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C2018. 3. 15. 23:37


2017년 12월 무료배포된 켄자키+하지메 배포본입니다.

가볍게 읽어주세요.





[NOTHING]


2017 12 8







 어둑한 방안, 남자는 이불 속에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가만하던 숨소리가 불규칙해지더니 무기질적인 눈동자가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어딘가 아득한 시선이 테이블 위의 고전풍 전등으로 향했다.

이 집의 주인이자 동거인인, 쿠리하라 하루카가 며칠 전에 가져다 둔 전등이다.


아마네가 요즘 잘 잠들지 못하는 것 같다고 해서 꺼내봤는데, 하지메씨가 쓰기엔 좀 옛날 디자인일까?’


수면에 지장을 느끼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사용하라고 가져다준 것 일 테니, 잠들기 전에 의례상 몇 분 정도 켜두고는 했는데 어제는 잠들기 전에 끄는 것을 잊었던 모양이다.

색이 변한 천으로 감싸인 둥근 갓 안에 자리한 유리전구는 전구 자체가 짙은 파란색으로 채색된 것으로, 미미하게 흔들리며 푸르게 번져 나오는 불빛은 방안을 흐릿한 파랑으로 물들이고 있다, 남자, 아이카와 하지메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뜨며 몇 분이나 그 빛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갑작스럽게 몸을 일으켜 미련 없이 등을 껐다.


새로운 티셔츠를 꺼내 입으며, 하지메는 하루카에게 어떻게 말해야 순조롭게 전등을 돌려줄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820, 코트를 챙겨 입고 큼직한 가방을 든 차림의 하지메가 자신의 방에서 찻집 자카란다에 올라온 것은 일정이 없는 기준의 평소보다 1시간가량 늦은 시간이었다.

보통이면 재료 손질이며 청소 등으로 바쁠 시간이지만 이 즘이면 한참 뛰어다니던 숏컷의 여성은 느긋이 음식을 차리고 있었고, 벌써 먹기 시작했는지 빵을 우물거리던 포니테일의 소녀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리더니 상대를 확인하고는 활짝 웃었다.


좋은 아침이야 하지메오빠!”

조금 더 자지 않고요. 모처럼의 휴일이고 늘 도와주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좋은 아침입니다. 늦어서 미안해요, 준비를 도왔어야 했는데.”

별말씀을요.”


하지메는 묵직한 가방을 테이블 위에 적당히 올려놓고 제 몫의 식사가 차려진 자리에 앉았다. 차리던 중인지 머그컵이 비어 있다.


오빠는 무슨 잼?”

딸기로 부탁해 아마네짱.”

가볍게 차려진 아침식사를 시작했다. 하지메에게 커피를 건네던 여성, 이 찻집의 주인인 쿠리하라 하루카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저녁에 비가 온다던데 내일 출발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래도 휴일에 다녀오는 게 낫죠.”

매일 도와주시지 않아도 되니까 안전하게 다녀오셔야죠.”


소녀, 쿠리하라 아마네가 오믈렛을 한참 우물거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하지메 오빠, 내가 선물한 핫팩은 넣었어?”

물론 챙겼어.”

물통은?”


길게 이어지던 문답은 하지메의 식사를 방해하고 있다며 하루카가 주의를 주고 나서야 끝이 났다. 꾸지람을 들은 아마네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역시 내가 직접 가서 챙겨줘야 하는데.”

얘는, 네가 따라가면 번거롭기나 하시지.”

치이.”


하루카의 딱 자른 거절에 아마네의 얼굴이 불퉁해졌다. 오늘은 꼭 같이 따라가고 싶다는 의미를 듬뿍 담아 하지메를 쳐다봤지만, 평소라면 제 부탁에 유독 약한 하지메는 오늘따라 자신을 보지도 않고 식사만 열심이다. 포크를 던진 상태로 한참을 시위하던 아마네는 하지메가 식사를 마친 후에 바로 몸을 일으키자 다급하게 따라 일어섰다.

하지메는 빠르게 가방을 챙겨서 아마네가 준비하기도 전에 외출을 먼저 말해왔다.


다녀올게 아마네짱.”


나도.”


하려던 말은 막상 하지메의 웃는 얼굴을 마주하자 막혀 버렸음에도 거두지 못한 시선엔 아직 아쉬움이 듬뿍 묻어있다. 하루카가 그런 아마네의 어깨를 잡으며 상냥한 목소리로 달랬다.


하지메씨도 오랜만에 외출하는 건데 그런 얼굴로 배웅할거니?”

……다녀와, 하지메오빠.”

좋은 사진 찍길 바랄게요.”


마지못해서 말하는 것을 숨기지도 않는 목소리지만 그것마저도 한참 귀엽기만 한지 아마네를 내려다보는 두 사람의 표정은 흐뭇하기만 하다.


다녀오겠습니다.”


하지메는 모녀에게 가만히 웃어 보이고는 등을 돌렸다.

문을 당기자 딸랑-하고 종이 작게 울렸다. 돌아올 때는 아마네를 위해 작은 선물이라도 챙겨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무로 된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하지메의 워커 아래에서, 바람에 날려 온 마른 잎이 버석거리며 부서졌다.

하지메는 저녁에 점검해둔 바이크에 핀을 걸어 가방을 고정하고 시동을 걸었다. 헬멧의 바이저를 내리며 바람이 확실히 서늘해진 것을 깨달았다. 계절이 바뀌고 있다. 비가 올 것이라던 하루카의 말과는 달리 공기는 서늘하고 건조하게 바삭거린다. 긴 배기음을 남기고 하지메는 자카란다를 떠났다.

 



사진이라는 취미는 어쩌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핑곗거리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오늘 하지메의 가방 안에는 사실 필름이 존재하지 않았다. 딱히 핑계를 대거나 그가 직접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사진에 대한 하루카의 말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어떨까나.”


