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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후
[지역에 따라 30도를 넘는 이상기온 현상이-]
예전에 누군가가 일기예보는 비의 여부만 체크하는 용도로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었던 것 같은데. 따뜻하다는 소리만을 믿고 어머니가 챙겨준 머플러를 두고 나온 하나무라 요스케는 기상청에 대한 푸념을 뱉으며 자전거의 차가운 핸들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작년까지는 아무리 한겨울이어도 옷을 껴입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는데 설마 나이를 먹은 탓일까? 17세, 한참이나 팔팔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하던 그는 이내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길은 같았지만 출발시간이 엄연히 달랐다. 작년까지는 정시간에 딱 맞추거나 차라리 살짝 지각을 하면 모를까 이렇게 일찍 등교하던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오전 7시, 조금 넘긴 아침의 이나바시가지는 청결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상쾌하고 차가운 느낌이 돌았다. 야트막한 지붕들에서 이어진 하늘은 가을을 연상시킬 정도로 구름하나 없이 맑고 깨끗했다.
화사하게 만발해있던 벚꽃나무들은 연녹색 이파리를 틔우고 땅에 떨어진 꽃의 자취들은 도로 한 켠으로 차곡차곡 치워져 쌓여 있었다. 동급생이던 아마기 유키코가 여관에서 함께 벚꽃놀이를 하자고 제안했던 일을 뒤늦게 떠올렸다. 결국 이번 해에도 꽃놀이를 하지 못했다.
요스케는 어깨에 붙어 있는 철늦은 벚꽃 잎 하나를 발견하고 털어냈다. 한순간 찾아왔던 봄은 순식간에 깊어지고 그 끝자락조차 제대로 느낄 시간도 주지 않고 빠르게 지나가 버렸다. 어쩐지 아쉬워진다.
자전거를 세우고 오가는 이도 없는 운동장을 지나 현관에 도착해 익숙하게 신발을 갈아 신는다. 그 와중에 문득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았다. 시험기간도 아니고 이런 시간에 오는 학생은 꽤나 드물다.
당연하겠지만 그의 뒤편은 물론이고 시야 안에도 사람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요즘 부쩍 이런 일이 늘어났다. 기분 탓인지 조금 예민해져있는 듯 싶다.
계단을 한층 올라서다가 문득 줄지어 있는 2학년 교실에 눈이 닿았다. 조금 머뭇거린 발걸음은 천천히 옮겨져 한층 더 위에 있는 3학년 2반으로 향했다.
비어있는 교실, 처음에는 어색했었지만 이것도 익숙해지고 있다. 창가의 맨 뒷줄, 자신의 지정석에 앉아 헤드폰을 끼고 턱을 괴었다. 요즘 보내는 하루 중에서는 잠시 여유를 즐기는 이 순간이 가장 좋다.
다사다난했던 해를 넘기고 그에게도 수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느릿하게 달라진 것도 있었지만 때로는 하루아침에 일어난 급격한 일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그래, 학기 초에 이루어졌던 반배정 정도일까.
현관에 커다랗게 배치된 표를 보자마자 유키코와 치에는 동시에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잔뜩 붉어진 얼굴로 또 같은 반이네! 진짜! 너무 좋아 따위의 말들을 커다란 목소리로 말해서 어쩐지 요스케가 부끄러웠다. 그렇게 행복해보였던 그녀들이었지만 잠시 뒤 다시 표를 확인하고 나서는 순식간에 창백한 안색으로 변했다.
요스케의 얼굴도 약간 굳었다가 풀어졌다. 우우, 이건 조금 심한데. 살짝 입술을 깨문 치에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였다.
뒤늦게 나타난 이치죠와 나가세는 무슨 일이냐며 반갑게 끼어들었다가 순식간에 같은 표정이 되었다. 모두의 이름이 올망졸망 1반 아래에 있는 와중에 하나무라 요스케, 그의 이름만이 2반에 적혀져 있었다.
괜찮아?라고 물어보는 이들에게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도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어차피 반 같은 건 그때도 지금도 그렇게 의미가 없으니까.
