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무료배포된 켄자키+하지메 배포본입니다.
가볍게 읽어주세요.
[NOTHING]
2017 12 8
어둑한 방안, 남자는 이불 속에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가만하던 숨소리가 불규칙해지더니 무기질적인 눈동자가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어딘가 아득한 시선이 테이블 위의 고전풍 전등으로 향했다.
이 집의 주인이자 동거인인, 쿠리하라 하루카가 며칠 전에 가져다 둔 전등이다.
‘아마네가 요즘 잘 잠들지 못하는 것 같다고 해서 꺼내봤는데, 하지메씨가 쓰기엔 좀 옛날 디자인일까?’
수면에 지장을 느끼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사용하라고 가져다준 것 일 테니, 잠들기 전에 의례상 몇 분 정도 켜두고는 했는데 어제는 잠들기 전에 끄는 것을 잊었던 모양이다.
색이 변한 천으로 감싸인 둥근 갓 안에 자리한 유리전구는 전구 자체가 짙은 파란색으로 채색된 것으로, 미미하게 흔들리며 푸르게 번져 나오는 불빛은 방안을 흐릿한 파랑으로 물들이고 있다, 남자, 아이카와 하지메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뜨며 몇 분이나 그 빛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갑작스럽게 몸을 일으켜 미련 없이 등을 껐다.
새로운 티셔츠를 꺼내 입으며, 하지메는 하루카에게 어떻게 말해야 순조롭게 전등을 돌려줄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8시 20분, 코트를 챙겨 입고 큼직한 가방을 든 차림의 하지메가 자신의 방에서 찻집 자카란다에 올라온 것은 일정이 없는 기준의 평소보다 1시간가량 늦은 시간이었다.
보통이면 재료 손질이며 청소 등으로 바쁠 시간이지만 이 즘이면 한참 뛰어다니던 숏컷의 여성은 느긋이 음식을 차리고 있었고, 벌써 먹기 시작했는지 빵을 우물거리던 포니테일의 소녀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리더니 상대를 확인하고는 활짝 웃었다.
“좋은 아침이야 하지메오빠!”
“조금 더 자지 않고요. 모처럼의 휴일이고 늘 도와주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좋은 아침입니다. 늦어서 미안해요, 준비를 도왔어야 했는데.”
“별말씀을요.”
하지메는 묵직한 가방을 테이블 위에 적당히 올려놓고 제 몫의 식사가 차려진 자리에 앉았다. 차리던 중인지 머그컵이 비어 있다.
“오빠는 무슨 잼?”
“딸기로 부탁해 아마네짱.”
가볍게 차려진 아침식사를 시작했다. 하지메에게 커피를 건네던 여성, 이 찻집의 주인인 쿠리하라 하루카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저녁에 비가 온다던데 내일 출발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래도 휴일에 다녀오는 게 낫죠.”
“매일 도와주시지 않아도 되니까 안전하게 다녀오셔야죠.”
소녀, 쿠리하라 아마네가 오믈렛을 한참 우물거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하지메 오빠, 내가 선물한 핫팩은 넣었어?”
“물론 챙겼어.”
“물통은?”
길게 이어지던 문답은 하지메의 식사를 방해하고 있다며 하루카가 주의를 주고 나서야 끝이 났다. 꾸지람을 들은 아마네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역시 내가 직접 가서 챙겨줘야 하는데.”
“얘는, 네가 따라가면 번거롭기나 하시지.”
“치이.”
하루카의 딱 자른 거절에 아마네의 얼굴이 불퉁해졌다. 오늘은 꼭 같이 따라가고 싶다는 의미를 듬뿍 담아 하지메를 쳐다봤지만, 평소라면 제 부탁에 유독 약한 하지메는 오늘따라 자신을 보지도 않고 식사만 열심이다. 포크를 던진 상태로 한참을 시위하던 아마네는 하지메가 식사를 마친 후에 바로 몸을 일으키자 다급하게 따라 일어섰다.
하지메는 빠르게 가방을 챙겨서 아마네가 준비하기도 전에 외출을 먼저 말해왔다.
“다녀올게 아마네짱.”
“…나도.”
하려던 말은 막상 하지메의 웃는 얼굴을 마주하자 막혀 버렸음에도 거두지 못한 시선엔 아직 아쉬움이 듬뿍 묻어있다. 하루카가 그런 아마네의 어깨를 잡으며 상냥한 목소리로 달랬다.