붉은 불이다. 신호등에 멈춰서 있던 하지메의 시선에 스포츠가방을 들고 가는 낯익은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아는 척할 필요는 없겠지 싶어 고개를 괜히 다른 쪽으로 돌리는데 파닥파닥 손을 흔들어 오기에 결국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바이크를 길가로 끌었다.


하지메씨, 좋은 아침이네요.”


솔직히 그다지 좋은 아침은 아니지만 인사라는 것은 원래 솔직함과는 거리가 있다.


좋은 아침이다. 무츠키.”


카미조 무츠키, 어떤 의미에서 이전에 동료라는 이름으로 묶였지만, 지금은 하지메 자신이 생각하기에 저와는 깊은 연관이 없다고 생각되는 소년이다. 이전에도 좋은 의미의 인연이니 관계보다는 악연에 가까웠으니 서적의 표본들을 참고해 볼 때, 이후에 모른 척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는 이상하게도 하지메에게 매번 싱거운 태도로 말을 걸어오고는 했다.


장보러 가세요?”

아니.”

그러면 일…….”


무츠키는 문득 큼지막한 가방과, 바이크가 향하던 도로의 방향을 한 번 보더니 얼굴에 씁쓸한 웃음을 띄웠다.


하지메씨, ‘거기가시는 거군요.”


하지메는 불특정한 장소를 지칭하는 단어 속에서도 상대가 자신의 목적지를 알아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매번 알아차리는 걸까. 무츠키는 일전에도 하지메가 그 곳에 있을 때 메일을 보낸 적도 있다. 너무 되새기려 무리하지는 말라고. 그 메일은 어떤 의미였는지-하지메는 아직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이네요.”

그런가.”

표정이요. 하지메씨.”

표정?”


무츠키는 언젠가, 그리 오래되지는 않은 과거에 제가 자주 짓던 조금은 불투명한 표정으로 입매를 비틀더니 이내 고개를 털었다.


하지메씨는 그분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 이상한 표정이 되거든요.”


그랬던가? 요새는 자주 거울을 보지 않아서 일일이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이전에는 연기를 잘한다고 칭찬도 받았고 표정은 보편적인 표본을 참고하며 잘 흉내 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뭔가 도드라진다면 서글픈 일이다. 하지메가 자기도 모르게 헬멧의 바이저 위로 손을 올리는 사이에 무츠키가 신호등을 가리켰다. 한 번을 건너보낸 초록 불이 다시 켜져 있다.


잘 다녀오세요. 하지메씨.”


하지메는 답하지 않았다. 어쩐지 뒤에 남겨둔 무츠키가 저를 잠시 지켜본 것 같았다.

 



바이크는 도로와 다리와 비포장길을 한참 달려서야 숲의 외곽에 닿았다. 몇 분이나 더 달린 후에야 바이크를 세운 하지메는 찾기 쉬운 이정표 뒤쪽에 바이크를 주차하고 나뭇잎으로 대강 가린 뒤에 가방을 챙겼다.

큼지막한 가방은 크기만큼이나 묵직해서 보통의 성인이라면 무겁다고 앓을 법한 구성으로, 내부는 쿠리하라 모녀가 복작복작하게 추가한 물건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어차피 1박의 가벼운 외출이니 이런 정도의 물건은 필요하지 않다고 몇 번인가 거절해보았지만 그래도-로 시작하는 서라운드 잔소리에는 하지메도 손을 놓았다.


지나친 애정이 낳은 가방을 들고 산길을 오른다. 사람들이 자주 오가지 않는 숲이라 길이 생겼다가도 없어지는 곳이고 이정표도 많지 않은데 하지메는 망설임 없이 발을 옮겨 목적지로 향했다.

그리고 이내 다 낡아빠진 건물 앞에 도착했다. 썩어가는 지붕과 검게 변색한 벽-하지메의 귓가에 언젠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마 이 장소에서 시작된 건지도 모르지.’


하지메는 눈을 감았다.

무엇이 시작되고 무엇이 끝난 건지. 알 수 없는 것들이 치밀어 이명을 만들고 쉽게 사그라졌다. 어지러움 속에 눈을 떠 문을 열자 찌그러진 문이 불쾌한 소리를 내며 빛바랜 실내를 비춰 보였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바닥을 밟으며, 이곳을 찾은 횟수를 세어 보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 번씩, 한 번의 겨울, 한 번의 봄, 한 번의 여름, 그리고 가을, 그것이 한 번의 순회를 거쳐 이번이 벌써 여덟 번.


인간들은 이런 쓸모없는 건물을 오래 남겨두지 않는다더니, 철거되지 않는 것은 왜일까 생각하던 하지메였지만, 언젠가 촬영한 사진을 구경하던 쿠리하라의 가족, 시라이 코타로가 이 장소를 찍은 사진을 가리켜 자기 산이며 건물이라고, 한동안 남겨둘 거라 일상처럼 여상히 말해온 것에 안심했다.


그 날 마침 자카란다에 식사를 하러 왔던 타치바나 사쿠야가 코타로의 그 말을 들은 이후 어쩐지 피로와 속세에 찌든 듯한 얼굴로 부들부들 떨며 코타로를 바라보며 불합리해라고 중얼거린 것을 들은 하지메지만 그 이후 타치바나가 잘 찾아오지 않아서 자세한 사정까지는 알지 못한다.


이 장소를 찍은 사진을 다시 보던 코타로는 후일 덧붙여 말했다.


당신을 위해서가 아냐, 내게도 기억이 있으니까 남겨둘 뿐이야.’