같이 지낼 아이들은 거의 없었지만 겨울 내에 키가 5cm자라서 맨 뒷자리의 창가라는 명당을 차지할 수 있게 된 것도, 옆자리의 에비하라 아이라는 이름을 가진 화려한 인상의 동급생이 자주 수업을 빼먹어서 옆자리가 지나치리만큼 조용한 것도 모두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아직 3학년 2반이라는 소속이 조금 어색한 느낌은 들었지만 그것도 차차 나아질 것이다.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사이에 요즘 즐겨듣는 CD가 10번째의 트랙을 지나 11번째로 접어들었다. 아침도 이제 중반, 교실은 느린 속도로 채워지고 있었다. 교칙에는 확실히 어긋난 분홍색 프릴장식의 가방을 내려놓으며 옆자리의 에비하라 아이도 등교했다.
“좋은 아침.”
“응, 좋은 아침.”
짧은 인사를 끝으로 서로 눈이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늘 이런 식이다. 그녀의 곁으로 조금 화려한 인상의 여자아이들 서넛이 다가와 금새 옆자리가 시끄러워 졌다.
노래를 듣기도 힘들어져서 지금 막 시작되려는 12번째 트랙을 잠시 멈췄다. 아이는 봄의 상징색이자 그녀의 상징이기도 한 분홍색의 화려한 화장품광고가 실어진 잡지를 나눠 보고 있다. 앞자리에서는 과제를 베끼는 듯 공책 두개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아 그러고보니 3교시가 영어였나?
“뭐야 하나무라. 너도 숙제 안 해왔어?”
우연히 뒤를 돌아보고 있던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저 녀석 이름이 뭐였더라. 뭔가 굉장히 흔한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꽤나 불손한 생각을 하며 음악이 나오지도 않는 헤드폰을 잠시 목에 내렸다. 분명히 다-다다-다로 시작했었던 것 같은데 그 다음이 생각나지 않는다. 잠깐 머뭇거리다가 결국은 기억해내지 못하고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이름 따위야 뭐 아무려면 어떤가.
“수학은 했는데, 영어는 깜빡한 것 같다.”
“하면 한 거고 안하면 안한 거지, 같다는 건 또 뭐야. 아 맞다. 나 수학 숙제 안했는데 노트 바꿀래?”
나쁘지 않은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고 수학공책을 꺼내 건네다가 문득 소년의 이름을 떠올렸다. 아마 분명히.
“고마워 마츠다.”
이름을 떠올린 것은 좋은데 다로 시작하지도 않아서 조금 미묘한 기분이 되었다. 그래도 이름이 맞은 모양이다.
“어차피 서로 바꾸는 건데 무슨 인사야.”
호감을 주는 웃음에 가볍게 마주 웃고 공책을 받아 빠른 속도로 옮겨 쓰기 시작했다. 양이 그리 많지 않아 다행이다.
반이 갈리는 것에 유난한 반응을 보였던 다른 친구들의 염려와는 달리 요스케는 무척이나 쉽게 새로운 교실에 적응했다. 친구가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책상을 붙이고 밥을 먹는 그룹도 생겼고, 매 쉬는 시간마다 모여드는 에비하라의 친구들과도 그럭저럭 얼굴은 익혔다.
1년전 그의 뒤로 내내 따라다니던, 쥬네스로 인한 상점가의 몰락이니 하는 이야기는 무시할 수 없는 꼬리표가 되어 또 그에게 붙었지만 3학년이 된 아이들은 더 이상 그런 일들로 고민하고 뒷담을 나누기엔 너무 바빴다. 취업과 진로선택. 앞으로의 미래를 결정하기에도 시간은 부족하기만 했다. 빠르게 문장을 써내려가던 펜이 멈칫거리며 움직임을 멈췄다. 다들 바쁘다고 하는데 정작 자신은 올해가 더 한가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 이상한 기분이었다.