“하지메씨도 오랜만에 외출하는 건데 그런 얼굴로 배웅할거니?”
“……다녀와, 하지메오빠.”
“좋은 사진 찍길 바랄게요.”
마지못해서 말하는 것을 숨기지도 않는 목소리지만 그것마저도 한참 귀엽기만 한지 아마네를 내려다보는 두 사람의 표정은 흐뭇하기만 하다.
“다녀오겠습니다.”
하지메는 모녀에게 가만히 웃어 보이고는 등을 돌렸다.
문을 당기자 딸랑-하고 종이 작게 울렸다. 돌아올 때는 아마네를 위해 작은 선물이라도 챙겨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무로 된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하지메의 워커 아래에서, 바람에 날려 온 마른 잎이 버석거리며 부서졌다.
하지메는 저녁에 점검해둔 바이크에 핀을 걸어 가방을 고정하고 시동을 걸었다. 헬멧의 바이저를 내리며 바람이 확실히 서늘해진 것을 깨달았다. 계절이 바뀌고 있다. 비가 올 것이라던 하루카의 말과는 달리 공기는 서늘하고 건조하게 바삭거린다. 긴 배기음을 남기고 하지메는 자카란다를 떠났다.
사진이라는 취미는 어쩌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핑곗거리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오늘 하지메의 가방 안에는 사실 필름이 존재하지 않았다. 딱히 핑계를 대거나 그가 직접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사진에 대한 하루카의 말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어떨까나.”
붉은 불이다. 신호등에 멈춰서 있던 하지메의 시선에 스포츠가방을 들고 가는 낯익은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아는 척할 필요는 없겠지 싶어 고개를 괜히 다른 쪽으로 돌리는데 파닥파닥 손을 흔들어 오기에 결국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바이크를 길가로 끌었다.
“하지메씨, 좋은 아침이네요.”
솔직히 그다지 좋은 아침은 아니지만 인사라는 것은 원래 솔직함과는 거리가 있다.
“좋은 아침이다. 무츠키.”
카미조 무츠키, 어떤 의미에서 이전에 동료라는 이름으로 묶였지만, 지금은 하지메 자신이 생각하기에 저와는 깊은 연관이 없다고 생각되는 소년이다. 이전에도 좋은 의미의 인연이니 관계보다는 악연에 가까웠으니 서적의 표본들을 참고해 볼 때, 이후에 모른 척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는 이상하게도 하지메에게 매번 싱거운 태도로 말을 걸어오고는 했다.
“장보러 가세요?”
“아니.”
“그러면 일…….”
무츠키는 문득 큼지막한 가방과, 바이크가 향하던 도로의 방향을 한 번 보더니 얼굴에 씁쓸한 웃음을 띄웠다.
“하지메씨, ‘거기’ 가시는 거군요.”
하지메는 불특정한 장소를 지칭하는 단어 속에서도 상대가 자신의 목적지를 알아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매번 알아차리는 걸까. 무츠키는 일전에도 하지메가 ‘그 곳’에 있을 때 메일을 보낸 적도 있다. 너무 되새기려 무리하지는 말라고. 그 메일은 어떤 의미였는지-하지메는 아직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이네요.”
“그런가.”
“표정이요. 하지메씨.”
“표정?”
무츠키는 언젠가, 그리 오래되지는 않은 과거에 제가 자주 짓던 조금은 불투명한 표정으로 입매를 비틀더니 이내 고개를 털었다.
“하지메씨는 그분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 이상한 표정이 되거든요.”
그랬던가? 요새는 자주 거울을 보지 않아서 일일이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이전에는 연기를 잘한다고 칭찬도 받았고 표정은 보편적인 표본을 참고하며 잘 흉내 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뭔가 도드라진다면 서글픈 일이다. 하지메가 자기도 모르게 헬멧의 바이저 위로 손을 올리는 사이에 무츠키가 신호등을 가리켰다. 한 번을 건너보낸 초록 불이 다시 켜져 있다.
“잘 다녀오세요. 하지메씨.”
하지메는 답하지 않았다. 어쩐지 뒤에 남겨둔 무츠키가 저를 잠시 지켜본 것 같았다.
