 벚꽃의 영상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잠잠히 멎었다.


 프로그램을 종료하고 바라본 화면 속에는 모두가 활기차게 웃고 있는 사진이 보인다. 다시, 이 사람들. 유독 사람들 속에서 저만이 어색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손끝으로 제 얼굴을 더듬어 본다. 벌써 이만큼 시간이 지나서 이 곳의 사람들에게는 웃는 얼굴이 참 좋다는 칭찬도 들었지만 아직은 어색하다는 것은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지난 정도의 시간이 더 흐르면 조금 더 익숙하게 웃을 수 있을까, 누나처럼, 그리고-또 보고 싶은.


 고우의 손가락이 키리코의 옆, 타이밍을 잘못 맞추었는지 한쪽 눈을 조금 찡그린 정장차림의 남자에게 향했다가 곧 닿지도 못하고 떨어졌다. 얕은 한숨과 함께 몰려드는 피로감으로 눈을 감았다. 간만에 제가 먼저 제의한 통화였고, 보고 싶던 벚꽃도 조금이지만 봤는데도 왜인지, 그렇게 기분이 많이 좋아진 것 같지는 않았다.


 언제부터 동화라던지 기적이라던지, 그런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게 되었어, 누나? 정말로 묻고 싶은 것들은 언제까지라도 목 안으로 잠겨 삼키고 있자니 눈 앞은 그저 검었다. 스스로 눈을 감아 검은 것이니, 눈을 뜨라고 누군가는 말하겠지만, 고우는 사실, 눈을 뜨고 있어도, 아름다운 것을 보아도, 좋은 사진을 찍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을 만나는 순간에도 이따금-이 검정을 마주치고는 했다. 타인들이 발 밑에 그림자를 붙이고 있는 것 만큼이나 당연하고 익숙한 검정.


 그래, 어둠 속이란 건 익숙하기 그지없다. 혼자라는 건 조금 쓸쓸하지만, 익숙하고 편한 것이기도 해서. 아마도 키리코에게, 그리고 그에게 이런 말 한다면 걱정하겠지만. 말한다고 해결할 방도를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면 구태여 하지 않아도 될 부류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계단을 오르기 전 집주인에게 저녁을 주문했던 것을 떠올리고는 준비가 빠르게 되었나 싶어 일어섰다. 혹시 표정이 어색할까 입가를 매만지다가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 앞에서 고우를 맞이한 것이 예상하던 집주인은 아니었다.



 "뭐...?"



 벚꽃이, 고우에게 쏟아졌다.


 난데없이도- 흰 빛의 분홍을 한 부드럽고 가벼운 것들이 사붓거리며 고우의, 뺨과 눈과, 머리카락을 스쳐 쏟아져 내린다. 한 차례 쏟아지는 것에 휘청이는 사이에 잠시의 틈을 두고, 다시금 쏟아지는 벚꽃의 무리, 난데없는 꽃잎 세례로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지려는 고우의 손을 붙잡아오는 단단한 손길에, 고우는 눈을 크게 떴다.


 분홍이 흩날리는 시야 속에, 그립던 얼굴이 보여서-그 순간 제가 꿈속에 있을까 의심하고 싶음에도 손끝에 느껴지는 온기와 부드럽고 익숙한 촉감이 꿈이 아님을 말해주어서, 그래서.


 기적은, 봄은, 이렇게 오기도 하는 걸까?


 고우는 환상 같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분명 어둠이 스쳐갔음에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과 탄식을 비명으로 바꾸지도 못하고 숨이 멎어버린다.


 아. 바라지 않았던, 혹은 바라던.



 "네게 봄을 배달하러 왔어."



 듣고 싶던 목소리와.



 "같이 포장하고 최대한 그대로 가져오려고 했는데 조금 시들었지만-"



 보고 싶던 얼굴과,



 "좋은 봄이지? 고우."



 기다리던 봄.



 "...말도 안돼."



 - 봄이 그 곳에 올지도 모르잖아? 믿어, 어쩌면 정말 기적은 일어나니까.



 "보고 싶었어. 고우."



 벚꽃을, 봄을 배달했다는 말도 안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말하면서-거리와 시간을 뛰어넘어 바로 이 곳에서, 웃어 보이는 남자를 향해서 고우는 당황과 놀람을 숨기지도 못하고 일그러진 표정으로 울듯한 얼굴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문장이 되지 못하고 흩어지는 단어와 감정들을 수습하지 못하고 본능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한 손을 뻗어 이번에는, 제 손으로 상대를 붙잡았다.


 계절과 나라를 초월하여 배달된 벚꽃송이와 꽃잎들이 그 움직임에 흔들린다. 바닥이 조금 미끄러웠다. 꽃, 꽃잎, 연한 분홍빛의, 분명 봄의 색일 그것들이 온통-온통 흔들리고 있다. 어쩌면 흔들리는 것은 시야인지도 모른다. 아아, 꽃향기로 어지러운 것인지 감정에 취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지금에도 온전하게 존재하는 건, 눈 앞의 당신.


 그를 끌어안았다. 기적은, 봄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도 찾아온다.


 키리코의 말대로, 어쩌면 동화의 이야기대로.



 "신형님..."



 껴안아 가까워진 얼굴에 가까스로 호칭을 부르며 웃었다.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웃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모처럼 다시 웃는 얼굴을 연습하곤 했지만 어쩐지 잘 웃었다는 확신이 들지는 않았다. 분명, 엉망인 웃음이겠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대수롭지는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 꽃과, 이 방에 전해진 봄과, 기적처럼 제게 당도한-사무치게 그립던 당신.


 봄이다. 봄이었다. 이다지도 사랑스럽고, 따뜻하고, 동화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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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연성, 고우신, '벚꽃 아래의 웃음' 키워드로 연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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