뭐, 조금 한가하다는 느낌을 받고는 있지만 그가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유키코처럼 확실하게 물려받을 만한 가업도 없고, 따로 되고 싶은 직업도 마땅히 없었다. 부모님은 진학을 원하고 있었고 성적도 그리 심각할 정도는 아니어서 대학에 진학하는 방향으로 생각은 하고 있다.
지난 주에는 진학에 대해서 담당교사와의 1대1상담이 있었다. 진로조사용지를 본 노리코선생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지금의 성적으로 지망 가능한 대학의 리스트를 보여주었다.
‘하나무라라면 돈에 여유 있으니까 사립 쪽도 괜찮겠네.’
비꼬는 듯한 표정과 말투였지만 적어도 그 말 자체는 사실이라 요스케는 상담 내내 별다른 대꾸도 하지 못했었다.
아침 조회가 끝나기 전에 영어숙제를 완벽히 마치고 기지개를 켰다.
분명 그 자신에게는 아무 문제도 없다.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의 특징인지 머릿 속은 복잡하게 술렁이고 있었다. 노래라도 계속 들으면서 조금 더 쉬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수업 중에 음악을 들을 정도로 용감하지는 않았다.
“그거 참 편해보이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손톱을 손질하던 에비하라가 요스케에게 말을 건넸다. 옆자리라고는 해도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경우는 제법 드문 일이었다.
“응?”
뚱한 표정의 에비하라는 방금 전까지 요스케가 쓰고 있던 헤드폰을 가리키며 그거 말이야. 라고 다시 말했다.
“헤드폰이 뭐가?”
그녀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노래 들으면 보통은 헤드폰 밖으로도 약간 들리잖아?”
무의식적으로 헤드폰의 볼륨조절부분을 만졌다. 밖으로도 노래가 들리는 줄은 모르고 있었다. 워낙 고를 때 디자인을 우선시하는 쪽이어서 기기의 성능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터였다.
“혹시 계속 신경쓰였어? 미안.”
성급히 건네진 사과에 에비하라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연한 갈색의 머리칼이 흔들리면서 분홍색 플라스틱귀걸이가 언뜻 비친다.
“그런게 아니야.”
그녀가 얼굴을 조금 가까이 했다. 마치 이 대화를 다른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는 듯 목소리를 한톤 낮추어 말한다.
“너, 거의 노래 듣지 않잖아? 그런데도 헤드폰을 쓰면 다들 무시해주더라고- 꽤 편해보여서 너 제법 머리 좋은 것 같다고 생각했어.”
조금은 뜬금없는 소리에 요스케는 풋하고 웃음지었다. 망상도 이정도면 수준급이다.
“에에? 그럴 리가 없잖아.”
그녀는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잠시 우물거리다가 그럼 내 착각이었겠지. 하고는 살짝 찡그린 표정을 지었다.
“이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라, 유키 알지? 수업 끝나고 잠깐 옥상으로 올라와 달라고 전해달래.”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말투, 일방적으로 제 말을 끝낸 에비하라는 가방을 남겨둔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렇게 점심시간에 나가면 보통 종례시간이 다 되어서야 돌아오곤 했으니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혼자 남은 요스케는 조금 멍한 얼굴로 헤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편해보인다라-딱히 그녀가 생각하는 방향의 효과를 노리던 것은 아니었는데 조금 신경이 쓰인다.
그녀는 이미 자리에 없는데 그녀의 말은 수업시간 내내 귀를 간지럽게 했다. 물론 그 덕분에 그녀가 마지막에 건넨 말은 종례를 할 때까지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종례 후, 요스케는 차라리 기왕 잊어버리려면 집에 갈 때까지 완전히 잊어버리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저기 하나무라군은 사귀는 여자애 있어?”
처음에 그 말을 듣고 요스케가 제일 먼저 떠올린 말은 ‘이거, 무슨 게임의 벌칙인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그의 앞에서 우물거리는 여자아이의 표정이 지나치게 진지했다. 발그레하게 물든 볼과 수줍게 우물거리는 손가락은 순정만화에서 튀어나온 양 고전적인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공기가 분홍색으로 채색되는 느낌이다.
