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보지 않아도, 발소리가 들리기도 전에도-그저 공기의 색이 연하게 울리며 부드럽고 달콤한 색으로 번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네가 나와 같은 공간에 들어온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것은 기적이며 이적, 당사자에게는 말하지 못하는 어떤 종류의 특별한 감정.
이윽고 나만이 점거하던 도서실의
문이 열린다. 소리를 죽인 발소리는 천천한 속도로 가까워지며 그 소리의 크기를 울리다가-갑자기 멈춘다. 고요히 이어지던 음악이
멈추는 것을 느끼며, 동시에 그가 발견한 것을 빠르게 짐작해낸다. 아, 그러고보니 저 쯤에 떨어졌던가-
"응? 이게 뭐지?"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듣기 좋은 종류의 것이었으나 이어질 발견을 짐작한 나는 한숨을 삼킨다.
어깨 사이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자-도서실 바닥을 향해 몸을 숙였던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일찍이 짐작했던 그대로, 그의 손에 들려서 공중으로 떠오른 것은 노란 색의 종이 비행기였다.
그 종이 비행기는 5분 정도 전에 태어났으며 이름 그대로 종이로 만들어졌고-비행기모양이고, 노란바탕에 자잘한 검은 얼룩을 가졌고- 원래의 사각형 모양으로 돌리면 지로용지라는 양식을 보여주는 신기한 기능을 탑재하고 있다.
"이건-리모!"
이런, 도서실에서 소리치면 안되는 데. 화난 기색이 묻어나오는 그의 목소리가 높아짐에 나는 결국 책상 위에 방치해두었던 늘어진 몸을 일으키고는 그를 향해 느슨히 웃었다.
"도운, 왔어?"
[졸업앨범]
2014 5 7
대한민국의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것은 글자만으로도 괴롭다 말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지만, 애초에 나나 도운에게까지 해당되는 단어는 아니었다.
공상과학고라는 이름 높은 전장안에서 일찌감치 진로를 결정지은 도운과 나는 선생들에게 보낸 강한 요청 끝에, 기묘한 열기와 드문 악의가 느껴지는 교실을 떠나 도서관에서 느긋히 지내는 것을 허락받았다.
도서실의 의자가 내 긴 다리를 수용하기에는 지나치게 작고 딱딱하다는 것과-사람 좋은 도운이 여러 선생들에게 불려가 부려먹히는 통에 막상 같이 지내는 시간은 드물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큰 불만 없는 느슨한 나날이다.
아무튼 그래서-간만에 둘이 보내는 시간인데, 어째서 하필 이런 화제인 걸까나.
도 운과 나 사이, 거대한 책상위에 위풍 당당하게 자리한 물체는 딱 잘라 말해 이미 쓰레기로 분류했던 것이다. 몇 분 전까지는 종이비행기라는 이름이었고 이제는 구겨진 종이라는 이름으로 변한 그 것,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자면 공상과학고등학교 졸업앨범 고지서라고 쓰고 진부함이라 표현하는 그 종이를 감정을 실어 노려보았으나, 옛날의 어떤 광고처럼 그것이 불타 사라지지는 않았다.
종이를 마주하고 앉은 나와 그의 표정은 조금 과장하자면 극과 극이라고 할 수 있었다.
책 상 너머의 그는 팔짱을 끼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모양새로, 화내는 건 이런 모습입니다-하고 교과서의 참고로 나올법한 포즈를 하고 있었으며 나는 영 똑바로 세워지지 않는 팔다리를 휘적이며, 금방이라도 나올 것 같은 하품을 꾹 집어 삼키는 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는 세시간도 자지 못했는 걸.
"정말 안사려고?"
도운이 캐물어오는 말에 나는 긍정의 의미로 한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자 뒤로 고개를 뻗었다. 평상시라면 열의를 가지고 임하던 그와의 대화였으나 오늘은 맞장구를 쳐줄 기력도 남아있지 않다.
졸업앨범이라.
요즘처럼 디지털화되어 있는 시대에 종이로 만든 책자라니, 참으로 구시대적인 유물이 아닌가.
내가 구입을 꺼리는 이유는 두가지였다.
첫
번째는 희소성이다. 전교생과 거의 비슷한 숫자를 찍으니 유일무이한 것도 아닌 몇 백권이나 되는 책자. 심지어 공상과학고등학교에서는
그 모든 사진정보를 담은 디지털CD를 원하는 학생에게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이너스 백만점이다. 두번쨰는 필요성,
양장본이라는 이름으로 인쇄비조차 비싸고 자매품으로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라는 접두사만 다른 책자가 한권씩 이미 존재하며 그 전례들은
졸업앨범이라는 것이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습득하기엔 충분한 선례라 할 수있다.