그의 말에서는 짜증이 묻어나왔다. 인간은 기억이 있는 곳을 쓸모가 없음에도 남겨둔다는 것을 알았다. 코타로가 그렇다면 자신은 왜 이 장소를 찾는가, 사진을 찍던 것도 처음 두 번으로 이후에는 찍지도 않는데 어째서.

합리적이지 못하다. 이 행동은 타치바나가 사용했던 어휘 그대로 불합리하다. 그런데도 아이카와 하지메는 매 계절마다 이 폐허를 찾았다.


사람은 불합리한 일을 할 때도 있는 거야. 하지메.’


그 목소리는 기억이 나는데, 그때의 그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바닥의 먼지를 대강 치우고 화로의 재를 내다 버리는 것도 이젠 익숙한 일이다. 이전에 잔뜩 쌓아두어 바짝 마른 나무를 채워 불을 붙였다. 물을 떠 오는 동안 불이 제법 괜찮게 타오르자 주전자에 차를 끓이고, 방 하나를 정리해 눅눅한 이불 대신 침낭을 꺼내 깔았다. 기름등에 불을 붙일 즘에는 이미 사위가 어둑해져 있었다.


식사할 생각은 들지 않아서, 하지메는 일찌감치 가방을 끌어다 등을 받히고 책 한권을 꺼내 들었다. 대단하지는 않은 소시민들의 미담들이 엮인 얄팍한 단편 서적은 오래 읽어 책장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사소한 일들, 사소한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들이지만 하지메는 학습으로 이것들이 행복이란 것을 알지, 아직도 이해하지는 못한다. 다만 언제인가부터의 습관이었다. 우연히 그의 방에서 이 책을 본 적이 있고, 그가 읽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서점에서 우연처럼 같은 표지를 본 날 사진 서적들 사이에 고이 끼워 사 오고 말았다. 단지 우연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책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지도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휴대전화에 아마네의 메일이 들어와 있어서 확인하고는 빠르게 답변을 보냈다. 지난 시간 동안, 식사했냐는 물음에도 가책 없이 했다고 거짓말을 섞어 답할 수 있게 되었다. 일상생활을 위해서는 사소한 거짓말이 더 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들 중에서도 조금 더 일찍 배웠다.


하지메는 기름등을 끄고 침낭에 누워 눈을 감았다. 타들어가는 화로의 불빛이 불규칙하게 일렁거리는 중인데도 그리 밝지는 않아 잠들기엔 무리가 없었다.


규칙적인 생활을 고수하는 쪽인데도 어쩐지 이곳에 오면 평소보다 일찍 잠들고 늦게 일어나게 된다. 그 뿐만도 아니다. 오기 며칠 전부터는 사소하게 잔실수가 늘거나 멍하게 보내는 시간도 있다. 어쩌면 아마네가 말했다는 수면장애에 대한 이야기는 자신의 그런 사소한 결함들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르지.


수면장애, 인가.”


하지메는 제 방에 일렁거리던 푸른 전등의 불빛을 떠올렸다. 푸르고 푸르고 푸른, 흔들리지만 어둠에 먹히지 않고 오래도록 켜져 있던 그 불빛을 떠올리다가 잠기듯 잠에 빠졌다.

 

하지메는 긴 꿈을 꿨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어쩐지 일어나면 또 울고 있다. 이곳에서 보낸 밤과 꿈들이 그랬듯이 이 또한 익숙한 일이다.



 

느릿하게 일어난 하지메는 침낭에서 뻣뻣해진 몸을 꺼냈다. 축축한 눈가와 버석한 얼굴을 몇 번인가 손으로 쓸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휴대폰의 메일을 다시 확인해 아마네에게 아침 인사를 보내고, 몸을 일으켜 이리저리 움직여 가볍게 털었다.

침낭을 정돈하고 이번에는 가방 안에서 검은색 파일을 꺼내 들었다. 사람, 풍경, 동물, 가리지 않고 빼곡하게 파일에 자리 잡은 것들은 온통 사진이다. 정리된 것과 정리되지 않은 것들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파일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하지메 본인이 찍은 것이라는 걸까.


이건……아냐, 이쪽이.”


한참을 파일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하지메는 자카란다에서 찍은 아마네의 사진과 얼마 전에 쿠리하라의 조수였던 가미오카를 따라가 찍은 특수한 파란 나비의 사진, 그리고 초여름의 바닷가 사진을 하나씩 골랐다. 고르고 나서도 한참이나 망설이며 다시 다른 사진들과 비교하다가 결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파일을 덮더니, 비닐로 포장된 종이봉투를 꺼내 사진 석 장을 넣어 닫았다.


봉투를 들고 움직인 곳은 방 한편의 기울어진 서랍장이었다. 이미 일곱 개의 봉투가 차곡차곡 놓인 곳 위에는 먼지와 벌레들이 수북이도 내려 있어서, 이전의 봉투를 탈탈 털어낸 뒤에 새 봉투를 얹어 올렸다.


여덟 번째의 봉투, 가지런한 모양새를 바라보던 하지메는 제 행동이 얼마나 이상한지에 대해 새삼 깨달으며 웃었다. 이곳을 찾는 것은 자신뿐이다. 그러니 사진을 고르는 것도, 이곳에 오는 것도, 남겨두는 것들도 온통 의미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어쩌면 하고-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 이 이상한 행위를 지속하는 것이 자신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


하지메가 특이점을 알아차린 것은 그때였다. 봉투 중의 하나, 중간에 있던 딱 하나의 봉투 모퉁이가 조금 접혀 있다. 물론 산동물이나 바람에 쓸려 접힌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맨 위에 있던 것이어야지, 중간에 있던 것만이 접혀 있는 것은 이상하다.