바이크는 도로와 다리와 비포장길을 한참 달려서야 숲의 외곽에 닿았다. 몇 분이나 더 달린 후에야 바이크를 세운 하지메는 찾기 쉬운 이정표 뒤쪽에 바이크를 주차하고 나뭇잎으로 대강 가린 뒤에 가방을 챙겼다.
큼지막한 가방은 크기만큼이나 묵직해서 보통의 성인이라면 무겁다고 앓을 법한 구성으로, 내부는 쿠리하라 모녀가 복작복작하게 추가한 물건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어차피 1박의 가벼운 외출이니 이런 정도의 물건은 필요하지 않다고 몇 번인가 거절해보았지만 그래도-로 시작하는 서라운드 잔소리에는 하지메도 손을 놓았다.
지나친 애정이 낳은 가방을 들고 산길을 오른다. 사람들이 자주 오가지 않는 숲이라 길이 생겼다가도 없어지는 곳이고 이정표도 많지 않은데 하지메는 망설임 없이 발을 옮겨 목적지로 향했다.
그리고 이내 다 낡아빠진 건물 앞에 도착했다. 썩어가는 지붕과 검게 변색한 벽-하지메의 귓가에 언젠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마 이 장소에서 시작된 건지도 모르지.’
하지메는 눈을 감았다.
무엇이 시작되고 무엇이 끝난 건지. 알 수 없는 것들이 치밀어 이명을 만들고 쉽게 사그라졌다. 어지러움 속에 눈을 떠 문을 열자 찌그러진 문이 불쾌한 소리를 내며 빛바랜 실내를 비춰 보였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바닥을 밟으며, 이곳을 찾은 횟수를 세어 보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 번씩, 한 번의 겨울, 한 번의 봄, 한 번의 여름, 그리고 가을, 그것이 한 번의 순회를 거쳐 이번이 벌써 여덟 번.
인간들은 이런 쓸모없는 건물을 오래 남겨두지 않는다더니, 철거되지 않는 것은 왜일까 생각하던 하지메였지만, 언젠가 촬영한 사진을 구경하던 쿠리하라의 가족, 시라이 코타로가 이 장소를 찍은 사진을 가리켜 자기 산이며 건물이라고, 한동안 남겨둘 거라 일상처럼 여상히 말해온 것에 안심했다.
그 날 마침 자카란다에 식사를 하러 왔던 타치바나 사쿠야가 코타로의 그 말을 들은 이후 어쩐지 피로와 속세에 찌든 듯한 얼굴로 부들부들 떨며 코타로를 바라보며 불합리해…라고 중얼거린 것을 들은 하지메지만 그 이후 타치바나가 잘 찾아오지 않아서 자세한 사정까지는 알지 못한다.
이 장소를 찍은 사진을 다시 보던 코타로는 후일 덧붙여 말했다.
‘당신을 위해서가 아냐, 내게도 기억이 있으니까 남겨둘 뿐이야.’
그의 말에서는 짜증이 묻어나왔다. 인간은 기억이 있는 곳을 쓸모가 없음에도 남겨둔다는 것을 알았다. 코타로가 그렇다면 자신은 왜 이 장소를 찾는가, 사진을 찍던 것도 처음 두 번으로 이후에는 찍지도 않는데 어째서.
합리적이지 못하다. 이 행동은 타치바나가 사용했던 어휘 그대로 불합리하다. 그런데도 아이카와 하지메는 매 계절마다 이 폐허를 찾았다.
‘사람은 불합리한 일을 할 때도 있는 거야. 하지메.’
그 목소리는 기억이 나는데, 그때의 그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바닥의 먼지를 대강 치우고 화로의 재를 내다 버리는 것도 이젠 익숙한 일이다. 이전에 잔뜩 쌓아두어 바짝 마른 나무를 채워 불을 붙였다. 물을 떠 오는 동안 불이 제법 괜찮게 타오르자 주전자에 차를 끓이고, 방 하나를 정리해 눅눅한 이불 대신 침낭을 꺼내 깔았다. 기름등에 불을 붙일 즘에는 이미 사위가 어둑해져 있었다.