자, 이렇게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졸업앨범이라는 단어가 아직까지 남아있다는 사실을 오히려 납득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애초에 그런 것, 구입한 날이나 샘플이 공개된 날에 제가 잘 나왔는지 확인하는 이후로 펼쳐보지 않는 게 아닌가.
나는 귀찮은 와중에도 그가 화내는 얼굴을 보기 싫다는 이유를 구태여 설명했으나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특유의 사람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는 것이다.
"그래도 다 추억이잖아, 지금 아니면 다시 구하기도 어렵고."
그 다정하고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는 그 모든 합리적인 이유에도 지로용지를 들고 구입을 고려했던, 고작해야 책 하나에 대한 고민으로 잠을 설쳤던 어제의 밤을 되새겨본다.
졸 업앨범을 사지 않을 모든 이유들은 이미 나와 있었는데-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하는 가격을 지불하고 구입을 고려 했던 유일한 이유가-'네 사진을 합법적으로 소유할 수 있으며 숨기지 않을 수 있어서'라고 말한다고 해도 너는 그 상냥한 외향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나는 문득 궁금해진다.
"픽"
언제나처럼 스스로의 비웃음은 내게 돌아오고 만다. 짧은 조소에 남아있는 잔념을 털어내고는 으레 하듯 시선을 피하며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감정들을 꾹 눌러 담았다.
아니, 너는 내가 그렇게 말해도 좋아하겠지
아무 껄끄럼 따위 없이-소중한 친구로 여겨지는 것 같다며-그 말 속에 담겨진 검고 탁한 것들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는 웃겠지-여태껏 그래왔듯이.
"뭐, 의미 없는 것 같아서."
"그래도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봐, 나중에 우리가 각각 취직하고 아이도 낳고-그럴 때 한번 씩 열어서 이런 녀석도 있었다. 아 즐거웠구나-하고 지낸 날을 추억하면 좋잖아."
"뭐?"
그 말에, 찬물을 뒤집어 쓴 듯-잠기운이 달아났다. 늘어져있던 팔과 다리가 뻣뻣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구태여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는 그 다정한 목소리로 확인받는다.
"소라라면 몰라도 리모 너는 그렇게 냉정한 녀석이 아니잖아."
마주잡아오는 따뜻한 손에도 녹지 않을 정도로-차갑게 마음이 가라앉는 것만은 막을 수 없다.
참, 지금 누가 누구에게 냉정하다 말하는 것인지, 도운은 참으로 잔인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는 해서-가끔은 그와의 대화가 두려울 지경이었다.
도운, 그는 지금 내게 말한 것이다. '헤어지기 전에 이미 과거를 추억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그렇게 상냥하게-내가 좋아하는 온화한 웃는 얼굴로.
"아, 나 회의 있어서 가봐야 겠다, 돌아갈 때 같이 갈거지?"
"......아니, 오늘은 먼저 갈게."
그렇게 나는 도서실에 다시 홀로 남겨졌고-그래서 다시 어제 밤의 생각의 연장선 속에 잠겼다.
네 사진을 가지고 싶다고 느꼈다.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한장이라도 더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다가-무심코, 깨달아 버렸던 것이다. 나는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밤 사이에 생각했던 것은 그 단어의 내부적인 요소들이었다.
결국 나는 어떤 건지,
정말 그를 좋아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 좋아하는 건 분명하게 맞지만 그 카테고리 안에서의 분류가 친구로서인지, 인간으로서인지, 하나의 흥미로운 대상으로서인지, 그도 저도 아니라면 정말,
빌어먹을 '연애감정'인지-
나 름 똑똑하다고 자부해오던 나치고는 정말 의외의 일이지만 하룻 밤을 꼬박 새운 고민에도 정확히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똑부러지는 소라에게 묻는다면 간단히 정의내려 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해보았다. 물론 그녀에게 직접 물어볼 용기는 없지만.
"돌아갈까."
맥
이 빠져버렸다. 책가방을 챙겨 돌아가려고 일어나던 참에 책상에 아직도 남겨진 노란 지로용지가 눈에 들어온다. 문득 느껴지는 비릿한
충동으로 그것을 들은 나는- 세로로 길게, 그리고 가로로 잘게 찢었다. 원래의 용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잘게 흩어진 것들을
보니 비로소 굳어진 마음이 풀어지는 듯 하다.
누가 졸업앨범 같은 걸 살 것 같아?
내가 추억 따위로 변하는 것을 가만히 둘거라고 생각해?
결론 따위는 아직도 나오지 않았지만, 지금의 나는-내가 네 현재에서 소거되고, 과거라는 시간 속에서 추억된다는 그 상상만으로도 이렇게나-지독하게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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