하지메는 봉투를 확인했다. 사진들은 그대로지만, 봉투의 구석에 깊숙이 넣어 두었던 자신의 습관과는 달리 몇 개의 사진들이 중구난방으로 퍼져 있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 이 봉투를 열었다. 그리고 다시 제 자리에 두었다. 이 인적도 드문 곳에 누가, 그리고 왜 그 자리에 본래의 형태로 되돌려 놓았을까. 마치 확인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너일까.”


그랬으면, 하고.


너면 좋겠다.”


하지메는 확신도 없으면서 중얼거리고 말았다.

 

가방에 펜이 있었다. 사진에 날짜 따위를 작성할 때 쓰던 네임펜을 꺼내 들고 하지메는 고민에 빠졌다. 바라는 상대는 있지만, 그가 아니라 타인이 볼만한 내용이라면 약간 곤란해질 것 같다. 마침내 긴 고민 끝에 쓴 것은 짧은 문장 한 줄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쓰고 보니 오히려 이상해 보이는 문장이지 않은가. 하지메는 고개를 기우뚱하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 엉겁결에 문장에 뒤를 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다만 보고 싶다]


, 한층 더 이상해진 것 같다.

봉투의 여분이 있으면 바꾸고 싶은데 챙겨온 봉투는 딱 한 장이다. 인상을 찌푸리던 하지메는 입가를 매만지다가 결국 덧붙인 문장에 줄을 그었다.


[아무것도 아니다만 보고 싶다]


이게 아닌데.

하지메는 다행히도 봉투를 내려놓으면 아래로 가려지는 면에 글자를 쓰는 것을 선택한 과거의 자신은 몹시 현명했지만, 이후의 자신은 몹시 멍청했다는 것을 자책하며 봉투들을 다시 쌓았다. 흐트러진 사진들을 다시 모서리로 넣고, 두었던 순서대로 차곡차곡 정리하는 손길은 어쩐지 점점 빨라지고 있다.


길어온 물이 남은 것을 전부 화로에 부어 불을 끄고, 침낭이며 책도 가방에 대강 쑤셔 박은 뒤에 빠르게 폐허를 빠져나간다.

어딘가 간질거렸다. 특정한 신체의 부위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몸 안쪽의 뭔가가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걸음이 자꾸 빨라졌다.


기억 속에 있던 목소리가 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죄라도 지었어?’


뛰듯이 걷던 하지메의 걸음이 문득 멎었다. 하지메는 그 말을 듣던 날의 풍경을 기억하고 있다, 그 말을 할 때의 그의 표정도, 각도도, 어떤 식으로 방에 바람이 들어왔고, 어떤 식으로 그가 웃었는지도, 아직 기억하고 있다.

그것이, 기뻤다.


지우지 말 걸 그랬지?”


하지메는 뒤돌아 폐허를 보며 웃었다.

아마도 네게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 있겠지만. 그래도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보고 싶었다. 참을 수 없이. 이름을 말하면 더 그리워 질까봐 생각으로도 쉽게 말하지 못하는 이름의 사람이.


다시 보자.”


그렇게 재회를 고했다. 건물에, 아니면 다른 어떤 것에게.

 

 

 

 

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몇 년간 권유받던 작품이지만 이제야 완주했습니다. 정말로 좋은 작품을 보았고 그래서 이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기억하고 싶어서 짧은 글이나마 남겨보았습니다. 원작은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에게 이 사랑에 벅찬 마음이 닿기를.

그럼 또 뵙겠습니다. 또 좋은 이야기와 좋은 인연으로 어딘가에서.

 

-2017128, 현재.

Posted by 현재(now)
커뮤니티2018. 3. 14. 23:58

 그러니까, 보편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오늘은 특별한 이야기를 할 생각이 없다. 보편적인, 평범한 경우에 말이다.


 보통은, 유독 특별한 날-말하자면 편의점과 마트 등지가 들썩거리면서 유치한 복장의 직원들을 일시적으로 추가 고용하고, 빨강, 분홍 리본을 주렁주렁 달고 하트를 붙여 놓는 날에, 유독 사이가 좋고 친밀한 사이인 남자아이가 문 밖에 리본이 달린 케이크 상자를 들고 서 있으면, 그러면, 그 모습을 인터폰 화면에서 마주치게 되면 보통 어떤 생각을 하는가. 하는 이야기 말이다.



[나쁘지는 않은]

-for 슭곰님


2018 3 14






 한경은 턱을 괴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야트막한 높이의 고급 테이블 위에는 해피 화이트데이! 라는 글자가 은박으로 들어간 민트색 상자가 놓여 있었다. 참 악취미적인 디자인이기도 하지. 라고 생각하며 검지손가락으로 상자를 밀었다. 아 담배피고 싶다. 기지개를 켜다가 다시 소파에 몸을 굽히고 앉아 몇 번을 내쉰 건지도 잊은 길고 긴 한숨을 내쉬다가 다시, 결국 상자다.



 '아니 차라리 상자에 집중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조용해지니 물소리가 들렸다. 샤워기 소리, 저는 혼자 지내고 있고 지금 소파에 찌그러져 있는 셈이니 동시에 두 장소에 있을 수 없는 이상에야 제가 씻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욕실을 사용하고 있는 손님은 물론 따로 있었다. 이즘에서 짚어둘 것이 있다. 한경에 명예에 관련된 이야기다. 화이트데이와 욕실이라는 단어를 결부해 자연스럽게 연상할 수 있는, 마치 첫 장면제시와 같은 보편적인 상황...그러니까, 그렇고 그래서 그런 이야기 같은, 이 즘에 패스워드를 걸어 내용을 보호해야하는 상황은 아니다.



 '차라리 그러면 좋겠게.'



 같은 가정이 지나간 것도 같지만 때로 보편적인 망상은 일상적인 평화 속에서 쉽게 망가지기에, 그래서 망상이라 부르는 것이다. 가정이라고 해봐야 만약을 상정한 것이지,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제 일상에 아무래도 그 가능성은 없는 모양이지. 한경은 제가 세었다면 마흔다섯번째였을 한숨을 뱉었다.