식사할 생각은 들지 않아서, 하지메는 일찌감치 가방을 끌어다 등을 받히고 책 한권을 꺼내 들었다. 대단하지는 않은 소시민들의 미담들이 엮인 얄팍한 단편 서적은 오래 읽어 책장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사소한 일들, 사소한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들이지만 하지메는 학습으로 이것들이 행복이란 것을 알지, 아직도 이해하지는 못한다. 다만 언제인가부터의 습관이었다. 우연히 그의 방에서 이 책을 본 적이 있고, 그가 읽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서점에서 우연처럼 같은 표지를 본 날 사진 서적들 사이에 고이 끼워 사 오고 말았다. 단지 우연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책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지도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휴대전화에 아마네의 메일이 들어와 있어서 확인하고는 빠르게 답변을 보냈다. 지난 시간 동안, 식사했냐는 물음에도 가책 없이 했다고 거짓말을 섞어 답할 수 있게 되었다. 일상생활을 위해서는 사소한 거짓말이 더 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들 중에서도 조금 더 일찍 배웠다.
하지메는 기름등을 끄고 침낭에 누워 눈을 감았다. 타들어가는 화로의 불빛이 불규칙하게 일렁거리는 중인데도 그리 밝지는 않아 잠들기엔 무리가 없었다.
규칙적인 생활을 고수하는 쪽인데도 어쩐지 이곳에 오면 평소보다 일찍 잠들고 늦게 일어나게 된다. 그 뿐만도 아니다. 오기 며칠 전부터는 사소하게 잔실수가 늘거나 멍하게 보내는 시간도 있다. 어쩌면 아마네가 말했다는 수면장애에 대한 이야기는 자신의 그런 사소한 결함들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르지.
“수면장애, 인가.”
하지메는 제 방에 일렁거리던 푸른 전등의 불빛을 떠올렸다. 푸르고 푸르고 푸른, 흔들리지만 어둠에 먹히지 않고 오래도록 켜져 있던 그 불빛을 떠올리다가 잠기듯 잠에 빠졌다.
하지메는 긴 꿈을 꿨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어쩐지 일어나면 또 울고 있다. 이곳에서 보낸 밤과 꿈들이 그랬듯이 이 또한 익숙한 일이다.
느릿하게 일어난 하지메는 침낭에서 뻣뻣해진 몸을 꺼냈다. 축축한 눈가와 버석한 얼굴을 몇 번인가 손으로 쓸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휴대폰의 메일을 다시 확인해 아마네에게 아침 인사를 보내고, 몸을 일으켜 이리저리 움직여 가볍게 털었다.
침낭을 정돈하고 이번에는 가방 안에서 검은색 파일을 꺼내 들었다. 사람, 풍경, 동물, 가리지 않고 빼곡하게 파일에 자리 잡은 것들은 온통 사진이다. 정리된 것과 정리되지 않은 것들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파일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하지메 본인이 찍은 것이라는 걸까.
“이건……아냐, 이쪽이.”
한참을 파일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하지메는 자카란다에서 찍은 아마네의 사진과 얼마 전에 쿠리하라의 조수였던 가미오카를 따라가 찍은 특수한 파란 나비의 사진, 그리고 초여름의 바닷가 사진을 하나씩 골랐다. 고르고 나서도 한참이나 망설이며 다시 다른 사진들과 비교하다가 결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파일을 덮더니, 비닐로 포장된 종이봉투를 꺼내 사진 석 장을 넣어 닫았다.
봉투를 들고 움직인 곳은 방 한편의 기울어진 서랍장이었다. 이미 일곱 개의 봉투가 차곡차곡 놓인 곳 위에는 먼지와 벌레들이 수북이도 내려 있어서, 이전의 봉투를 탈탈 털어낸 뒤에 새 봉투를 얹어 올렸다.
여덟 번째의 봉투, 가지런한 모양새를 바라보던 하지메는 제 행동이 얼마나 이상한지에 대해 새삼 깨달으며 웃었다. 이곳을 찾는 것은 자신뿐이다. 그러니 사진을 고르는 것도, 이곳에 오는 것도, 남겨두는 것들도 온통 의미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어쩌면 하고-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 이 이상한 행위를 지속하는 것이 자신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응?”
하지메가 특이점을 알아차린 것은 그때였다. 봉투 중의 하나, 중간에 있던 딱 하나의 봉투 모퉁이가 조금 접혀 있다. 물론 산동물이나 바람에 쓸려 접힌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맨 위에 있던 것이어야지, 중간에 있던 것만이 접혀 있는 것은 이상하다.