“……일단은 없는데.”
유키라는 이름을 가진-성도 모르는 그녀는 에비하라 아이의 친구, 또는 추종자 중의 한사람이었다. 에비하라 정도로 화려하지 않지만 꼼지락 거리는 손가락에도 벚꽃색의 메니큐어가 발려져 있고 앞머리 없는 생머리는 연한 갈색으로 물들여져 있다. 갸름한 얼굴인데 눈썹이 약간 쳐져서 가만히 있어도 조금 울먹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아이짱한테 이야기 듣다가 실제로 만나면서 반해버려서-”
아이짱이라면 역시 에비하라 아이일까. 정말 어울리지 않는 호칭이라 웃음이 나올 것 같다. 그녀가 자신에 대한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도 조금은 궁금했지만 만난다는 말에서는 의아한 느낌이 남았다.
요스케와 유키가 제대로 만난 경우는 그가 기억하는 한도 내에서 거의 없었다. 옆자리에 자주 찾아오니까 몇 번인가 눈인사를 한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제대로 마주보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오늘이 거의 처음이었다.
“그래서 저기, 괜찮다면…….”
딱히 누군가와 사귀고 싶은 것도 아니고, 오늘 이렇게 만나기 전까지 유키라는 여자아이에 대한 흥미도 없었다. 이런 경우라면 역시 깔끔하게 거절하는 쪽이 좋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얼굴을 보고 거절하는 말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 정말-좋지 않다.
“유키였지?”
“으응.”
요스케는 손을 주머니에 넣어 핸드폰을 잡았다. 조금 망설여진다. 이 선택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겠지만 다른 어떤 선택지도 마땅히 남아있지 않았다. 상처주지 않고 끝낼 방법은 없다-.
결국 그렇게 결론짓고 손에 쥔 핸드폰을 그녀에게 건네며 되도록 밝게 웃는 표정을 만들었다.
“나 아직 너에 대해 모르니까. 문자친구로라도 괜찮지 않을까?”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재에 대한 거절이었지만 그래도 새로이 건네진 희망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과 사귈 생각이 없는 이상, 이 대답은 나쁜 방향이다. 희망고문-문득 그런 말을 떠올렸지만 요스케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은-멈추지 못했다는 말이 더 어울렸다. 그는 유키라는 이 소녀의 얼굴을 몇 번 보지 않고도 기억한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닮았어, 이 아이.’
웃을 때 약간 찡그린 표정이 되는 것도, 말할 때면 눈썹이 팔자모양이 되는 것도, 잠시 말을 멈출 때마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약간 비스듬히 시선을 떨구는 것도-눈에 확 들어올 정도는 아니지만 자세히 지켜보면 알 수 있을 정도로.
유키는 그녀, 코니시 사키를 닮았다.
요스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렇게 상황은 나쁜 방향으로 깊어지고 있었다.
코니시 사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그녀는 요스케의 첫사랑이었다.
이전에는 한동안 발버둥치며 부정했었지만 근래에는 인정하고 있다. 죽음으로 애절하게 끝난 첫사랑이 있다고 애특하게 말하고 싶어도, 그녀가 그대로 살아있었다 하더라도 그 사랑이 이루어질리 없었다는 것도 그 후에 뼈가 아릴 정도의 상처를 남기고 알게 되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거나 사랑하지 않았다고 해도 요스케가 그녀를 좋아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무라군, 앞으로 잘부탁해♡]
진동소리와 함께 도착한 메시지, 하단에 입력된 유키라는 이름이 어쩐지 묘한 울림이 되어 남았다. 표정까지 닮다 못해서 이름까지 닮을 필요는 없잖아….
[나도 잘 부탁해. 유키]
조금 딱딱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모티콘을 골라 넣을 기분도 아니라 그대로 전송하고 핸드폰을 가방에 던져 넣었다.
신경질 적으로 CD플레이어의 볼륨을 두 단계 더 올려 재생시킨다. 조금은 시끄러울 정도의 크기의 간주, 아침에 멈춰두었던 열두번째 트랙이 재생되었다.