 그러니까 차근차근하게 시간을 돌려, 10분 정도 전의 일이다.



 -



 탐정이라고 거창한 직업을 가진 한경은 아쉽게도 한국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렇다. 결국은 주업무가 불륜과 고양이찾기와 SNS추적이라는 소리다. 그런 한경에게 발렌타인데이니 화이트데이니 하는 것은 대목이라는 단어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고 결국 한경은 오늘 아침부터 저녁까지, 꼬박 열 몇시간을 이 세상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는 작업에 할애했으며 자본주의 국가에 걸맞게 막대한 소득을 올리며 직업을 바꿔야 할까를 진지하게 고민하던 참이었다.


 물론 주식으로 돈을 벌고는 있다만, 탐정이라는 단어는 어딘가 로망이 있는 것도 사실이어서 관두고 싶지는 않은데, 이렇게 깎여나가다간 금방 늙어버릴 지도 모른다. 주름살도 자글자글하게 생기고, 얼굴도 지치고, 그래도 나름대로 세수하고 쳐다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얼굴이라고 생각하지만 직업 때문에 늙어버리면 아깝지 않은가. 아, 물론 늙으면 늙는다고 해도 분명 잘생긴 미남일 것은 의심하지 않고 있다.


 차를 주차하고, 오피스텔에 돌아와 막 코트를 벗어 걸고,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일찍 잘까, 고민하던 즘에 현관벨이 울렸다. 10시를 넘긴 시간이니 손님이 오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만 손님이 아닌 쪽도 이상해서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개인적으로 찾아올 친구라는 사람들은 손님이란 사람들보다 몇 배나 위험했고, 대부분은 남아 있지 않았다.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인터폰을 켜자, 흐리고 회푸른 화면이 사람을 비췄다. 외국 야구구단의 점퍼에, 사이드백을 메고, 모자를 눌러쓴 소년의 얼굴, 그리고 케이크 상자. 고개가 돌아가며, 모자 아래의 얼굴을 확인하듯 비췄다. 약간 짜증이 난 듯 뚱한 표정이 흐린 화면 속에서도 확실하게 보였다.


 한경은 고개를 기울였다.



 "이유...? 네가 왜..."



 거기 있어. 오늘, 왜 하필, 케이크상자를 들고. 의문을 가지고 소년의 얼굴을 쫓다가 다시 멈칫거릴 즘에, 쾅, 하고 금속제 현관문이 요란하게도 소리를 울렸다. 걷어찼다. 남의 사무실 문을 한밤중에. 정말 굉장하고 온화한 매너가 아닐 수 없어서 한경은 머뭇거림도 멈추고 얼떨결에 현관문을 열었다.



 "그..."


 "아. 늦은 밤에 미안."



 소년, 이유, 유나는 한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잘랐다. 전혀 미안한 태도가 아니다. 이건 한경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보통은 미안해하는 사람이 오피스텔의 문을 걷어차며 등장하진 않는다. 유나는 케이크상자를 내밀었다. 은박의 화이트데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도드라진, 화면 속에서도 당황스러웠고 실제로 보니 세배 쯤 당황스러운 상자를.



 "그...이걸."


 "아. 이것 좀 버려줘."



 한경은 상자를 안고 당황에 빠졌다. 전개를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요즘 방영하는 특촬물 같다.



 "응?"


 "그리고 욕실 좀 쓸게."



 자기 욕실인줄 알겠네. 욕이라도 하려다가 일단은 상황파악이 먼저다 싶어, 그리 아름답지 않은 성질머리를 꾹 눌러 삼키고는, 어른의 인내심과 각고의 노력 끝에, 한경은 어떻게든 상냥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그 좀 따라갈 수 있게 설명해주면 안될까."



 한경의 말에 유나가 흐리게 웃었다. 어딘가 뒤틀린 웃음이었다. 그가 모범생이라는 사실은 그의 말에서도, 후일 유나 몰래 진행한 뒷조사에서도 확실하게, 아마 유나 본인보다도 많은 것을 알고있는 한경이었지만 텍스트 안의 소년과 눈 앞의 소년이 주는 괴리감은 이따금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어긋날 때가 있어서, 한경은 그게 낯설고, 그게 조금, 어쩌면 조금보다는 많이 흥미로웠다.

 

 그리 유쾌한 이야기는 아닌데. 로 시작한 이야기는 짤막했다. 소년은 아침에 편지를 받았다. 방과후에 AA카페로 나와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리고 소년이 나간 카페에 예쁘장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초콜릿 케이크에 예쁜 하얀색 초콜릿이 올라가 있었고, 소녀는 사랑을 고백했다...까지는 오늘 일어날 법한 보편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거기서 이야기는 일변되었다.



 "그게...걔가 누군지 모르겠어서."


 "?"


 "근데 너 이름이 뭐냐고 물었더니 케이크를 던지더라고. 내 얼굴에."


 "...허."



 그렇게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나고, 소년은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물티슈로 응급처치만을 끝내고, 일단은 민폐겠다 싶어 찌그러진 케이크를 대충 추스려 제일 가까운 지인인 한경의 오피스텔로 대피했다는 이야기다...솔직히 이 즘 부터 한경은 이해를 포기했다. 그래서, 욕실은 써도 되는 거지? 하는 물음에 수건을 꺼내 주고, 소년이 욕실에 들어간 뒤로는 줄곧 케이크상자를 눈 앞에 두고 지금에 이르렀다...


 ...솔직히 그래, 아닐 줄은 알았다.