하지메는 봉투를 확인했다. 사진들은 그대로지만, 봉투의 구석에 깊숙이 넣어 두었던 자신의 습관과는 달리 몇 개의 사진들이 중구난방으로 퍼져 있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 이 봉투를 열었다. 그리고 다시 제 자리에 두었다. 이 인적도 드문 곳에 누가, 그리고 왜 그 자리에 본래의 형태로 되돌려 놓았을까. 마치 확인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너일까.”
그랬으면, 하고.
“너면 좋겠다.”
하지메는 확신도 없으면서 중얼거리고 말았다.
가방에 펜이 있었다. 사진에 날짜 따위를 작성할 때 쓰던 네임펜을 꺼내 들고 하지메는 고민에 빠졌다. 바라는 상대는 있지만, 그가 아니라 타인이 볼만한 내용이라면 약간 곤란해질 것 같다. 마침내 긴 고민 끝에 쓴 것은 짧은 문장 한 줄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쓰고 보니 오히려 이상해 보이는 문장이지 않은가. 하지메는 고개를 기우뚱하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 엉겁결에 문장에 뒤를 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다만 보고 싶다]
음, 한층 더 이상해진 것 같다.
봉투의 여분이 있으면 바꾸고 싶은데 챙겨온 봉투는 딱 한 장이다. 인상을 찌푸리던 하지메는 입가를 매만지다가 결국 덧붙인 문장에 줄을 그었다.
[아무것도 아니다만 보고 싶다]
이게 아닌데.
하지메는 다행히도 봉투를 내려놓으면 아래로 가려지는 면에 글자를 쓰는 것을 선택한 과거의 자신은 몹시 현명했지만, 이후의 자신은 몹시 멍청했다는 것을 자책하며 봉투들을 다시 쌓았다. 흐트러진 사진들을 다시 모서리로 넣고, 두었던 순서대로 차곡차곡 정리하는 손길은 어쩐지 점점 빨라지고 있다.
길어온 물이 남은 것을 전부 화로에 부어 불을 끄고, 침낭이며 책도 가방에 대강 쑤셔 박은 뒤에 빠르게 폐허를 빠져나간다.
어딘가 간질거렸다. 특정한 신체의 부위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몸 안쪽의 뭔가가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걸음이 자꾸 빨라졌다.
기억 속에 있던 목소리가 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죄라도 지었어?’
뛰듯이 걷던 하지메의 걸음이 문득 멎었다. 하지메는 그 말을 듣던 날의 풍경을 기억하고 있다, 그 말을 할 때의 그의 표정도, 각도도, 어떤 식으로 방에 바람이 들어왔고, 어떤 식으로 그가 웃었는지도, 아직 기억하고 있다.
그것이, 기뻤다.
“지우지 말 걸 그랬지?”
하지메는 뒤돌아 폐허를 보며 웃었다.
아마도 네게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 있겠지만. 그래도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보고 싶었다. 참을 수 없이. 이름을 말하면 더 그리워 질까봐 생각으로도 쉽게 말하지 못하는 이름의 사람이.
“다시 보자.”
그렇게 재회를 고했다. 건물에, 아니면 다른 어떤 것에게.
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몇 년간 권유받던 작품이지만 이제야 완주했습니다. 정말로 좋은 작품을 보았고 그래서 이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기억하고 싶어서 짧은 글이나마 남겨보았습니다. 원작은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에게 이 사랑에 벅찬 마음이 닿기를.
그럼 또 뵙겠습니다. 또 좋은 이야기와 좋은 인연으로 어딘가에서.
-2017년 12월 8일, 현재.
'ETC'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앤로/논커플링] 럭키 아이템 : 노란색 (0) | 2020.01.01 |
---|---|
[헌터헌터/키르히소] 차선의 밤 (1) | 2016.01.31 |
[블랙서바이벌/현우이솔] 살아있는 실패 for 쌀토끼님 (0) | 2016.01.17 |
[오소마츠상/토도카라] 475번째 장래희망 for 쟝아님 (0) | 2016.01.10 |
[오소마츠상/토도카라] 매직 아이템? for쟝아님 (0) | 2016.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