요스케의 얼굴에 낭패감이 깃든다.
어째서 하필 이 곡이 지금 이 순간에.
창백히 질린 얼굴을 하고선 트랙을 급하게 넘긴다. 지금 이 기분으로는 정말 듣고 싶지 않은 노래였다.
한숨을 내쉬고 시선을 멀리 던진다.
코니시 사키와 하나무라 요스케, 한동안 같은 곳에서 아르바이트 하던 두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깊게 아는 사람은 단 한명 뿐이었다. 만약 그에게 오늘 저지른 이 일을 이야기한다면 웃을지, 아니면 화를 낼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의외로 상냥하니까-서툴게 위로의 말을 건넬지도.
뭐, 의미는 없는 추측이었다.
그는 여기에 없고 그러기에 요스케의 푸념을 들어줄 수도 없다. 그러니까 그의 반응 따위를 추정하는 일 따위는 전혀 쓸모없는 일이다. 초점없는 눈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다가, 무심결에 한동안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던 말을 뱉어내고 말았다.
“소우지.”
스스로 꺼낸 이름에 당황해 자전거를 멈춰 세웠다.
영화에서라면 이런 장면에서 빗방울이라도 난데없이 떨어지곤 하던데 주변은 그저 잠잠하고 조용하기만 했다.
고민 끝에 자전거를 다시 움직여 이나바강의 하류를 찾았다. 언제나처럼 아르바이트가 있었지만 유키와의 대화로 시간을 이미 조금 넘기고 있었으니 별 상관은 없었다.
이나바강.
이미 시간이 지났지만 한동안 이 작고 소박한 강가를 찾았던 적이 있었다. 자전거를 세우고 그 것에 기대어 그 남자, 세타 소우지가 낚시대를 기울이며 서 있는 뒷모습을 한참이나 먼발치에서 바라보다가 그가 집에 돌아갈 준비를 하면 먼저 집에 돌아가던 그런 나날.
계절이 바뀐 탓인지, 아니면 지나치게 오랜만에 이 곳을 찾아서인지 강은 미묘하게 모습을 바꾸었다. 조금 낯선 느낌이었지만 빛이 너울지는 강물도, 귓가를 간질이는 소리도 그대로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래, 변하는 일이 있더라도 여기 있으면 충분했다.
물냄새가 진하게 베인 벤치에 주저 앉았다. 돌아가고 싶다. 그런 막연한 생각을 하며 무거운 머리를 숙였다.
고작해야 1년 뿐인 시간을 보냈지만 하나무라 요스케에게 있어 세타 소우지라는 존재는 분명 특별했다. 친구이자 조언자라는 이름보다도 깊은 동경과 더없는 애정-어쩌면 가족보다도 소중하게 느껴지던 그 시간.
두 사람은 지난 겨울을 같이 보냈다.
눈이 오는 날이면 눈을 치우는 것을 겸해서 그의 사촌동생인 나나코와 함께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었다. 도지마가 앞에 세우는 것이니까, 당연히 도지마를 만들어야 한다며 눈사람에 넥타이를 매달았다.
이전까지니 베스트 프렌드라느니, 절친이니 하는 단어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요스케였지만 소우지와 함께 지내면서 어느 정도는 타인이, 그렇게까지 소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주말마다 만나서는 새로 나온 CD나 책을 보러가거나 나가세들을 불러 아이가에 놀러가기도 했다, 시시한 일로 말다툼을 하기도 하고-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새해를 넘긴다.
생각해보면 굉장히 사소한 것 투성이지만 요스케는 그 모든 날들을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
……하지만 소우지도 정말 즐거웠던 걸까?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어쩐지 회의적인 생각이 앞서서 들었다. 그가 떠나고 제법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그에게선 단 한번의 문자도, 전화도 오지 않고 있었다.
핸드폰이 가방 속에서 떨렸다. 왜 연락도 없이 늦는 거냐며 화내는 목소리에 금방 간다고 대꾸하고 전화를 끊었다.