 일단은 성별도 다르고, 나이도 있고, 그래도 일단 그 화면을 보면, 누구나 잠깐은 가정하게 되지 않나 말이다. 아무리 비판적으로 기념일을 비난하고 그래도 응? 우리는 세뇌당하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고 말이지. 보편적으로 영화나, 드라마나, 아니 거기까지 안가도 트위터나 페이스북만 봐도 오늘이 어떤 날인데.


 혹시나 할 수 있잖아. 사람이. 응?


 한경은 그런 생각들을 찌그러진 케이크 마냥 구겨버렸다.



 '그래 내가 쓰레기지...'



 잠깐, 기대한 것도 사실이다. 그도 그럴게 소년은 부쩍 한경을 찾았고, 이따금은 식사도 했으니까, 제법 귀엽게 굴기도 하고 놀러오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하필 오늘이 오늘이었으니까.



 "갈아입을 옷 좀 빌려줘-"



 라는 목소리에 한경은 더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트레이닝 복을 찾았다. 아마도 이 날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 같다. 기억에 키워드를 붙일 수 있다면 당연히 어이없음과, 한심함이라는 해시태그를 걸어둘 것이다. 옷을 가져다준 뒤 몇 분 되지 않아 유나는 자신의 바지에 티셔츠만을 갈아 입고, 젖은 머리칼에 수건을 감고 걸어나왔다. 크림이 잘 지워지지 않았다며 투덜거리는 유나에게서는 확실히, 초콜릿케이크의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신세 졌네. 미안."


 "뭐...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의외로 선선하게 건네는 사과에 어른으로 마냥 화를 낼 수 만도 없어서 대충 대꾸하고 있자니 물이 떨어지는 유나의 머리카락이 걸렸다. 딱히 카페트를 새로 청소했기 때문은 아니다. 어린애가 감기에 걸려서 콜록거리는 꼬라지는 보통의 사람들도 보고 싶어하진 않겠지.



 "앉아봐."



 유나는 잠자코 소파에 앉았다. 비싼 가죽 소파에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드라이기를 꺼내뒀는데도 왜 쓰지 않았냐고 묻자 잘 안쓴다는 대꾸가 돌아왔다. 제대로 털기라도 하지. 나이도 제법 먹었는데 칠칠맞다는 생각을 하며 수건으로 머리칼을 대신 털어낸다. 갈색머리카락은 물에 젖어 어두운 고동색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목을 흘러내리던 물을 들어 닦으며 이게 무슨 종노릇인가 싶어, 한경은 마흔일곱번째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학교 가면 그 여자애 사과해 둬라."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래 뭐...알아서 하겠지."



 수건을 탈탈 털어낸다. 조금 거친 손길에 분명 감정이 들어가 있는 것은 분명한데도 툴툴거리거나 짜증을 낼 법한 유나는 어째서인지 제 손을 바라보며 잠자코 얌전히 앉아 있었다. 내려보이는 조그만 머리통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한경은 문득 손을 멈추고 수건 위에서 손바닥으로 머리통을 감쌌다. 작다. 저보다, 확실하게.



 "경이형."



 지가 필요할때만 형이지. 그 말에도 한경은 대꾸하지 않았다.

 유나가 키득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아침부터 고생했는데 이게 무슨 피곤에 절어서 마감하는 하루일까, 일진이 사나운 것에도 정도가 있지. 이 녀석이 얽혀서 좋은 일도 없다고 머릿 속으로 중얼거리는 참에-



 "형. 바디클렌저, 오렌지향이었구나, 같은 냄새가 나."



 웃음 섞인 말을 뱉으며 유나가 자기 손을 들어 보였다. 한 박자 느리게 내려다보자 수건을 지나, 머리카락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얼굴이 보기 드물게 활짝 웃고 있었다. 뭘 대단한 발견이라고 대단치도 않은 말을 하는 것 치고는 꽤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렇지. 당연히 같은 것으로 씻었으니 같은 향이 나는 것도 당연한데. 그런데.



 "이거 냄새 좋다."



 이상하게, 한경은 아무 말도 꺼내거나 다른 말도 대답하지 못하고 유나가 의아한 듯 제 이름을 다시 물어오기 전까지 굳어 있었다. 분명 지친 하루인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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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현재(now)
커뮤니티2018. 3. 14. 22:47

[발신인 불명]

-for 민또님


2018 3 14






[2017년 11월 11일]



 유독 지친 하루였다.

 치카게 라이카는 계산을 끝낸 장부를 접고 금전보관함의 문을 닫으며 뻐근한 어깨를 다독였다. 사람은 정말 너무 쉽게 지친다. 

 물론 그런 나약하고 연약한 신체로 살아간다는 점마저도 아름답고 어여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지친 것은 지친 것이고 몸에서 울리는 삐걱거림에 불쾌함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어서, 백색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사이에 자리한, 손님들에게서는 온화하다는 평을 자주 받는 라이카의 눈매가 일순 짜증을 섞어 일그러졌다.


 '목욕이라도 해야 할까.'


 그 뒤에 떠올리는 것은 라이카의 집, 욕실에 자리한 작고 자그마한 욕조가 아니었다. 너무 쉽게 떠올려지는 붉은 강. 어두운 하늘, 그 연상을 사진으로 옮겨 보여준다면 지옥의 강가 같다 평할 듯한 생경한 풍경을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던 라이카의 입매가 조금 굳어졌다.


 유용함이란 단어를 넘어 필수 적이란 것은 알고 있으나 치카게 라이카는 '그 장소'를 그리 기호하지는 않는다. 넘실거리는 것의 색이 제가 좋아하는 먹이의 색을 빼어 닮았음은 확연하나, 그 건조한 말라붙음을 피부로 채우는 행위에서 오는 쾌감이, 사랑해 마지 않는 섭취라는 행위에서 오는 감동과 근원과 향이 닮아 있다는 것이 불쾌한지도 모른다.