유키가 보낸 새로운 문자가 도착해 있었지만 답장은 하지 않았다.
또 의미 없는 날들이 흘러간다.
혹시나 에비하라 아이가 유키에 대해 물으면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그녀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녀와 인사가 아닌 대화를 나누게 된 것은 오히려 유키의 문자가 조금 시들해질 즘이었다.
“어라, 너 진학하는 거였어?”
스스로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문제집을 풀고 있던 중에 에비하라의 질문을 받았다. 그녀가 진심으로 놀랐다는 표정을 하고 있어서 요스케의 대답은 자연스럽게 퉁명스러운 느낌이 실렸다.
“네, 그렇습니다만.”
두 사람 사이에 조금 참기 힘든 침묵이 흘렀다. 뒤늦게 수습이라도 하려는 듯 에비하라가 어설픈 웃음을 지었다.
“아니, 너라면 취업 쪽일 거라고 생각해서.”
그녀가 소문만큼 불량하거나 나쁜 녀석은 아니라는 것은 요스케도 알고 있었다. 조금 무신경하고 조금 퉁명스럽지만 그래도 은근히 귀엽고 상냥한 구석이 있다.
“에비하라는 취업?”
“응, 학교에 이야기하고 학원에 다니면서 자격증 따고 있어.”
땡땡이인 줄 알았더니 나름대로 생각은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학원이나 자격증이라는 말은 사실 그녀에겐 그리 어울리지 않았지만 막연히 진학을 생각하던 요스케에겐 그녀가 진심으로 대단하게 느껴졌다.
“너 지금 되게 이상한 표정이다?”
“아니, 나도 너라면 취업 쪽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녀가 했던 말을 약간 바꿔 대꾸하자 까르륵하고 소리내어 웃었다. 살짝 비틀린 평소의 웃음과는 달리 진심으로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다.
“무슨 학원을 다니는 거야?”
“일단은 메이크업이랑 네일이랑 헤어, 기초는 다 듣고 있…….”
손가락을 꼽던 그녀의 말이 끊어졌다. 그녀는 잠깐 얼굴을 굳히더니 고개를 돌리며 방긋하고 웃었다. 아, 이번에는 평소의 웃음이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자 언제부터 있었던지 유키가 등 뒤에 서있었다. 평소와 같이 약간 수줍은 듯한 표정을 하고선 손에 들고 있던 천가방을 가만히 내밀었다.
“매일 빵만 먹는 것 같아서 만들어 봤어.”
도시락. 여자아이가 직접 걱정해서 만들어주었다니 고마워해야겠지만 당황한 마음이 먼저 앞섰다. 요즘 들어 문자가 조금 줄어서 방심했는데 설마 이런 것을 준비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아, 고마워”
당황한 것을 감추고 인사를 건넨다. 같은 학급의 아이들이 두사람 사귀는 거야? 라면서 짓궂은 말을 던졌다. 과하게 부정하면 유키가 곤란해 할 것 같아서 조용히 웃으며 그런 게 아니라고 만류했다.
건네받은 가방은 작은 크기와 달리 조금은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향긋하고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
‘조금 싱겁게 되어버렸지만-’
그 냄새를 맡는 순간, 유키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는 수줍은 표정을 짓지도 않고,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물방울무늬의 푸른 천으로 감싸인 1인분의 도시락을 들어 올리고는 같이 먹겠냐고 물어왔다. 그 얼굴로 요리라니, 반칙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요스케는 카레 좋아해?”
‘카레, 좋아해?’
유키의 목소리에 낮은 목소리가 겹쳐진다. 그 목소리는 어느새 하나의 영상이 되어 요스케의 머릿속을 잠식해 나갔다.
카레도시락이라니 호쾌하잖아? 라고 떠들며 올라간 여름날의 옥상, 그 날도 몹시 아름다웠던 파란 하늘 아래, 햇볕에 달궈진 파이프위에 앉아 두 사람은 1인분의 도시락을 나눠먹었다. 싱거워서 미안하다고 웃던 그의 말과는 달리 정말 맛이 있던 카레였다.