 그리 아름답지 않은 감정으로 머리카락을 넘기다가 문득 이상함을 깨닫는다. 요즘, 짜증이 늘지 않았나. 아득한 시간 동안을 어여쁨과 사랑으로 살아가서 매일이 행복하던 치카게의 삶에서 짜증이란 것은 흐릿하고 가볍고 쉽게 흩어지는 순간들이었는데, 지금에야 인식한 것이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늘었다. 확연하게.


 이마를 짚은 치카게가 기억을 더듬는다. 작년까지는 확실히 괜찮았다. 봄까지도, 그렇다면-



 -♪♪♪♪



 상념을 끊어내며 전화벨이 울렸다. 가게의 전화인가 싶었지만 휴대폰이란 것을 음으로 알고 챙겨두었던 가방을 급하게 열어 스마트폰을 꺼냈다. 가방 안에 있던 전화음은 확실해졌다. 라틴 풍의 벨라 루나. 기본음이었던 것을 조작하다가 고개를 들어 흐릿하게 웃던 얼굴을 떠올리느라, 한박자 느리게 전화를 받았다. 인사를 하기 전에 쇳소리가 섞인, 낮은 목소리가 느릿하게 들려왔다.



 [아, 주무시는가 싶어 전화를 끊을까 했는데. 너무 늦은 시간인가요.]


 "이미 전화하고 물어 무엇하니."



 다 큰 성인이 10시 반에 수면은 무슨, 공연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이렇게 이른 시간이 아닌가. 힐끔 시계를 보던 치카게는 얇은 코트를 다시 벗으며 카운터에 앉았다.


 

 [그도 그렇군요, 제가 좀 서투니 이해하세요.]


 "나는 충분히 널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단다."



 부드럽게 달래듯 대답하는 말이지만 치카게의 진심이기도 했다. 전화 너머의 그럼요, 하고 말하며 쿡쿡하고 웃는 소리는 얕은 잔상을 남겼다. 어쩐지 그 얕은 웃음소리는 조금 무거웠고, 소리 뒤에는 치카게에게 얕은 생채기를 남겼다. 사실인데, 정말인데. 정말이란 단어를 쓰기에도 안타까울 정도로 분명히 노력하고 있는데.


 그 모든 순간에 참아 삼킨 속엣말을 전부 내어 보이면 어떨까, 그 뒤에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치카게는 시리게 배가 고팠다. 저녁을 먹지 않아서만은 아니다. 이 느릿한 목소리는 허기를 동반했다. 참는 것에도 노력하는 것에도 익숙할 정도로 익숙한 저를 낯설게 만들 정도의 허기가. 진득하게, 따라 붙었다.



 "무슨 일 이니."


 [그냥, 생각나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오늘은 어떠셨습니까.]



 진열대에 몇 남지 않은 화과자 만큼이나 달작한 말이었지만 그 허울과 껍데기에 흔들리기에는 그를 안 시간이 너무 길어서, 치카게는 늘 그랬듯이 달짝지근한 말을 흩으며 가벼움을 가장해 말투를 만들어 냈다.



 "엄청 바빴단다. 포키데이지 않니. 도대체 빼뺴로나 먹을 날에 왜 달달하다고 이 가게까지 찾는 지 모르겠구나. 아침 부터 밤까지 바빠서 의자에 엉덩이도 붙이지 못해서, 이런 날이 다 사라졌으면 싶었단다."


 [그거 이상하군요, 당신이라면 기뻐하는 사람들의 기뻐하는 모습에도 사랑스럽다 어여쁘다 하실 줄 알았습니다만.]



 그래, 참으로 이상하다. 분명 그런 날들이 압도적이었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들어오는 어린 것들,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고아한 말투를 꼭 닮은 노부부의 상냥하고 따뜻한 대화들, 그 모든 것들이 사랑스럽고 어여쁘고 고운 것에는 변화가 없었으나 이따금 짜증과 허기가 돋았다. 그 치들을 먹고 싶은 것은 아니다. 주면 거절하지는 않겠으나 최근에는 주린 것이 줄었다. 주린 것은 사실인데 주리지 않다. 짜증이 치밀고는 했다. 이게 아닌데. 바라는 것도 명확하지 않은데 치밀어 불쾌한 것들이 몇 번이고 일어났다.


 짐작이 아예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정하기 싫은 것도 있겠지. 머릿 속에서 구르는 것들이 뾰족함이 되어 목소리가 저절로 날카로워 졌다.



 "네가 내 무얼 알고."


 [그럼요, 소인은 치카게씨를 모르지요.]



 받아내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오히려 아팠다. 사실은, 사실은 아프지 않은 순간이 없다. 화과자 처럼 달아서 혀가 아릿하다가 말차보다도 씁쓸하고 아프게 입안을 후비는 것 같아서, 이따금 대화라도 하거나 문자라도 오가는 날이면 치카게는 따끔거리는 고통에 몇 번이고 대화를 되새기며 일상을 멈춰야만 했다. 그보다 아픈 것은 그런 말 쪼가리라도 없는 시간들이다. 고통스러운데도 사라지면, 멈추면, 그 쪽이 더 아플 것 같아서, 깊이도 없이 얕게, 단어가 오간다.


 그럼에도 가끔, 깊게 베이는 것은 아마도 그가 말을, 글을 다루는 사람이기 때문이겠지.


 저는 칼이 좋았다. 차라리 네가 칼로 대화한다면 대화의 순간들은 이리 날카롭진 않을까, 일반론과는 다른 것들을 가정하다가 칼조차 다루지 못하게 된 그의 손을 떠올린다. 입안이 달았다. 지친 탓이리라.



 "그래, 너는 어떠했니, 기념일을 즐겼니."


 [즐기지는 못했습니다만.]