진심으로 대단하다며 요스케가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그는 드물게도 부끄러운 기색을 보이고는 다음에 또 만들어주겠다며 웃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히 떠오르는 기억에 당황해 황급히 일어서자 갑자기 시야가 먹먹해졌다.
“하나무라군?”
유키가 당황한 듯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속이 조금 매스꺼운 듯 하다가 몹시 어지러워졌다. 시야가 가물거렸다.
아, 이대로라면 도시락이 바닥에 떨어져 엉망이 되고 말텐데.
“하나무라!”
에비하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높게 소리를 지르는 것도 같았다. 쿵-. 가물거리던 시야가 갑자기 검게 변했다.
그 겨울에 그에게 CD를 만들어 보내곤 했다,
처음에는 소우지가 먼저 했던 부탁이었지만 나중에는 그 일 자체에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 날도 언제나처럼 CD를 주러 들렀던 것 뿐인데 그가 몸 좀 녹이고 갈래? 라고 제의해 왔다.
나란히 이불을 덮고 벽에 기대 앉아 방금 만들어 온 CD를 작게 틀고 노래를 들었다. 한곡 한곡 노래가 반복되는 중에 요스케는 조금 초조한 기분을 느꼈다.
처음 CD를 만들면서부터 노래를 숨겼다.
신문에서 한참 시끄럽게 떠들던 이스터에그라는 단어에서 힌트를 얻은 작은 장난, 열두번째 트랙에 마음을 담은 한 곡을 숨긴다.
귀를 가까이하면 심장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말하지 못하고 결국 장난으로 바꾼 마음이 있었다.
열한번째의 노래가 끝나고 열두번째 트랙이 재생되었다.
낮은 목소리의 가수는 세상에서 가장 흔해빠진 말을 노래했다. 그 가벼워진 단어를, 그 중에서도 가장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던 요스케는 소우지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는 별다른 표정도 없이 그 사이 즐겨 읽던 사나이시리즈의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정말 다행이다. 장난은 들키지 않았다.
“어라?”
안도하는 그의 얼굴에서 눈물이 투둑하고 떨어졌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오는 질문에 먼지가 들어갔다는 흔한 변명밖에는 할 수 없었다. 요스케 자신이 그 상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키에 대한 그 것은 지금도 사랑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지만 소우지의 대한 감정은 불확실하고 흣뿌옇기만 했다.
“소우지, 좋아해.”
먼지를 빼는 척 눈을 부비다가, 문득 어떤 충동이 들어 가볍게 웃으며 말해 보았다. 소우지는 그를 보지도 않고 다시 책장을 하나 넘겼다.
“응. 나도 그래.”
건성건성인 대답.
요스케는 그래도 충분히 괜찮았다. 친구라는 자리는 견고했고 믿음이라는 감정은 굳게 두 사람을 엮어주고 있었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마지막 곡까지 노래를 들은 뒤 소우지의 배웅을 받으며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 날 밤에는 새하얀 함박눈이 잔뜩 내렸다.
눈을 뜨자 양호실의 침대 위였다.
왜 여기에 와 있는 거지? 당황한 요스케가 조금 부스럭거리자 침대 주위를 감싸고 있던 커텐이 걷히며 양호부원으로 보이는 비쩍 마른 얼굴의 남학생이 얼굴을 내밀었다.
“선생님은 또 자리를 비우셨어요. 빈혈에 영양부족 같다고 그러시던데 조금 더 누워 계세요.”
빈혈이라니 명백한 남자로써 그리 반가운 병명은 아닌데. 쓴웃음을 짓고 있자니 남학생이 핸드폰을 건넸다. 요스케의 것이었다.
“계속 소리가 나서…… 허락도 받지 못하고 꺼버렸어요.”
“아니, 고마워.”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를 돌려보내고 핸드폰의 전원을 켰다.