 "어찌하여."


 [글쎄요, 은애하시는 분이 기념일 같은 것을 기호하지 않아서.]



 짤막한 침묵이 스쳤다. 은애라고 했나, 달 아래에서 그리도 상냥하고 예쁘장하게 미래니 약속이니 하는 말들을 주워 섬기고는 은애라, 사랑같은 말을 무섭지도 않게 입에 담는다. 전화로 이어져 있는 상대가 누군줄을 알고 겁도 없이, 상대의 이름을 알면, 내가 어찌할 줄을 알고, 실로 건방진 자다. 하지만, 그리 생각하는 중에도 치카게는 동시에 알았다. 누군지 알면, 내가 먹을 수 있을까. 해칠 수 있을까.


 네가 은애하는 사람을, 내가 어찌 해칠까. 그러면 너는 나를 괴물로 볼텐데.


 괴물로 살아가는 삶이 지독한 것은 아니다. 저는 행복하고 기쁨에 찬 괴물이었고 삶의 나날은 아름답고 어여쁜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네가 은애하는 자가 그 날들을 사랑하게 된다면 좋겠구나."


 [네, 실로.]



 내뱉는 말이 진심이 아니었는데도, 돌아온 말이 진심 같아서 무거웠다. 뾰족하고 둔탁한 것들이 머릿 속에, 마음 속에, 또는 몸에 굴러다녔다. 돌구르는 소리가 난다. 아마도 지친 탓이리라. 의례적인 말들을 몇 마디 주고 받다가 검게 변한 액정의 스마트폰을 테이블 위에서 밀어두고 엎드렸다. 지독하게 몸이 무거웠다. 감기에 걸리지 못하는 몸으로 치카게는 감기약을 꺼내 삼켰다.


 목에 걸렸다가 넘어간 뒤에 남겨진 쓴맛마저도, 약의 흐릿한 향마저도 떠오르게 하는 것이 같아서 속이 아리다.



-



 왜, 그 날을 떠올렸을까, 아마도 오늘이 같은 기념일이었기 때문이다.

 연인들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정해 특히 사랑을 위해 보내기로 정한 날, 사람들은, 인간들은 오늘도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사랑스러운 말들을 하며 치카게의 가게를 찾았다. 라이카는 상냥한 얼굴로 사랑스러운 사람들을 응대하고 축복의 말을 건네는 중에도 몇 번인가 가게를 닫고 싶다는 충동을 삼켜야 했다.


 이전에는 알아차리고 나면 달라질 줄을 알았다.


 그래서 채근하며 마지막으로 기울어가던 너를 붙잡고, 어린애처럼 몰아 붙여서 대답을 들었다. 끝을 바랐다. 행복이라고는 가정하지 않았지만 그 반대라고 하더라도 끝내지 않으면 고장난 허기가 영영 고쳐지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에 내몰려서 안달이 났다. 혹시나, 설마, 하며 맞이한 그 날은 최악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말하던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연결된 모든 날들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접어두기로 했다.


기대했다가 버렸다가, 그리고 다시 떠올리는 모든 날들은 천국인 동시에 지옥 같았다.


 돌이켜보니 조금 더 네가 솔직했다면 좋았을 것 같다.


 어여쁘지 않아도 좋으니, 달지 않아도 좋으니, 살아서 그저, 이 앞에 서서,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작년의 그 날처럼 전화라도 걸어주면 좋겠다. 웃어주면 좋겠다.


 빈 가게는 불을 이미 꺼서 어두웠지만 치카게에게 어둠은 몹시도 익숙한 것이어서,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다가 카운터 아래에 넣어두었던 택배 상자를 하나 꺼내들었다.


 수취인 치카게 스미레님 귀하. 사인을 지켜보던 택배원이 본인이 아니지 않나. 하는 얼굴로 올려다 보다 귀찮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것을 기억한다. 발신인은 불명이지만 누가 택배를 붙인 것인지는 알만했다. 창백한 얼굴로 그 사람 뒤치닥거리가 생각보다 힘들다며 푸념을 늘어놓던, 마르고 예쁘장한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다가 손톱으로 테이프를 그었다.


 지이익-


 쉽게 뜯기는 테이프 사이로 보인 것은 분홍 벚꽃이 압화된 고운 카드였다.

 역시나 보낸 이의 이름은 없다. 카드를 치우자 연보라색의 자수가 곱게 놓인 하얀 가디건이 접혀 들어 있었다. 펼쳐들자니 라이카에게는 조금 클까 싶은 크기의 가디건에 수놓인 문양은 제비꽃의 모양을 하고 있다, 그렇지, 언젠가의 날에 너는 내가 봄 같다 말했다. 그것이 라이카를 말한 것인지, 아니면 스미레를 말한 것인지 물을까 싶다가 묻지 못한 순간이 있었다.


 라이카는 떠올린다. 너무 많은 기억들이 식간에 지나가 일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묻지 않은 것들에도 너는 이따금 답해왔다. 때로는 바로, 때로는 한 박자 느리게, 때로는 - 이토록 사무치는 순간들에.


 떨리는 손가락으로 카드를 열었다.


 [은애하는 당신이 모든 날들을 계속 사랑하기를]


 유려한 글씨체에 치카게는 카드를 구겼다. 지독한 기만이었다. 동시에 청원이라는 것도 알았다. 진심이란 것도 알았다. 하지만 들어줄 수 없는 청이기도 했다. 어째서 존재하지 않음에도 너는 아플까. 잘도 남은 시간을 말할까, 어떻게 감히. 치카게 라이카의 입매가 일그러진다. 끔찍하다. 사랑스럽다가 사랑스럽지 않다가 다시 돌아 사랑스럽다.


 실로, 지독하고, 실로 달고-실로 사랑스러운.


 


 내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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