우는 표정의 이모티콘이 잔뜩 들어간 유키의 문자가 대여섯개나 순식간에 들어왔다. 그 사이에 저장되지 않은 번호의 문자도 하나 있었다.
[영양실조라니 바보 같아.]
근거는 없지만 아마도 에비하라의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비명이 들린 것인지, 아니면 소문이 벌써 1반에까지 퍼진 것인지 치에와 유키코의 문자도 도착했다. 그 밖에도 나가세와 이치죠-양호실에 업혀갔다는데 몸은 괜찮은 거야? 라는 문자가 핸드폰에 한가득 채워진다.
요스케는 질린 듯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붙잡았다. 소문네트워크가 유난히 발달한 이나바였으니 졸업할때까지는 이 소문을 달고 살아야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일단 문자에 답장을 해야 하겠지만 도대체 누구 문자부터 답변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일단 유키에게 보내야 하나.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문장이 완성되던 화면에 새로운 메시지의 도착을 알리는 아이콘이 떴다. 아마 칸지나 리세, 나오토 정도일까? 후자의 두 명 정도는 남자로써도 괜찮지만 칸지의 안부문자라면 조금은 거리낌이 든다.
[아프다고 들었는데 괜찮아?]
몇 번이나 반복된 뻔하디 뻔한 문자였는데 요스케의 얼굴에 당혹감이 들었다. 유키에게 보내던 메시지를 그대로 지우고 문자패드를 급하게 눌러 문장을 만들어낸다.
[왜 그동안 연락 안 한거야?]
송신을 하고 나서야 크게 숨을 내쉬었다. 송신인의 이름은 꽤나 익숙한 것이지만 동시에 요즘은 보지 못했던 것이기도 했다. 제대로 전송은 된 것인지 의심될 만큼 빠른 속도로 답장이 돌아왔다.
[미안]
그 문자가 너무나 그 다워서 웃음이 나왔다. 변명이라도 해달라고, 너무 성의 없잖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마음 한편은 따뜻하고 행복한 기분이 되었다.
문득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을 기억했다.
문자 한통, 한번의 마주침, 문득 건넨 말 한마디 따위에 설레이던, 코니시 사키를 좋아하던 열여섯살의 하나무라 요스케.
인생은 때론 터무니 없이 반복된다.
그 되풀이 되는 것에는 이미 지쳐 있었다. 상대를 이해할 것 같은 기분에 손을 내밀었다가 붙잡으려 하는 순간에 그림자에만 스치고 놓쳐버리는 것도 싫다.
단축번호 1번, 베프라고 저장된 이름이 재미있어서 한참이나 더 웃었다. 그만큼이나 어이없이 해결되었지만-정말 지긋지긋한 기다림이었다. 목구멍을 간질이는 씁쓸한 울컥임을 삼키고 핸드폰의 전화부를 찾아간다. 삭제, 베프라는 이름이 요스케의 전화부에서 깨끗하게 지워졌다. 그건 생각보다도 무척이나 단순한 일이었다.
오지 않는 전화 따위를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다. 그 겨울 날 집에 돌아와서 생각했던 것이 있다. 어쩌면- 그래, 사키가 나의 첫사랑이 아니었다면 조금은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두 개의 생각이 합쳐져 결론이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이제 자신이 움직이면 된다.
도지마씨에게 전화를 걸어 막무가내로 소우지의 주소를 물었다.
일단은 유키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문자와 함께 사귈 수 없다는 문자를 보내자. 미안하긴 하지만 나중에 얼굴을 보고 정식으로 사과할 생각이다. 그리고 그 일을 끝내면 바로 조퇴해서 열차를 타러 가자.
일사천리로 결론 짓고, 뒷주머니에 넣어둔 지갑을 꺼내 안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급여일에서 며칠 지나지 않아 왕복차비는 충분하다.
요스케는 양호실의 창문으로 고개를 들었다. 벚꽃은 졌지만 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곧 만날 그의 얼굴이 견딜 수 없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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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5, 무료배포본으로 냈던 글, 예전 글이지만 좋아하는 글이니 백업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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